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4. 궁형을 당한 사내가 붓을 들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1. 18. 09:18

4
궁형을 당한 사내가 붓을 들다





 ‘논어’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제자들이 모여서 ‘공자에 관한 말들’을 묶은 문집입니다. 후한 때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져 있습니다. 

 공자가 그의 제자들과 당시의 여러 인사들 및 시인(時人)들에게 언행을 비롯하여 제자들이 서로 주고받은 말이나 공자에게서 들은 말들을 당시 제자들이 저마다 기록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문인들이 그것들을 추려 모아서 의논하여 편찬하였다. 따라서 ‘논어’라고 한다.【한서 ‘문예지(文藝誌)】

 ‘논어’는 원래 3종류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하나는, ‘노론’(魯論)이라는 ‘노나라의 논어’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제론’(齊論)이라는 ‘제나라의 논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론’(古論)이라는 ‘옛날의 논어’이지요. 이는, 한나라 말기에 공자의 옛집을 허물게 되었을 때에 그 벽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는데, 고문자로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고문자는 알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생겼다는 ‘과두문자’(科斗文字)입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피하려고 공자의 후손들이 집의 벽 가운데에 숨겨 두었던 책입니다. 그러나 앞의 세 원본들은 이미 전한 말기에 모두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한 말에 ‘장우’(張禹)라는 사람이 20편으로 ‘논어’를 다시 편찬하였답니다. 이 책을 지금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논어를 읽으면 재미가 있습니다. 또한,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좀더 넉넉한 삶을 걸어갈 수도 있지요. 문득, 이를 멋지게 대변한 ‘정자’(程子)의 말이 떠오릅니다. 

 논어를 읽을 때에 어떤 사람은 읽고 나서도 전혀 아무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은 읽고 나서 그 중의 한두 구절을 깨닫고 기뻐한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은 읽고 나서 참으로 알게 됨을 좋아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읽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젓고 발을 구르며 춤을 벌인다.(독논어 유돌료전연사자; 유독료후 기중득일양구희자; 유독료후 지호지자; 유독료후 직유부지수지무지족지도지자: 讀論語 有讀了全然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정자(程子)의 말】

 이처럼 ‘논어’는, 공자를 아는 데 아주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논어에 묘사된 공자는, 초인적인 성인도 아니며 단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보통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에는 진위가 의심스러운 구절들이 더러 들어 있음으로써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으로, 공자의 일생을 짚어 보려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가까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기’는 엮여진 지 2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이 책에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갈등과 방황’을 보았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 정신의 승리’를 느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권력의 무상함’을 맛보았습니다.
 ‘사기’는 기원전 91년경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본기(本紀)와 세가(世家)와 표(表)와 서(書)와 열전(列傳)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전체(紀傳體)입니다. 이는, ‘본기’와 ‘열전’을 대표적인 형식으로 간주하여 축약한 말입니다. 
 공자의 일생은 ‘사기’ 중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제후’(諸候)가 아닙니다. 제후는커녕 ‘대부’(大夫)의 지위에 오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마천’은 ‘공자’를 ‘제후’의 대열에 넣었습니다. 왜 이런 월권을 자행했을까요? 물론,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기’를 집필할 당시에 ‘사마천’은 ‘공자’를 지성(至聖)으로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남과 다른 ‘역사의식’이라고 말해도 될 성싶습니다.
 ‘사마천’은 공자의 전기를 쓰기에 앞서서 공자의 출생지인 ‘곡부’(曲阜)를 다녀왔습니다. 그 때의 일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노나라로 직접 가 보았다. 그래서 ‘중니’의 사당과 살던 집, 그리고 그가 탔던 수레와 입던 옷과 예에 사용되었던 그릇들을 모두 보았다. 또한, 아직도 많은 유생들이 그 집에 모여서 때에 맞추어 예를 배우고 있는 모습도 관람하였다. 나는 공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와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적노, 관중니묘당차복예기, 저생이시습예기가 여지형류불능거운: 適魯, 觀仲尼廟堂車服禮器, 諸生以時習禮其家, 余祇逈留之不能去云.)【태사공(太史公)의 말】  

