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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서 때에 맞추어 익히다
“얘들아, 이리 모여라. 제사놀이하자!”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아이가 동네 아이들을 향하여 크게 말했습니다. 서너 아이들이 우르르 그 아이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아이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흙을 봉긋하게 쌓아 올렸습니다.
“이게 무덤이다. 이 앞에다 제사를 차리자!”
그 아이는 아주 익숙한 솜씨로 제사 때에 쓰는 여러 가지 그릇들을 제사 지내는 법에 따라서 늘어놓았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구’(丘, 언덕)라고 했습니다. 네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어린이 ‘구’는 함께 놀 아이들이 없으면 혼자서도 제사놀이를 즐겼습니다.
원래 어린이 ‘구’는 노나라의 ‘추읍’(陬邑)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와 함께 ‘곡부’(曲阜)로 이사했습니다. ‘추읍’은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추성’(陬城)을 가리킵니다. 그 성의 서쪽에 ‘궐리’(闕里)가 있습니다. 이 마을은 바로 ‘구’ 어린이가 태어난 곳입니다. 그 후에 ‘곡부’로 이사했으나, 그 마을도 역시 ‘궐리’라고 불렀답니다.
그런데 ‘곡부’는 노나라의 서울이었으므로 역대의 군주들을 모셔 놓은 무덤들이 있었습니다. ‘구’ 어린이의 집은 그 무덤들과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그 무덤들 앞에서 제례(祭禮)가 있을 적마다 그 곳으로 가서 쉽게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여섯 살 때에 ‘구’ 어린이는 이미 제사 지내는 방법과 순서를 모두 환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난감 가게에서 제사 때에 쓰는 그릇들, 즉 곡물과 야채를 담는 그릇이나 고기를 담는 그릇을 비롯하여 술을 담는 잔 등을 산 다음에 향을 피우고 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축문(祝文)을 읽는 등 제주(祭主)의 흉내를 아주 멋지게 냈습니다.
앞에서 말한 그릇들, 다시 말해서 ‘제기’(祭器)의 원문은 ‘조두’(俎頭)입니다. ‘조’(俎)는 고대에 고기를 썰 때에 쓰는 ‘도마’로서 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모양은 ‘직사각형’이었지요. 또 ‘두’(頭)는 ‘식기’인데, ‘나무로 만든 것’과 ‘구리로 만든 것’과 ‘도자기로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3가지가 있었고, 그 모양은 ‘둥근꼴’이었답니다. 그래서 ‘조두’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제기’를 가리킵니다.
아무튼 그 당시에 그만한 놀이도 드물었겠지요. 그 놀이가 어찌나 재미가 있었던지, ‘구’ 어린이는 전혀 싫증을 내지 않고 날마다 흠뻑 빠져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구’에게 물었습니다.
“넌 그 놀이가 그리 재미있니?”
‘구’ 어린이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글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이 놀이 말고는 할 일이 없어요.”
어머니는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아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일부터 내가 글을 가르쳐 주마.”
‘구’ 어린이는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습니다.
다음날부터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글을 가르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너무 어려운 글자를 한 번에 많이 가르치게 되면 곧 싫증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교적 알기 쉬운 2백 개의 글자를 골라서 한 달 동안에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 어린이는 며칠 동안에 그 글자들을 모두 깨우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똑똑함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구’ 어린이는 어머니를 재촉하여 어느 틈에 3백 자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명석함에 마음이 흐뭇하기도 했지만,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라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아들이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그만하고 끝내도록 하자.”
그러나 ‘구’ 어린이는 눈을 빛내며 말했습니다.
“글자를 배우는 게 아주 즐거워요. 조금만 더 가르쳐 주세요.”
물론, 이 당시에 ‘구’ 어린이가 배운 글자는 지금 우리가 아는 글자와는 아주 달랐지요. 그 글자는 ‘과두’(科斗)라는 옛 문자입니다. 이는, 중국의 글자인 ‘전서’(篆書) 이전에 사용된 가장 오래 된 글자입니다. 글자 획의 모양이 올챙이를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답니다. ‘과두’(科斗)는 ‘과두’(蝌蚪)를 말하는데, 이는 ‘올챙이’를 가리킵니다.
