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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잃다
‘구’(丘)의 나이가 29세였을 때입니다. 그는 ‘사양자’(師襄子)에게서 ‘고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금’(鼓琴)이란, 두드리는 악기와 타는 악기, 즉 ‘음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양자’는, ‘석경’(石磬)을 치는 악관을 이릅니다. ‘사양자’에서 ‘양’(襄)은 이름이고 ‘사’(師)는 악사(樂師)를 나타냅니다. 또, ‘석경’은, 아악기의 한 가지로, 돌로 만든 ‘경쇠’로서 소리가 아주 맑다고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 ‘구’는 열흘 동안이나 배웠건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하다고 여겼던지, ‘사양자’가 말했습니다.
“그만큼 익혔으면, 새로운 것을 배우도록 하세.”
그 말에 ‘구’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곡’은 벌써 익혔으나 아직 그 ‘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곡’(曲)은 ‘악보의 가락’을 뜻하고, ‘수’(數)는 ‘가락의 이치’를 의미한답니다. 그 얼마 후에, 사양자가 말했습니다.
“이제 ‘수’는 깨달았겠지, 그러면 이제 새로운 것을 배우도록 하세.”
그러자, ‘구’가 대답했지요.
“아직 ‘지’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지’(志)는 ‘뜻하는 바’를 말합니다. 또 얼마 뒤에 사양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만하면 ‘지’는 알았겠지, 이제 새로운 곡을 배우도록 하세.”
그렇지만, ‘구’는 다시 말했습니다.
“저는 아직, 이 곡을 지은 ‘위인’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인’(爲人)은, ‘그 사람의 됨됨이’, 즉 ‘삶의 세계’를 가리키지요. 얼마가 지난 뒤에 또 사양자가 말했습니다.
“가락 하나 놓고서도 그리 깊이 생각하기를 좋아하니 정말 황홀한 기쁨을 맛보고 있겠군.”
이렇듯 젊은이 ‘구’는 곡조 하나를 배우는 데 있어서도 속속들이 파고들었습니다. 그 배움의 정도를 왜 ‘호학’(好學)이라고 하는지, 이제는 짐작할 수 있겠지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이렇듯 ‘음악’에 대해서 배우기를 좋아했으니, 그에 대하여 박식하게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그 사실을 엿보게 하는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공자가 노나라의 악관인 태사에게 음악에 관하여 말했다. “음악의 전체를 알 만합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흡여’를 이룹니다. 그 뒤를 이어서 ‘순여’로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교여’로 가다가 나중에는 ‘역여’로 나갑니다. 그런 후에야 완성으로 치닫게 됩니다.”(자어노태사악, 왈; 악기가지야 시작 흡여야 종지 순여야 교여야 역여야 이성: 子語魯大師樂, 曰: 樂其可知也, 始作 翕如也, 從之 純如也, 曒如也, 繹如也, 以成)【논어 3-23】
여기에서 말하는 ‘악’(樂)이란, 음이 모여서 하나의 체계적 구성을 이룬, 완벽한 악곡을 가리킨답니다. 그리고 이 ‘악’은, 노래가 아니라, 심포니의 기악곡을 지칭한답니다. 그리고 ‘흡여’(翕如)에서 ‘흡’(翕)을 보십시오. 어때요? 새가 날개를 퍼드덕거리는 모습을 연상시키지요? 이는, 음악이 처음으로 ‘짓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타악기가 일시에 ‘꽝’하고 울리면서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순여’(純如)는, ‘사’(絲)의 음색이 주종을 이룬답니다. 다시 말하면, 현악기의 순수한 소리가 타악기를 뒤따른다는 뜻입니다. 또, ‘교여’(曒如)는 관악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말하면, ‘밝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 다음에 ‘역여’(繹如)는, 실이 꼬여 나가듯이 끌리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그 오묘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만듭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자는 ‘소’(韶)라는 음악에 대하여 말했다. “지극히 아름답고, 또한 지극히 좋다.” 또, 공자는 ‘무악’(武樂)에 대해서도 말했다.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좋음에 이르지는 못했다.”(자위소 진미의 우진선야 위무 진미의 미진선야: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 未盡善也)【논어 3-25】
여기에서 ‘소’(韶)란, 순(舜) 임금 때의 ‘악곡’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武)라고 표현된 ‘음악’은 주(周)나라 무왕(武王) 시대에 만들어진 악곡이라고 합니다. ‘무왕’은 무력으로 ‘상’(商) 왕조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로운 ‘순’ 임금 때의 음악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목가적 분위기의 음악일 터입니다. 그러나 무력을 좋아하는 ‘무왕’ 때의 음악은, 새로운 시작과 건설을 의미하는, 의욕에 찬 진보적인 음악이었겠지요.