 그러면 지금부터는 사마천의 일대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사람입니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고 진(秦)나라 시황(始皇)이 통일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이 죽자, 진나라는 차츰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기원전 206년, 패공(沛公)에 의해서 한나라가 건국되었지요. 한나라는 고조 이후의 무제에 이르는 60년 동안,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이렇듯 한나라가 자리를 잡아 가던 시기에 사마천은 태어났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기원전 135년에 태어났다고도 하며, 기원전 145년에 출생하였다고도 합니다.
 사마씨의 가문은 기원전 약 9세기경부터 주(周)나라 왕실의 사관(史官)을 맡아 왔답니다.
 사마천은 용문(龍門)에서 출생하였다는데, ‘용문’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서현’이랍니다. 증조부인 ‘사마무택’이 한나라에서 벼슬길에 오른 이후, 그의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은 태사령(太史令)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기원전 140년경이라고 합니다. ‘태사령’은 ‘사관’의 일종으로,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사마천’이 6세 되던 해라니까, 그렇다면 사마천은 기원전 135년에 태어났다는 게 맞겠네요.
 사마천이 20세가 되던 기원전 126년, 그는 양자강 남북에 걸친 여행의 길을 떠났지요. 터벅터벅 걸어서 가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옛 성인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들의 뜻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또, 이곳저곳의 풍물을 익히고 각 지방의 특산물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이 많은 학자나 일반 백성들을 두루 만나서 그 지방의 전설과 역사를 듣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을 돌아다니며 안목을 넓혔습니다.
 여행을 마친 후, 사마천은 ‘낭중’(郎中)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23세가 되었을 때였지요. 이는 말단 사관의 벼슬입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후, 사마천은 다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중국의 남쪽과 서쪽 지방을 집중적으로 다녔습니다. 그 지역에는 이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지요. 역시 이번 여행에서도 사마천은 많은 견문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이 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기원전 110년), 그는 아버지를 잃는 불행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마담’의 죽음은 심상치 않았지요. 사마담은 태사령의 직책과 겸임하여 한나라의 제사나 천문 및 달력 제작 등을 맡고 있었답니다.
 한나라의 기틀이 잡혀 가자, 무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태산’(泰山)에서 봉선제(封禪祭)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제사를 지낼 때에 한나라 무제는 사마담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답니다. 이는, 사마담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지요. 이에 사마담은 커다란 슬픔과 분노를 느낀 나머지 덜컥 중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이 쓰지 못한 ‘사기’를 완성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마담은 아들 ‘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의 선조는 주(周) 왕실의 태사(太史)로서 아주 먼 옛날 순(舜)의 시대와 하대(夏代)부터 천문을 관장하여 공명이 빛났다. 그 후, 우리 집안이 기울었는데, 그 전통이 나에게서 끝날 것인가? 너는 다시 태사가 되어서 우리 조상의 직분을 계승하여라. --- 이제 한(漢)이 흥기하여 천하가 통일되었으나 나는 태사로서 현명한 군주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천하의 역사기록이 폐기될 것 같아서 심히 두렵다. 너는 이를 명심하여라.” 
 사마천은 머리를 숙이고 울며 대답하였다.
“소자가 영리하지 못하나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옛 기록을 빠짐없이 정리하겠습니다. 어찌 방심하겠습니까?”【 ‘사기’ 중 ‘태사공 자서’】

 사마담이 죽은 지 3년 후인 기원전 108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이 되었지요. 그는 날마다 새로운 자료를 찾아서 정리하고 내용이 다른 자료는 대조하여 가며 추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가 태사령이 된 지 4년 후인 기원전 104년부터 그는 ‘사기’의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또 어찌된 일이란 말입니까? 그에게 또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사마천의 동문 중에 ‘이릉’(李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릉’은 천자의 명을 받고 북쪽 흉노족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에 승리하였지요. 그러나 다른 한 전투에서 불리한 병력으로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흉노족에게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은 ‘이릉’을 비난하면서 처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마천만은 그를 위해서 변호했습니다. 그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의 변론은 오히려 천자를 격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로 하여, 그는 결국에 ‘궁형’(宮刑)을 받게 됩니다. ‘궁형’이란,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남자의 성기를 잘라 내는 형벌’입니다. 참으로 남자로서는 가장 치욕스런 형벌이지요. 이 때, 사마천의 나이는 48세였습니다. 보통 관리들은, 궁형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체벌을 받고 치욕스럽게 살아가겠다는 게 나의 본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목숨을 쉽게 버리지 못한 이유는 내가 하고자 하던 일을 하지 못한 데 대한 한(恨)을 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대로 묻혀 버린다면 나의 글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이 저술을 완성시키기 전에 ‘이릉의 화’를 당했습니다. 이대로 완성시키지 못한 채, 중도에서 이 일이 끝난다는 게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극형을 당하면서까지 분노의 기색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한서 ‘사마열전’(司馬列傳)】