그 이후로, ‘구’ 어린이는 하루 종일 글자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밥을 먹는 일조차 잊은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깨우친 글자는 무려 일천 자나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에 열 줄을 읽었으며, 한 번 읽은 내용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어렵게 그 뜻을 알아낸 다음에 글자 위에 점을 찍어 가며 가르치면, 그는 한 번 읽은 후에 그 내용을 모두 깨우치고 더 가르쳐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런데 ‘구’ 어린이가 읽은 책은 지금과 같았을까요? 아니지요. 그 당시의 책은 모두 손으로 쓴 ‘사본’(寫本)이었답니다. 당시의 전형적인 사본은, 나무담장을 작게 만들어 놓은 것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대나무를 얇게 잘라서 실로 묶은, 이른바 ‘죽간’(竹簡)입니다. ‘죽간’은 ‘글자를 기록하던 대나무 조각’ 또는 ‘대나무 조각으로 만든 책’(冊)을 이릅니다. 이런 책은 양이 많아서 다루기가 몹시 불편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힘이 부쳤습니다. 이제는 더 가르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지요.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아들을 그 마을의 서당으로 보냈습니다. ‘구’ 어린이는 서당에서 3년 동안 배웠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습니다. ‘구’ 어린이는 어머니에게 다른 서당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서당 선생님이 너무 느리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어머니는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네 외할아버지께 가르침을 받도록 하자! 외할아버지는 아시는 게 아주 많으시지. 요즘은 연세가 높으셔서 제자를 두지 않고 계시지만, 너라면 반드시 가르쳐 주실 거야.”
그 다음날로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습니다.
“아버지, 이 아이를 가르쳐 주십시오.”
외할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선뜻 대답했습니다.
“네가 배우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나는 ‘예’(禮)와 ‘악’(樂)과 ‘서’(書)와 ‘수’(數)의 네 분야를 가르쳐 주겠다. ‘사’(射)와 ‘어’(御)는 잘 알지 못한다.”
이는, 그 당시의 배움은 지금과 달라서 ‘육예’(六藝)였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육예’는 바로 ‘예’(禮, 예법), ‘악’(樂, 음악), ‘사’(射, 활쏘기), ‘어’(御, 말 몰기), ‘서’(書, 역사), ‘수’(數, 셈하기)의 6가지를 말합니다. 이 중에서 ‘예’는 ‘예자위이’(禮者爲異)라고 하여 ‘사람 사이의 분별을 위한 것’이며, ‘악’은 ‘악자위동’(樂者爲同)이라고 하여 ‘사람 사이의 화합을 위한 것’이지요. 조금 더 설명하자면, ‘예’와 ‘악’은 ‘문적’(文的) 교양이고, ‘사’와 ‘어’는 ‘무적’(武的) 교양이며, ‘서’와 ‘수’는 ‘문무’(文武)의 공통적인 교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육예’에 능통한 사람을 ‘사’(士, 선비)라고 불렀지요.
특히 ‘선비’의 기본기는 ‘육예’ 중에서도 ‘사’와 ‘어’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의 전쟁이 ‘전차전’(戰車戰) 중심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선비는 전쟁이 일어나면 즉시 ‘전차전’을 치르는 임무를 맡게 되었지요. 그 ‘전차’의 수레를 적진으로 모는 게 바로 ‘어’(御)의 기술이고, 그 ‘전차’의 수레를 타고서 달리며 적에게 활을 쏘는 게 바로 ‘사’(射)의 기술입니다.
어쨌든 이때부터 ‘구’ 어린이는 외할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손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배웠기 때문에, 외할아버지도 온 힘을 모두 쏟아서 가르침을 폈습니다. ‘구’ 어린이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남달리 좋아서 한 번 들으면 절대로 되묻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더미같이 쌓인 책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면서도 그 뜻을 정확하게 가슴에 새기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서 ‘구’(丘)의 나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린이’가 아니라, ‘소년’이라고 불러야 되겠습니다. 그해에 그만 어머니가 세상을 훌쩍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슬픔은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큰 걱정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모셔야 하는 법인데, 아버지의 무덤을 알 수 없으니 큰일이구나. 아버지의 무덤을 찾을 때까지 어머니 장례를 임시로 지내는 수밖에 없겠구나.”