젊은이 ‘구’는 그런 의미로, ‘소악’은 듣기에 지극히 아름답고 그 뜻을 새기기에도 지극히 착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반면에, ‘무악’은 듣기에는 지극히 아름답지만, 그 뜻을 새기기에는 지극히 착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美)는 그 소리를 가리키고, ‘선’(善)은 그 내용을 가리키는 성싶습니다.
너무나 음악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는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라면 신바람이 나서 끼어들었답니다. 그렇기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친구였고, 누구보다도 그런 사람을 아꼈습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한 번 볼까요?
악사 ‘면’이 공자를 만나러 왔다. 그가 섬돌에 이르자, 공자는 말했다. “섬돌이요.” 그리고 그가 자리에 이르자, 공자는 또 말했다. “자리요.” 손님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공자가 그에게 일러주었다. “아무개가 여기 있고, 아무개가 저기 있소.” 악사 ‘면’이 물러가자, 제자 ‘자장’이 물었다. “그게 그와 말하는 방식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맞다. 이게 진실로 그를 돕는 방법이다.”(사면현 급계, 자왈 계야. 급석, 자왈 석야. 개좌, 자고지왈 모재사 모재사. 사면출, 자장문왈 여사언지도여. 자왈 연. 고상사지도야.: 師冕見 及階, 子曰 階也. 及席, 子曰 席也. 皆坐, 子告之曰 某在斯 某在斯. 師冕出, 子張問曰 與師言之道與. 子曰 然. 固相師之道也.)【논어15-41】
‘사면’(師冕)은, ‘면(冕)이란 이름의 악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장님’으로 악사를 삼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면’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구’(丘)의 마음은 오죽이나 안쓰러웠을까요? 그는 그가 혹시 섬돌에 걸려서 넘어질까 하여 일러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습니다. 또, 그가 어디에 앉아야 될지를 몰라서 서성거리게 될까 하여 일러주지 않고는 못 배겼을 테지요. 그리고 그 곳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를 그 악사가 궁금하게 생각할까 하여 일일이 사람들을 소개하여 주었겠지요. 참으로 그 마음이 아름답고 착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리켜서 바로 ‘인’(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어느덧 ‘공구’(孔丘)의 나이가 30살이 되었습니다. 이때야말로 그가 말하는, 그 ‘입’(立)의 나이입니다. 갑골문자에서 ‘입’(立)이란 글자의 형태는, 사람이 넓은 대지 위에 두 발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이랍니다. ‘홀로 서기’를 했으니, 이제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도 ‘공구’를 ‘공자’(孔子)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공자가 30세가 되었을 당시의 일이 ‘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魯)나라 소공(昭公) 20년, 공자는 나이가 서른이 되었다.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안영’(晏嬰)과 함께 노나라로 왔는데,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나라도 작고 외진 지역에 자리를 잡았건만 패자(覇者)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진(秦)나라는, 비록 작아도 그 뜻이 원대하였고, 외진 곳에 처하였어도 다스림이 매우 바르고 마땅했습니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를 몸소 등용하여 대부(大夫)의 벼슬자리를 내리고 감옥에서 석방했습니다. 그 후, 그와 더불어 3일 동안 대화를 나눈 뒤에 그에게 나라의 일을 맡겼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면 ‘목공’은 왕(王)도 될 수 있었는데, 패자(覇者)가 된 것은 오히려 대단치 않은 일입니다.”
