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2. 니구산 아래에서 태어나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1.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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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구산 아래에서 태어나다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의 노(魯)나라에 키가 10척(尺)이나 되는 한 무인(武人)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을 ‘숙량흘’(叔梁紇)이라고 했습니다. 춘추시대(春秋時代)란, 그 당시에 날로 증가해 가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새로운 영토가 필요했는데, 새 영토를 얻기 위해 이웃나라들끼리 끝없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열국(列國) 사이에서 격렬한 항쟁이 거듭되던 시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키가 10척이라면, 지금으로 계산하여 얼마나 될까요? 그 당시에는 8촌(寸)이 1척으로 되며, 이는 지금의 6촌(寸)2분(分)2리(厘)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숙량흘’의 키는 186센티미터 정도가 되었을 듯합니다.
 그가 젊었을 때(노나라 양공 10년 봄, 기원전 563년)에 진(晉)나라가 그 세력을 넓히기 위하여 노(魯)나라와 조(曹)나라와 주(邾)나라 등과 연합하여 ‘핍양’(偪陽)이라는 작은 나라로 쳐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숙량흘은 ‘맹손멸’(孟孫蔑)이 이끄는 군대의 진(秦)과 적(狄) 두 장수와 함께 출전하여 ‘핍양성’의 북문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핍양의 장수들은 한 계책을 썼습니다. 즉, 북문을 위로 들어 올리고 적군의 장수와 병사들을 유인하여 성 안으로 끌어들인 후에 성문을 내려서 적군을 몰살시키려는 작전이었지요. 이처럼 위로 들어 올리는 성문을 ‘갑문’(閘門)이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갑문’이 번쩍 위로 올리어졌는데, 진나라의 ‘진’과 ‘적’ 두 장수들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먼저 성 안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숙량흘이 노나라의 병사들을 이끌고서 성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습니다. ‘갑문’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그들의 계책을 눈치 챈 숙량흘은, 내려오는 문짝을 그의 두 손으로 버티면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성 안에 매복한 군사가 있다. 빨리 후퇴하라!”
 이에, 진나라 맹손멸의 두 장수는 부하들을 이끌고 모두 무사히 성문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숙량흘’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삼군(三軍)에서 으뜸가는 장수로 인정받았지요. 
 그리고 7년이 지났을 때였지요. 이웃의 힘 있는 제(齊)나라가 노나라의 북부 변경을 침략했습니다. 제나라의 장수인 ‘고후’(高厚)는 많은 병사들로 노나라의 대장인 ‘장무중’(臧武仲)과 ‘숙량흘’을 방읍(防邑)에서 에워쌌습니다. 
 보급이 끊기고 위기에 몰린 노나라의 두 장수는 원군을 요청하였지요. 원군은 태안(泰安)의 동쪽인 양관(陽關)으로부터 진공을 시도했으나, 제나라 군대의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숙량흘’은, 대장 장무중의 부하인 장주(臧疇)와 장가(臧賈) 두 형제와 더불어서 3백여 명의 용사를 데리고 제나라의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이처럼 숙량흘은 용맹스러운 장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커다란 고민이 있었습니다. 아내 ‘시씨’(施氏)와의 사이에 딸만 아홉 명이 있었고 아들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작은 집안의 딸을 첩으로 맞이하여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맹피’(孟皮)였으며, 자(字)는 ‘백니’(伯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머리가 우둔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에도 이상이 있어서 절름거렸습니다.
 숙량흘은 모처럼 얻은 아들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그 아들로는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튼튼한 아들이 생기기를 기대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록 아내와 첩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숙량흘’은 또다시 아내를 얻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곡부의 ‘안양’(顔襄)이라는 노인에게로 가서 딸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노인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지요. ‘안양’은 세 딸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으로 말하면, 키가 열 자나 되고 그 힘을 당할 사람이 없다. 나는 이 사람을 몹시 탐내고 있으나 다만 나이가 좀 많은 게 흠이다. 그러나 성품이 아주 엄숙하니 달리 의심할 필요는 없다. 너희 중 누가 이 사람에게 시집가겠느냐?”