 그리고 2년이 지났을 때, 사마천은 사면되어서 다시 벼슬길에 나갔습니다. 그렇기에 오직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뒤로 하고, 드디어 ‘사기’를 완성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기원전 91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사마천은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이 세상을 훌쩍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그가 죽은 시기에 대해서도 정설이 없습니다. 기원전 86년이라고도 하고, 기원전 87년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느 기록에는, ‘그가 자신의 딸을 출가시킨 후에 곧바로 자살했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기’는 아버지 ‘사마담’과 아들 ‘사마천’의 부자가 썼다고 해야 옳을 듯합니다. ‘사기’는 처음에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리었습니다. ‘태사공’이란, ‘태사령’의 직책을 맡고 있는 역사관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사마담과 사마천이 모두 태사령이었지요. 그래서 스스로를 ‘태사공’이라고 불렀답니다. 그 후, 위(魏)나라 시대에 와서야 ‘사기’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기’는 모두 합해서 총 13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이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은 70권으로 이루어진  ‘열전’이고, 그 다음은 30권으로 이루어진 ‘세가’이며, 그리고 본기는 10권의 분량입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공자의 일생을 더듬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자료입니다. 그렇다면 ‘공자세가’ 이전에는 공자에 대한 기술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거의 모든 문헌에서 공자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 또 하나의 ‘공자가어’(孔子家語)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공자가어’는, 공자가 당시의 공경사대부(公卿士大夫) 및 제자들과 서로 문답한 내용을 여러 제자들이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글이지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진시황이 모든 시서(詩書)를 불살라 버릴 때에 이 책들 중에서 한 질은 공자의 옛집에 숨겨 둠으로써 화액을 면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사람들 중에 고체로 된 이 글을 알아보는 이가 오직 ‘공안국’(孔安國)이라는 사람뿐이어서 이 ‘공자가어’는 그가 처음으로 다시 편찬해 냈고, 그 뒤에 ‘유향’(劉向)이 이를 교정했으며, 그 다음에는 ‘왕숙’(王肅)에 이르러서 주석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공자가어’는 ‘공안국’이 편찬한 원본 그대로가 아니고 많은 부분이 첨가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4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공자가어’는, 공자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그 이유는, ‘논어’와 ‘예기’의 미흡하고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공자가어’를 모두 읽은 후에 취사선택하여 옳은 점만을 취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이 ‘공자가어’는 내용이 박잡하다는 이유로 널리 읽히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 동안에는 ‘사서’(四書)니 ‘육경’(六經)이니 ‘삼십경’(三十經)이니 하는 것들이 우리 눈길을 끌어 왔습니다. 그러니 특히 유학자들은 아주 근시안적이고 소극적인 안목으로 이 책을 멀리했지요. 
 앞에서 짚어 보았듯이, ‘논어’와 ‘사기’는 물론이거니와, 그 밖의 문헌들 모두가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책에서든지 잘못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천여 년을 지내 오는 동안에 어찌 첨삭이 없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공자가어’에 대하여 ‘풍부한 상상력의 성과를 모아 놓은 책’이라는 둥, ‘기원전 3세기에 발전한 공자의 설화를 반영한 책’이라는 둥, 갖가지 혹심한 비판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본 ‘공자가어’가 그 초본에 약간의 개변과 첨가를 가한 정도에 불과하다는 설도 나돌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공자가어’에서 공자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얻기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단언하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공자가어’의 허위성이 어느 정도로 악의의 소산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책이 ‘도가의 강한 영향 아래 저술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기는 그런 면이 어쩌다가 눈에 보이기는 합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공자가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여겨집니다.
 사마천의 ‘사기’ 이전의 문헌으로, 공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면 ‘묵자’와 ‘맹자’와 ‘장자’와 ‘예기’와 ‘좌전’ 등을 생각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다섯 개의 기록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공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들도 문제를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묵자’(墨子)라는 문헌은, 공자의 핵심 사상을 계승하였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독자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공자를 가차 없이 비판한다고 합니다. ‘묵자’, 즉 ‘묵 선생님’의 이름은 ‘묵적(墨翟)입니다. 
 그런가 하면, ‘맹자’(孟子)라는 문헌 속에서는 살아 있는 공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맹자’라는 사람 자체가, 공자의 제자라고는 하나, 공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지요. ‘맹자’의 이름은 ‘맹가’(孟軻)이고 자는 ‘자여’(子與) 또는 ‘자거’(子車, 子居)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자’(莊子)라는 문헌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마구 익살스럽게 그려 내고 있습니다. 때로는 도둑놈으로, 때로는 타락한 사람으로, 때로는 겁쟁이로, 때로는 달변의 유세객으로, 때로는 진지한 구도인 등으로 그려 내고 있지요. ‘장자’, 즉 ‘장 선생님’의 이름은 ‘장주’(莊周)입니다. 
 또, 예기(禮記)는, ‘대성’(戴聖)이라는 학자가 ‘곡예’(曲禮)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하여 ‘공자가어’와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모든 기록 가운데에서 ‘고례’(古禮)에 관한 사항을 모은 문집이지요. 그런데 ‘예기’ 중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공구(孔丘)는 ‘리’(鯉), 즉 ‘백어’(伯魚)를 낳은 부인과 이혼했다. 그 이혼한 부인이 죽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1년이 지나도록 ‘리’가 너무도 슬피 울었다. ‘리’가 슬피 운다는 말을 듣고, ‘공구’는 화를 내며 너무 심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리’는 울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리’도 그의 부인과 이혼했다. 이혼한 부인은 위(衛)나라로 가서 서씨(庶氏)와 다시 결혼했다. 그 후, 그 여인이 죽었다. 그러자 ‘리’의 아들인 ‘자사’(子思)가 어머니의 슬픈 소식을 듣고 곡부(曲阜)에 있는 공씨(孔氏)의 사당에서 슬피 울었다. 그러자 ‘자사’의 문인들이 ‘자사’에게 와서 물었다. 
 “어찌 ‘서씨’의 엄마가 죽었는데 ‘공씨’의 사당에서 곡을 하십니까?” 
 그 말을 듣고 ‘자사’는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며 다른 곳으로 가서 몰래 울었다.
그런데 또 ‘자사’도 이혼했다. 그 ‘자사’의 이혼당한 부인이 죽었을 때, ‘자사’의 아들인 ‘자상’(子上)이 복상하지 않았다. 그러자 ‘자사’의 문인들이 와서 선대(先代)에는 출모(出母)라도 상을 입었는데 왜 선생의 아들인 ‘자상’으로 하여금 상을 못 입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자사’가 골이 나서 잘라 말했다.
 “그 여자는 내 마누라가 아니다. 그러니까 ‘자상’의 어머니도 아니다. 복상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공씨 가문에서 출모에게는 상을 입지 않는 전통이 ‘자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예기 중 ‘단궁’】