그 말을 듣고 경공은 아주 기뻐하였다.【사마천의 ‘공자세가’】
제나라의 ‘경공’(景公)은, 성(姓)이 ‘강씨’(姜氏)이고, 이름은 ‘저구’(杵臼)였지요. 그는 궁궐 짓기를 좋아하고 말을 모으는 등의 사치를 일삼았답니다. 그리고 ‘안영’(晏嬰)은 춘추시대에 살았던 제(齊)나라 ‘대부’로, 자는 ‘중평’(仲平)이고, ‘이유’(夷維) 사람입니다. ‘이유’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高密縣) 지방이지요. 제나라의 ‘영공’(靈公)과 ‘장공’(莊公)과 ‘경공’(景公)의 3대에 걸쳐서 55년 동안이나 그들을 차례로 모신 재상입니다. 그는 탁월한 정치가로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지었다는 ‘안자춘추’(晏子春秋)는, 그와 관련된 전국시대 사람들의 언행을 모아서 엮은 책이랍니다.
또한, ‘목공’(穆公)은, 춘추시대 진(秦)나라의 국왕으로, 기원전 659년에서 기원전 612년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백리해’ 등을 기용하여 일찍이 진(晉)나라를 격파하고 그 시기를 재패함으로써 그의 진(秦)나라를 ‘오패’(五覇) 중의 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진(秦)나라는, 주(周)나라 ‘효왕’(孝王) 때에 ‘진’(秦)에 봉해져서 제후국이 되었지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장가천(張家川) 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변법(變法)을 써서 나라가 부강해졌으며 ‘함양’(咸陽)으로 천도하여 ‘전국 7웅’(戰國七雄) 중의 한 나라가 되기도 했습니다.
‘백리해’(百里奚)는,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춘추시대에 우(虞)나라 대부였으나, 진(秦)나라가 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진나라의 노비로 보내질 때에 초나라로 도망쳤는데, 진나라 ‘목공’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다섯 장의 양가죽으로 그를 사서 재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를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 칭하였답니다.
‘목공’(穆公)이 왕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는 말이 앞에서 나왔지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분봉된 제후는 단지 ‘공’(公)이라든가 ‘후’(侯)라고만 칭할 수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주(周)나라에만 ‘왕’(王)이 있을 수 있었지요. 어느 제후든지 ‘왕’(王)이라고는 감히 칭할 수 없었는데, 주(周)나라가 차츰 쇠퇴해짐으로써 열국의 제후들이 멋대로 ‘왕’(王)이라고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춘추’(春秋)의 내용 중에서는 ‘경공’과 ‘안영’이 노나라로 왔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학자들은 ‘사기’에 사료를 잘못 이용했다고도 말합니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안영’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짚어 보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절검역행’(節儉力行)이 몸에 배어 있었으므로, 그는 몸이 비록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그가 지키는 절조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식사 때에 2가지 반찬을 먹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비단 옷을 입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허름한 옷 한 벌로 30년을 지냈다고 합니다.
‘안자의 어자’란 말이 있습니다. ‘안자’(晏子)란, ‘안(晏) 선생님’이라는 뜻임은 알지요? 그리고 ‘어자’(御者)는, ‘말구종’, 즉 ‘말을 부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안영’의 말구종은 허우대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자기가 재상의 말구종이라는 사실을 큰 영광으로 여기고, 위의를 갖춘 후에 거들먹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모양을 보고, 그의 아내는 이혼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말구종이 그 까닭을 묻자,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주인인 재상 안평중은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데, 당신은 기껏 말구종에 불과하면서 이렇듯 거만을 부리니 나는 그 꼴을 보고 살아갈 수가 없소.”
말구종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머쓱해졌습니다. 그 후로 그는 일신하여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더욱 멋진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말구종의 태도가 변한 걸 보고, ‘안영’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말구종으로부터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모두 들은 ‘안영’은, 아내의 말 한 마디에 새로운 사람이 된, 그 말구종을 대부(大夫)로 높여서 썼다는군요. 참으로 ‘안영’의 사람됨이 넉넉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안영’은 제나라 3대 임금을 섬겼습니다. 어느 때, ‘양구거’(梁丘據)라는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3대의 세 임금들은 그들의 성격이나 마음이 모두 각각일 터인데, 이들 세 임금들을 모두 원만하게 섬겼다는 말은 당신이 마음을 세 가지로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까? 어진 사람으로 자기 마음을 여러 번이나 바꾸어서 임금을 섬긴다는 것은 나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그에 대한 ‘안영’의 대답은 이러했지요.