‘구’는,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몇 번이나 어머니에게 아버지 무덤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머니는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없이, 그는 어머니의 시신을 ‘오보’(五父)라는 곳의 길가에다 임시로 모셨습니다.
그런 뒤에 ‘구’ 소년은, 전에 살던 곳인 ‘추읍’(陬邑)에서 장례를 맡아 보고 있는 ‘만보’(輓父)라는 사람의 모친을 찾아갔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제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주십시오.”
‘구’ 소년의 간곡한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인 만보의 모친은,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서 ‘방산’(防山)이라는 곳에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방산’의 아버지 무덤 곁으로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은 ‘구’ 소년은, 밤낮없이 오로지 배우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그는 그 동안에 배움이 부족했던 ‘사’(射)와 ‘어’(御)를 공부하는 데 더욱 정성을 기울였을 성싶습니다.
‘구’ 소년이 어른이 되어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었을 때, 한번은 ‘달’(達)이라는 거리에 사는 사람이 이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논어’(論語)의 ‘자한’(子罕) 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달항당인이 말하였다. “위대하다, 공자여. 학문은 넓되, 자신의 명성은 이룰 만한 게 없구나.” 공자가 그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뭘 잡을까? 말고삐를 잡을까? 활을 잡을까? 난 역시 말고삐를 잡고서 이름을 내야지.”(달항당인왈 대재공자 박학이무소성명. 자문지 위문제자왈 오아집 집어호 집사호 오집어의: 達巷黨人曰 大哉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子聞之 謂門弟子曰 吾何執 執御乎 執射乎 吾執御矣)【논어 9-2】
여기에서 ‘공자’(孔子)는, ‘구’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호칭입니다. 쉽게 말해서 ‘공 선생님’이라는 뜻이지요. 중국 발음으로는 ‘콩쯔’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제자들이 스승을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고, 다른 사람들은 보통 ‘공’(孔)이라는 성을 붙여서 ‘공구’(孔丘)라고 불렀습니다. 그건 아무렇든, 이 기록으로 미루어서 공자는 이미 ‘사’와 ‘어’에 익숙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의 문장을 보면, ‘박학이무소성명’(博學而無所成名)에서 ‘이’(而)를 앞뒤로 하여 ‘박학’(博學)은 공자가 추구한 문적(文的)인 세계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무적(武的)인 세계에서는 ‘무소성명’(無所成名)이지 않겠느냐는 비판의 빛깔이 나타나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해서 “너는 문(文) 쪽으로는 잘 알지만 무(武) 쪽으로는 아는 게 없겠지.”라는,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는 말이었지요. 그에 대해 공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뭘 잡을까?”라고, 여러 제자들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이로써 공자 자신도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싸우는 기술('사'와 '어')을 지녔음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잠깐, 활쏘기에 대한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활쏘기란 즐거움으로 한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쏘아야 하며 어떻게 들어야 하겠느냐? 몸을 바로 해서 과녁을 맞히는 자만을 어질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저 잘못 맞히는 자는 어떻게 술을 마실 수가 있겠느냐? ‘시’(詩)에 이르기를 ‘저 과녁에 맞히어서 너의 술잔을 빈다.’라고 하였으니, 이 ‘빈다’라는 말은 ‘구한다’라는 뜻이다. ‘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저 과녁을 잘 맞히어서 ‘술잔을 사양한다.’는 말이다. 이 술이란 늙은이를 기르고 또 병든 자도 기른다. 잘 맞히기를 구해서 ‘술잔을 사양한다는 것’은 그 ‘길러 주는 것’을 사양한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선비로서 활을 쏘다가 능히 맞히지 못하면 ‘병이 있다고 사양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현호‘(懸弧)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말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현호’는 ‘남자아이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활을 문 위에 걸어서 그 아이의 앞길을 축하한 관습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어머니마저 잃은 ‘구’ 소년은, ‘죽음’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삶의 쪽으로 벗어날 수 있느냐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가치를 어떻게 삶의 가치로 바꾸느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해답이 바로 ‘배움’(學)이었습니다. 그가 그 때에 생각한 ‘배움’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감’이었지요. 말년에 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여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 쪽으로 뜻을 두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구’ 소년은 너무나 열심히 공부에 열중하였으므로, 그 소문이 이웃에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게다가 그는 배운 일이라면 하나도 어김이 없이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그를 칭찬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지. 그 말과 행동이 어쩌면 그리도 올바르고 곱지.”