 첫째 딸과 둘째 딸은 거절하였으나, 막내딸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아버지 명령대로 행할 뿐인데 무엇을 물으십니까?”
 이렇게 되어, 숙량흘은 ‘안양’의 막내딸을 셋째 여인으로 맞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안징재’(顔徵在)였지요. 
‘징재’는, 숙량흘의 아내가 된 다음, 남편의 나이가 자기보다 갑절이나 많으니  정성을 들여야 아기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니구산(尼丘山)에 다니며 기도를 한 뒤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바로 노나라 양공 22년(기원전 551년) 10월 경자일(庚子日)의 일이었습니다. 숙량흘은 이 아들의 이름을 ‘구’(丘)라고 지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중니’(仲尼)라는 ‘자’(字)와 공자(孔子)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요. 그 3년 후에 숙량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사기’에 ‘숙량흘은 안씨녀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라고 기술해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야합’(野合)이라는 데에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나는, 그 중 ‘이 두 사람의 결혼이 정식적인 결혼이 아니었다.’라는 의견에 수긍합니다. 짐작하건대 이는, 숙량흘의 본가에서는 인정이 안 된 결혼이었을 터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구’(丘)는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자랐겠지요. 또, 사마천은 ‘사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공구는 훌륭한 집안의 후손인데, 그 집안은 송나라에 있을 때에 망하였다. -중략- 내가 듣기로, 훌륭한 집안의 자식들은 비록 세상에서 대접은 못 받는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사리에 통달한 자들이 있다고 한다. 지금 ‘공구’라는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예를 좋아한다. 예를 좋아한다는 게 바로 통달한 자의 증표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으면 곧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어라.”(공구성인지후 멸어송 -중략-오문성인지후 수불당세 필유달자 금공구년소호례 기달자여? 오즉몰 약필사지: 孔丘聖人之後 滅於宋. -中略- 吾聞聖人之後 雖不當世 必有達者. 今孔丘年少好禮 其達者歟? 吾卽沒 若必師之.)【공자세가(孔子世家)】

 이 내용은, 공자가 살았을 당시의 노나라 권력자인 대부 맹희자(孟僖子)가 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을 때, 그의 후계자인 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훈계하여 한 말이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공자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 보고자 합니다. 고대 중국의 상왕조(商王朝)의 30대 임금은 ‘제을’(帝乙)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공자 가계의 시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제을’은 ‘미자계’(微子啓)를 낳고 ‘미자계’는 ‘송공계’(宋公稽)를 낳고 ‘송공계’는 ‘정공신’(丁公申)을 낳고 ‘정공신’은 ‘양공희’(襄公熙)를 낳고 ‘양공희’는 ‘불보하’(弗父何)를 낳고 ‘불보하’는 ‘송보주’(宋父周)를 낳고 ‘송보주’는 ‘세자승’(世子勝)을 낳고 ‘세자승’은 ‘정고보’(正考甫)를 낳고 ‘정고보’는 ‘공보가’(孔父嘉)를 낳고 ‘공보가’는 ‘자목금보’(子木金父)를 낳고 ‘자목금보’는 ‘역이’(睪夷)를 낳고 ‘역이’는 ‘방숙’(防叔)을 낳고 ‘방숙’은 ‘백하’(伯夏)를 낳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고 ‘숙량흘’이 ‘구’(丘), 즉 ‘공자’를 낳았습니다. 이는 ‘공자가어’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제을’이 첫아들인 ‘미자계’를 낳았을 당시에 그의 어머니는 정비(正妃)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첩이었지요. 그 후, 그 어머니는 정비가 죽고 나서야 정실이 되었는데, 그 때에 낳은 아들이 ‘주’(紂)입니다. 그래서 이 ‘주’가 적자(嫡子)가 되었고, 그가 왕위를 잇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미자계’와 ‘주’는 친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주’(紂)가 임금인 ‘상왕조’는,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주나라 사람들은, ‘상왕조’를 무너뜨린 후에 그 수도 이름을 따서 은(殷)나라로 격하하여 불렀지요. 그러므로 은나라의 원래 이름은 ‘상’(商)이었습니다.