“다만 한 마음으로 백 임금을 섬겨야 될 뿐이고, 절대로 세 마음으로 한 임금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자, 이만하면 그의 참된 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니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공자의 말이 ‘논어’에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안평중은 사람과 잘 사귀는구나! 오래될수록 오히려 공경하니.”(자왈 안평중선여인교, 구이경지.: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 5-17】
사람을 잘 사귀기는 그래도 쉬운 편입니다. 그러나 오래 사귈수록 더욱 더 공경스럽게 대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오래 사귀다가 보면, 서로 대하는 정이 무감각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켜야 될 예의를 곧잘 망각하게 됩니다. 또 오래 사귈수록 상대방으로부터 존경받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래 사귈수록 존경받는 사람이 바로 ‘안영’이라고, 공자는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또 훌쩍 세월이 흘러서 공자의 나이는 35세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노나라에서는 하나의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계평자’(季平子)는 ‘후소백’(郈昭佰)과 닭싸움을 벌였지요. 그러다가 말다툼이 벌어져서 ‘계평자’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후소백’의 땅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계평자’는 알고 있지요? 앞에서 설명한 ‘삼환’의 가문 중에서 제일 큰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후소백’은 노나라의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니, ‘후소백’은 분한 마음이 들었겠지요. 그래서 ‘후소백’은 노나라의 군주인 ‘소공’에게로 쪼르르 달려가서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계씨’를 미워하고 있었던 터라, 소공이 계평자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자, 계평자는 맹손씨 및 숙손씨와 연합하여 소공에게 맞섰습니다. 그런데 워낙 그들의 힘이 강했습니다. 소공은 패해서 제나라로 도망쳤습니다. 그로 인해 노나라는 어지러워졌습니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이었지요. 공자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태산’(泰山)의 산모롱이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덤 옆에서 한 여인이 슬피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공자는 한 제자에게, 그 여인이 울고 있는 까닭을 알아보라고 했지요. 그 제자가 다가가서 묻자,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시아버지는 범에게 물려서 죽었고, 남편도 범에게 물려서 죽었으며, 또 이번에는 자식마저 범에게 물려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꼴을 당하면서 왜 이 곳을 일찌감치 떠나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었습니까?”
그 여인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고을에 까다로운 정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공자에게로 가서 들은 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 한 마디를 했습니다.
“까다로운 정치는 범보다도 무섭다!”
이는, ‘예기’(禮記)에 있는 말인데, 이 말이 바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입니다.
공자는 제(齊)나라로 간 다음에 ‘고소자’(高昭子)의 손님(문헌에서는 家臣이라고 함)이 되어서 ‘경공’(景公)과 통하려고 하였습니다. ‘고소자’는 제나라의 귀족이었지요. 이름은 ‘장’(張)입니다. 그러나 ‘경공’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럭저럭 공자의 나이는 36세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공자는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을 토론하였고,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모든 걸 잊고 심취하자, 제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자를 칭송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의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소’라는 음악을 듣고 3개월 동안이나 고기 맛을 모를 지경이었다. 공자는 말했다. “음악을 감상하되, 미처 이에 이를 줄은 몰랐다.” (자재제문소, 삼월 부지육미, 왈 부도위악지지어사야.: 子在齊聞韶, 三月 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논어 7-13】
제(齊)나라에 ‘순’(舜) 임금의 소악(韶樂)이 전해지게 된 것은, ‘순’ 임금의 자손인 ‘진경중’(陳敬重)이란 사람이 제나라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 음악이 좋다고 하기로서니, 3개월 동안이나 그 좋은 고기 맛을 잃었다니요? 참으로 공자의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드디어 공자는, ‘고소자’가 힘을 보탬으로써 ‘경공’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공’은 공자를 만나게 되자, 그 동안 가슴에 넣어 두었던 말을 불쑥 꺼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이 정말로 멋집니다. 공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이는, 저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한다면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듯싶습니다. ‘경공’은 크게 느꼈습니다.
“좋은 말씀이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며 아비가 아비답지 않고 자식이 자식답지 않다면, 비록 내가 어찌 편히 먹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 또한, ‘논어’에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는, 노나라 ‘소공’(昭公)의 말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에, 경공은 공자를 만나서 또 물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절약입니다.”