‘구’ 소년은 특히 몸가짐에 주의를 크게 기울였습니다. 쉽게 화를 내는 일도 없었거니와, 항상 입도 무겁게 지녔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 대하여 아니꼽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계씨’(季氏)라는 세도가의 아래에서 일하는, 벼슬아치 ‘양호’(陽虎)였습니다.
‘구’ 소년이 나이 17살의 젊은이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노나라에서 임금님보다 더 권세를 부리고 있는 ‘계씨’가,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젊은이 ‘구’도 어엿한 ‘선비’이었으므로, 그 자리에 나갔습니다. 그 당시에 그는 어머니의 ‘상’(喪)이 모두 끝나지 않았으므로 상복을 한 채로 찾아갔지요. 그런데 문 앞에서 ‘양호’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선비들을 위하여 베푸는 자리다. 너 같은 애송이는 올 곳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상복’은, 원문에서 ‘요질’(要絰)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고대 상복 중의 ‘마대’를 일컫습니다. ‘머리에 매는 것’은 ‘수질’(首絰)이라고 하였으며 ‘허리에 매는 것’을 ‘요질’(要絰)이라고 했지요. ‘요’(要)는 ‘요’(腰)와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말인가요? 보통사람 같으면 화가 나서 ‘양호’라는 놈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었을 터이지만, 젊은이 ‘구’는 아무런 말없이 발길을 돌려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에게 ‘배움’은, 대접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지요. 다만, 그는 ‘배움’에 목말라 애쓰고 있었습니다.
‘논어’의 첫머리에 ‘배워서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배워서 때에 맞추어 익히다’, 즉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지’(之)는 ‘막연한 조사’로 보고 ‘습’(習)은 ‘실천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며 ‘시’(時)는 ‘실천의 때’를 가리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습지’(時習之)는 ‘때에 맞추어’(timely)의 뜻이랍니다. 그리고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즉 ‘불역열호’(不亦說乎)라는 구문에서 ‘역’(亦)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남에게 전달하고 남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강조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상대적인 ‘역’(亦)이 아니라, 기쁨의 ‘절대적 경지’를 말하는 거랍니다. 또 ‘열’(說)은, 자신의 실존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말한답니다. 이에 반하여 ‘불역낙호’(不亦樂乎)란 말이 있습니다. 이 경우의 ‘낙’(樂)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또 하나, 배움에 대한 논어의 멋진 구절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열 집 정도밖에 살지 않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곧음’과 ‘믿음’을 지닌 사람은 있겠지.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십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논어 5-28】
앞의 글에서 ‘십실지읍’(十室之邑)은, 열 집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을 가리킵니다. 조그만 마을을 일컫지요. 이 문장에서 ‘필유’(必有)와 ‘불여’(不如)가 잘 어울립니다. ‘반드시 있을 것’이지만, ‘절대로 미칠 수 없을 것’을 멋지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충’(忠)과 ‘신’(信)에 있습니다. 이 ‘충’과 ‘신’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이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진정한 ‘호학’(好學)의 길로 들어서기 어렵다는 거지요. 그만큼 자신감 넘치는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여구자언’(如丘者焉)과 ‘불여구지’(不如丘之)에서 ‘구’는, 공자의 이름이 ‘구’(丘)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호학’이 좋다고 하여 무작정 배우기만 하면 모두 해결될까요? 이를 경계한 말도 ‘논어’에 실려 있습니다. 즉,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공자’의 말입니다.