 공자를 위대한 ‘예’(禮)와 ‘악’(樂)의 완성자로 기리고자 하는, ‘예기’에 왜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을까요?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좌전’(左傳)은 공자의 ‘춘추’(春秋)를 노나라 좌구명(左丘明)이 해석한 책입니다. 그 원본은 전국시대에 작성되었으나, 지금 전하는 책은 전한(前漢) 말기에 유흠(劉歆) 일파가 편찬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내용 또한 믿지 못할 부분이 있으므로 아주 신중하게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기억이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지요. 거기다가 의도적인 첨삭도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하니, 그저 옛날에 살았던 한 성인(聖人)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는 데 의미가 있겠지요. 설사,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보태어져서 다른 사람을 그리게 된다고 하여도, 이 일이 헛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더듬던 손가락 끝
가장 가려운 살점 베어낸 자리에서
전신의 아픔보다 더한 꽃이 핀다.
그늘진 쪽에 서서
몇 줌 스며든 햇빛에 눈멀지 않고
오직 순수하게 펼친 무명 위에
뜨거운 마음을 적는 
아, 속으로 불붙는 나무의 모습
찬바람에 붉은 꽃이 진다.
빛나던 잎에 하나 둘 피가 맺히고
결국은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의식으로 
분명한 외침이 살아난다.
- 졸시 ‘혈서’ 전문


 나무가 ‘혈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나무의 꽃은 그 하나하나가 바로 ‘혈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절한 아픔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마천’의 삶도 참으로 아픔이 많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삶이 ‘혈서’를 쓰는 것과 같이 처절하였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는 ‘궁형’의 치욕스러운 불행을 맞게 되었으나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내 목숨을 쉽게 버리지 못한 이유는 내가 하고자 하던 일을 하지 못한 데 대한 한을 풀기 위함이었다.’
 그는 끝내 참고 견디었으며, 2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기’ 저술을 완성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붓도 없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어코 ‘사기’를 완성하고야 말았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글씨를 썼느냐가 궁금한가요? 그야, ‘혈서’라도 썼을 게 분명합니다. 그는 오직 ‘사기’를 쓰기 위해 죽음도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래서 ‘사기’의 집필을 끝내고 딸을 출가시킨 후, 그가 곧바로 자살했다는 이야기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