이 한 마디 말은, 늘 공자가 가슴에 지니고 있었던 말입니다. 공자는 모든 것을 아껴서 내일에 대비하는 일이야말로 국가의 부강정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경공’은 공자의 말이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자에게 ‘이계’(尼谿)의 땅을 영토로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안영’이 나서서 강력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면 반대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첫째로, 유학자는 말재간이 있고 융통성을 잘 부리기 때문에 법으로 규제할 수가 없다고 했지요. 둘째로, 거만하고 제멋대로 굴기 때문에 아랫사람으로 두기 어렵다는 겁니다. 셋째로, 상례를 중시하여 슬픔을 다한다고 파산까지 하면서 큰 장례를 치르니 그들의 예법을 풍속으로 삼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넷째로, 도처에 유세를 다니며 관직이나 후한 녹을 바라니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 없답니다. 다섯째로, 그 예를 몇 세대에 걸쳐서 배워도 모두 배울 수 없으며 평생을 다해도 터득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후, ‘경공’은 공자를 공손히 접견하기는 했으나 다시는 예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의 이야기가 ‘논어’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의 대우에 관해 말했다. “계씨 정도로 대우하지는 못하겠지만, 계씨와 맹씨의 중간쯤은 대우해 주겠소.” 그러다가 그는 다시 말했다. “내가 늙었으니, 아무 쓸 일이 없소.” 그러자, 공자는 그 나라를 떠났다.(제경공 대공자왈 약계씨즉오불능, 이계맹지간 대지. 왈 오노의 불능용야. 공자행: 齊景公 待孔子曰 若季氏則吾不能, 以季孟之間 待之. 曰, 吾老矣 不能用之. 孔子行.) 【논어 18-3】
이를 두고 ‘낙심천만’(落心千萬)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토록 어렵게 만난 경공이었건만, 그 모든 기대가 그 한 마디 말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자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서 노나라로 돌아왔습니다.
노나라는 여전히 어수선했습니다. 노나라의 권력자들은, 혹시 제나라가 쳐들어올까 보아서 진나라에 구원을 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그런 형편이었으니, 공자에게 벼슬길이 열릴 턱이 없었습니다. 공자는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다만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아, 그리 큰 몸집의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 눈앞에 공자의 어진 얼굴이 크게 떠오릅니다. 이제 또 나의 시를 소개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안개를 밟고 산을 오른다.
고요에 싸여 있는 먼동
다듬어지지 않았으므로 들쭉날쭉한
가난한 나무들,
어둠을 벗고 숲이 일어서기도 전에
벌써 기침하는 산
울림만이 손끝에 남고
찬란한 느낌으로 무릎을 꿇는다.
그분은 눈빛 찬찬히 내려다보시는데
나는 내 마음밖에 드릴 게 없어라.
밤새운 별을 주워 모으면
한 줄기 은하수보다 맑게 흐르는 길
아파하는 숫된 새벽이여
눈물로 산이 산을 닦으니
하늘은 온 세상의 일, 가슴으로 듣는다.
모은 잎에 꿈이 닿는다.
- 졸시 ‘숫된 새벽’ 전문
음악을 듣고 감상할 때는 ‘숫된 새벽’ 같은 고요함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제대로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이 음악을 배우는 데에는 그보다 더한 고요와 정성이 필요하겠지요.
젊은이 ‘구’는 음악을 배울 때, ‘악보의 가락’을 익히고 나서 ‘가락의 이치’를 익혔으며, ‘가락의 이치’를 익히고 난 다음에 ‘가락의 뜻하는 바’를 익혔습니다. 그런 후에, ‘곡을 지은 사람의 됨됨이’까지 속속들이 파고들었습니다.
공자의 성실함에 그만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이 말을 듣는 이들에게‘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가르침’이나 ‘배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행위입니다. 이보다 더한,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숫된 새벽’에 듣는 소리는 모두 음악입니다. 자연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순수의 음악입니다. 눈물 같은 안개로 산이 산을 닦으니 하늘은 온 세상의 일을 가슴으로 듣습니다. 벌써 새벽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자가 두드리고 타는 ‘고금’ 소리 또한 들리는 듯도 합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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