 주나라의 ‘무왕’은 상왕조의 ‘주왕’(紂王)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차지하자,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에게 ‘조가’(朝歌)라는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왕’의 뒤를 이어서 어린 ‘성왕’(成王)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무경’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어린 성왕을 보좌하고 있던,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무경의 난’을 평정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주공’은, ‘무경’의 큰아버지인 ‘미자계’로 하여금 상왕조의 옛 도읍지인 상구현(商丘縣) 부근에 상왕조의 자손을 모아서 다스리게 하고, 그 국호를 ‘송’(宋)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공자의 선조는, ‘미자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알고 있듯이, 송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이지요.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공자의 조상 중에서 ‘불보하’(弗父何)는 원래 송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으나 아우(厲公)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답니다. 그리고 그 후대에 와서 ‘정고보’(正考甫)는 송나라 세 임금을 모셨는데 관직이 높아질 때마다 더욱 공손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글이 돌에 새겨져 있었답니다.
 ‘첫 번째 벼슬자리에 올랐을 때, 나는 머리를 숙였다. 두 번째 벼슬자리로 더 높아졌을 때, 나는 등을 구부렸다. 세 번째로 벼슬자리가 더욱 더 높아졌을 때, 나는 허리까지 굽혔다. 길을 갈 때는 가운데를 걷지 않고 한옆으로 담장 가를 따라 다녔는데, 누구도 감히 나를 깔보지 못했다. 조그만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먹으며 욕심 없이 살았다.’
 그런데 주공(周公)의 이름은 ‘단’(旦)이었고, 그의 형인 ‘무왕’(武王)은 그를 노(魯)나라의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주나라에 남아서 ‘무왕’을 보필하였고, 그의 아들 ‘백금’(伯禽)을 노나라로 보냈습니다. 하남(河南)의 상구(商丘)에 자리 잡은 송나라, 그리고 산동(山東)의 곡부(曲阜)에 터를 잡은 노나라, 이 두 나라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답니다. ‘곡부’에서 ‘상구’까지는 약 2백 킬로미터의 거리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공자의 선조들은 대대로 송나라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송나라의 대사마(大司馬)였던 ‘공보가’(孔父嘉)의 대에 와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공보가’의 부인은 아주 미녀였답니다. 그런데 송나라의 수상에 해당되는 태재(太宰)인 화독(華督)이 그 부인에게 눈독을 들이게 되었으며, 그가 결국은 ‘공보가’를 독살하고 그 부인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 ‘화독’은 보복이 두려워서 ‘공보가’의 아들인 ‘자목금보’(子木金父)까지 암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자목금보’는 송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노나라로 도망을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공자 집안은 그 후로 노나라의 도읍지인 곡부에서 살게 되었답니다. 
 공자의 가계를 살펴보면 좀 이상한 게 있습니다. 그 이름에 ‘공’(孔)이라는 글자가 붙은 사람은 ‘공보가’(孔父嘉)뿐입니다. 그러므로 공자의 선조들은 성(姓)이 없었다고 보아야 옳겠습니다. 다만, ‘구’(丘)가 유명해지고 나서 ‘공’(孔)이라는 성이 붙여졌다고 생각됩니다.
 또 ‘공자가어’에는, ‘공자는 열아홉 살 때에 송나라 견관씨(幵官氏)의 딸과 결혼했고, 그 1년 뒤에 아들인 백어(伯魚)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송나라 여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그 조상이 송나라 사람이라는 데에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백어’는 자(字)이고, 진짜 이름은 ‘리’(鯉)입니다. 이는, ‘잉어’라는 뜻이지요. 공자는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딸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사위는 ‘공야장’(公冶長)이라는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지요.