여기에서 ‘학’(學)은 외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사’(思)는 내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에 따라서 ‘학’은 ‘남의 생각’이고 ‘사’는 ‘나의 생각’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그러므로 ‘학이불사’(學而不思)의 뜻은, ‘남의 생각만 받아들이고 자기의 생각은 보태지 않는다면’이라고 풀이되고, ‘사이불학’(思而不學)은, ‘자기의 생각만 내세우고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이라고 풀이됩니다.
그런데 위에서 ‘망’(罔)은 ‘멍해질 망’ 자이고 ‘태’(殆)는 ‘위태로울 태’ 자이지요. 그래서 나는 이 뜻을 ‘학이불사하면 멍해지고, 사이불학하면 위태로워진다.’라고 풀이해 보았습니다. 그럴 겁니다. 너무 배우기만 하면 혼란스러워서 멍해지겠지요. 그리고 자기 생각만을 고집 세우면 그 생각이 굳어져서 잘잘못을 가릴 수 없게 될 터이니 그보다 더 위태로운 일은 없겠지요. 그러하니 이는, 누구나 가슴에 꼭 새겨 두어야 할 아주 귀중한 말입니다.
‘배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 공자의 말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담겨 있습니다.
목표를 ‘도’에 두고서 ‘덕’(베풂)에 근거하며 ‘인’(어짊)에 의지하고 ‘예’와 ‘악’과 ‘사’와 ‘어’와 ‘서’와 ‘수’의 ‘육예’ 가운데에 노닐어야 한다.(지어도 거어덕 의어인 유어예: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논어 7-6】
이는, 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에 목표를 두고 이해득실보다는 의로움을 굳게 잡아서 지키며, 사람을 사랑함에 가까이 다가서서 떠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여유가 있으면 ‘육예’로써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는 뜻일 성싶습니다. 이 말 또한, ‘배움’에 대한 태도를 가리킨다고 여겨집니다. 그가 말하는 ‘배움’은, 단순히 앎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앎을 실제로 행함에 더욱 큰 뜻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이 배우고도 행함이 없으면, 그게 바로 ‘죽은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학문은 하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라. 그리고 미친 뒤에는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미친다.’라는 말은 ‘행함’을 나타내는 듯하고, ‘잃는다.’라는 말은 ‘그 행함이 계속되지 못함’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좋은 말을 가슴에 새기고, 또한 늘 좋은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합니다.
‘배움’에 있어서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한 순수한 마음을 바탕으로 그 안에 여러 지식들이 담겨져야만 그게 지혜로 나타나게 되겠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맑은 건
들꽃의 눈동자
이는, 천성으로 그렇다기보다도
태어나면서 맨 처음
새벽하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들꽃과 눈이 마주치면
어린 샘물의 옹알이가 들린다.
- 졸시 ‘맑은 눈동자’ 전문
시골의 들길을 거닐다 보면 들꽃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들꽃들의 눈동자는 참으로 맑고 맑습니다. 그렇기에 그 안에 그리 크나큰 지혜를 가득 담고 있겠지요. ‘자연의 순리’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연으로부터 많은 배움을 얻게 됩니다.
‘배움’은 ‘아는 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반드시 앎에 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들에 있는 풀들을 자세히 보십시오. 풀들은, 그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가슴에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몸으로 치열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그러니 어찌 풀을 가슴에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풀을 사랑합니다. 그 모습을 사랑하고 그 삶을 사랑합니다. 나는 꿈마다 들꽃의 그 ‘맑은 눈동자’와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빠져서 ‘어린 샘물의 옹알이’를 듣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구’ 어린이는 그 모습이 들꽃과 같습니다. ‘배움’에 목말라 애쓰는 그 마음이 ‘맑은 눈동자’를 지녔습니다. 그의 말이 나에게는 모두 ‘샘물의 옹알이’로 들립니다. 그러니 이제 나는, ‘풀을 품듯’ 그를 가슴에 안습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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