 공자는 공야장에 대하여 말했다. “딸을 그에게 주어서 처로 삼게 할 만하다. 비록 옥중에 있기는 하나, 그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자위공야장 가처야 수재루설지중 비기죄야 이기자처지: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논어 5-1】

 그의 이름인 ‘공야장’에서 ‘성’(姓)은 ‘공야’이고 이름은 ‘장’이며, 자(字)는 ‘자장’(子長)입니다. 앞의 말에서 ‘위’(謂)는 ‘사람을 평가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리고 ‘누설’(縲絏)의 ‘누’는 ‘죄인을 묶는 데 쓰는 검은 포승’을 말하고, ‘설’은 ‘묶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설’은 ‘감옥 또는 감옥에 갇히는 일’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공자는 ‘공야장의 사람됨을 보아서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일설에는 공야장의 이름이 ‘지’(芝) 또는 ‘장’(萇)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자의 이복형인 ‘맹피’(孟皮)를 기억하지요? 그 사람도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답니다. 아들의 이름은 ‘공멸’(孔蔑)이고, 딸은 이름을 알 수 없으나 공자가 ‘남용’(南容)이라는 사람에게 시집보냈지요. 그러면 공자의 후대는 또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사마천의 ‘사기’에는 공자 이후의 계보가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리’(鯉)를 낳았는데, 그의 자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급’(伋)을 낳았는데, 그의 자는 ‘자사’(子思)이고, 62세까지 살았다. 자사는 일찍이 송나라에서 고생하며 살았고 ‘중용’(中庸)을 지었다. 자사는 ‘백’(白)을 낳았는데, 백의 자는 ‘자상’(子上)이고, 47세에 죽었다. 자상은 ‘구’(求)를 낳았는데, 그의 자는 ‘자가’(子家)이고, 45세까지 살았다. 자가는 ‘기’(箕)를 낳았는데, 기의 자는 ‘자경’(子京)이고, 46세까지 살았다. 자경은 ‘천’(穿)을 낳았는데, 천의 자는 ‘자고’(子高)이고, 51세까지 살았다. 자고는 ‘자신’(子愼)을 낳았는데,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위(魏)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자신은 ‘부’(鮒)를 낳았는데, 57세까지 살았으며 일찍이 진왕(陳王) ‘섭’(涉)의 박사(博士)가 되었고, 진(陳)나라에서 죽었다. ‘부’의 아우 ‘자양’(子襄)은 57세까지 살았는데, 일찍이 효혜황제(孝惠皇帝)의 박사가 되었다가 장사(長沙)의 태수로 옮겨 갔다. 자양은 ‘충’(忠)을 낳았는데, 57세까지 살았다. 충은 ‘무’(武)를 낳았고, 무는 ‘연년’(延年)과 ‘안국’(安國)을 낳았다. 안국은 황제의 박사가 되었다가 관직이 임회(臨淮) 태수에까지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안국은 ‘앙’(卬)을 낳았고, 앙은 ‘환’(驩)을 낳았다. 【공자세가(孔子世家)】

 그런데 공자는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논어에 기록되기를, 공자가 백어에게 “너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배운 적이 있느냐? 사람이 시의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마주 대하고 서 있는 바와 같으니라.”라고 하였답니다. ‘주남’과 ‘소남’은 모두 ‘시 모음’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묶음’들을 가리킵니다. ‘시 모음’이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시경’(詩經)을 말합니다. ‘시 모음’은 3가지의 ‘큰 묶음’이 있지요. 즉, ‘풍’(風)이라고 하여 ‘각 지방의 민요를 묶은 것’과 ‘아’(雅)라고 하여 ‘귀족의 노래를 묶은 것’, 그리고 ‘송’(頌)이라고 하여 ‘종묘제례악을 묶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 모음’ 중에 ‘풍’이 160수이고 ‘아’가 105수이며 ‘송’은 40수로, 모두 305수로 되어 있습니다. ‘주남’은 이 중에서 ‘풍’의 첫 번째 묶음인데,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게 대부분이어서 고대 중국인들의 소박한 생활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남’은 ‘풍’의 두 번째 묶음인데, 위수(渭水) 남쪽지방에서 불리어진 노래를 수집한 듯싶습니다.
 공자가 ‘시 모음’을 제자들의 교육에 즐겨서 활용한 일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근본으로 생각한 게, 바로 시와 음악이지요. 공자가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시 모음’ 중의 한두 구절을 흔히 인용한 까닭은, 때때로 그에게 예술가적 기질이 발동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여겨집니다.
 한번은 공자의 제자인 듯한 ‘진항’(陳亢)이 공자의 아들인 ‘백어’에게 “당신은 아버지에게서 별다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지요. 그 말을 듣고 ‘백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아버지가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공손히 뜰을 지나가는데, 물어보시기를 ‘시를 배운 적이 있느냐?’라고 하시기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시를 배우지 않았다면 더불어 할 말이 없느니라.’라고 하셔서 나는 물러난 후에 시를 배웠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또 혼자 아버지가 서 계시기에 내가 역시 공손하게 뜰을 지나가는데, 물어보시기를 ‘예를 배운 적이 있느냐?’라고 하시기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예를 배우지 않았다면 제대로 서지 못한다.’라고 하셔서 나는 다시 물러간 후에 예를 배웠습니다. 이 두 가지만 들었을 뿐입니다.”(미야 당독립 이추이과정 왈 학시호 대왈 미야 불학시 무이언 이퇴이학시 타일 우독립 이추이과정 왈 학례호 대왈 미야 불학례 무이립 이퇴이학례: 未也. 嘗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詩乎 對曰 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 他日 又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禮乎 對曰 未也, 不學禮 無以立 鯉退而學禮)【논어 16-13 중에서】

 앞의 말을 듣고, 진항은 돌아가서 매우 기뻐하며 “하나를 듣고 셋을 알게 되었다. 시를 알게 되었고 예를 알게 되었으며, 또 군자가 그의 아들을 대하는 태도를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답니다. 
 진항은 공자의 제자라고 하기도 하며 아니라고 하기도 합니다. 자(字)를 ‘자금’(子禽)이라고 했지요. 진항은, 공자가 친아들에게는 문인(門人)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 이외에도 달리 교훈을 일러준 게 없나 하여, 그렇게 물어 보았겠지요. 
 군자는 자식을 서로 바꾸어서 가르치는 게 당시의 통례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정이 가르침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고례(古禮)에 의하면, ‘사’(士) 이상의 가문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딴채에 떨어져 살도록 되어 있었다는군요. 참으로 무릎을 치게 됩니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가 무려 2500년 전인데, 지금과 그 삶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하더라도 변함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또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디만큼 쏘아 올렸나.
우레 소리로 홰를 차고 날아가서
번개처럼 깃을 펼쳐 꽃피운다.
높이 뿌려놓은 별빛 밟으며
하나로 어우러져 춤을 벌인다.
눈빛 뜨겁게 마주 닿으면
차가운 가슴에도 불꽃이 필까.
저 하늘에 피가 돌아서
어둠의 갈피마다 꽃물 들이고
타다가 스러져서 별을 묻는다.
보아라, 바람 자는 구름 밖까지
고운 영혼 가물가물 걸어간 길을,
가다가 힘들고 날이 저물면 
부싯돌 같은 사랑 마주해
부싯깃 같은 구름에 대고 치리.
우리 숨결이 숨겨 둔 불씨
다시 꺼내어 꽃인 양 다독거리리.
- 졸시 ‘사랑놀이’ 전문
                       
 ‘숙량흘’은 이미 두 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게다가 나이가 아주 많은 상태에서 셋째 번으로 ‘안징재’와 결혼하였습니다. 일설에는 ‘숙량흘’은 70세에 가까웠고 ‘안징재’는 16세를 좀 넘은 나이였다고도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하지는 않더라도, ‘안징재’가 ‘남편의 나이가 자기보다 갑절이나 많으니 정성을 들여야 아기를 낳을 수 있다.’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았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집안에서 그 결혼을 인정해 주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에 ‘야합’(野合)이란 말을 썼겠지요.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나이 차이에 상관없이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숙량흘’은 집을 버리고 ‘안징재’를 택했습니다. 그 사랑이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불꽃놀이’와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고운 영혼 가물가물 걸어간 그 길’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우리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고작 몇 년 동안의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 ‘불씨’는 지금까지 남아서 온 세상을 밝게 비치고 있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