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9. 즐거움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1. 22. 10:29

9
즐거움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공자의 제자 중에 으뜸으로 치는 사람은 아무래도 ‘안연’(顔淵)일 듯합니다. 여러분은 공자의 어머니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안징재’(顔徵在)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안연’이 공자의 외갓집 친척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공자는 ‘안연’을 언제나 다정하게 ‘회’라고 불렀습니다. 이름이 ‘회’(回)입니다. 그래서 ‘안회’(顔回)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자’(字)는 ‘자연’(子淵)입니다.
 ‘안연’은 공자보다 나이가 30살이나 아래였고, 29세 때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었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로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훌쩍 떠나고 말았답니다.
 그 후, 사람들은 그를 존칭해서 ‘안자’(顔子)라고도 했지요. 이는, 다름 아닌 ‘안 선생님’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그는 당나라(628년) 때 ‘선사’(先師)로 추존된 이후, 739년에 ‘연공’(兗公)이라고 불렀으며, 송나라(1009년) 때에 ‘연국공’(兗國公)이 되었고, 원나라(1330년) 때는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이 되었다가 명나라(1530년) 때에는 ‘복성’(復聖)이라고 추봉되었습니다. 대단합니다. 이렇듯 시호를 통해서도 공자의 수제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연’은 머리가 명석했고 뜨거운 노력의 실천가였으며, 게다가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안연’을 칭찬하여 ‘나도 그 사람의 머리가 좋은 데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안연’은 지독한 향학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학문에 열중하였습니다. 그가 그렇듯 자신의 수양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여러 제자보다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공자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할까요?

 공자가 말했다. “어질다 ‘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거처하며 살고 보면 남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 터이다. 그런데 ‘회’야말로 그 즐거움을 바꾸려고 하지 아니하니, 어질다 ‘회’여!”(현재 회야! 일단사 일표음 재루항 인불감기우, 회야 불개기락, 현재 회야!: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논어 6-9】

 위의 말에서 ‘일단사’(一簞食)라는 말은 ‘한 주발의 밥’을 일컫습니다.  ‘단’(簞)은, ‘대나무로 엮은, 밥을 담는 그릇’을 나타냅니다. 또, ‘일표음’(一瓢飮)은 ‘한 바가지의 물’이고 ‘누항’(陋巷)은 ‘누추한 골목길’을 뜻하지요. ‘항’(巷)은 ‘곧고 넓은 길이 아니라, 좁고 구부러진 길’을 말합니다. 아, ‘곧고 넓은 길’은 ‘가’(街)라고 하였답니다. ‘기락’(其樂)은 ‘도를 배우는 즐거움’을 뜻한답니다. 
 이로써 ‘안연’의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집은 말할 수 없이 가난했다고 하며, 그런데도 그는 가난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군자의 길을 걷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공자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앞의 말 중에 ‘즐거움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공자는 말했지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만 못하다.’라고요.
 이는, 무엇이든지 ‘낙’(樂)의 단계에 도달함으로써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고 비로소 한 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랍니다.  그러니 ‘안연’은 그 경지에 이미 다다랐다고 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즐거움을 느끼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즐기는 바에 따라 이상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라는 의미이지요. 그러고 보니, 공자의 또 한마디 말이 생각나는군요.
 공자는, ‘부유함을 만일 구할 수 있다면 비록 마부 노릇이라도 내가 하려니와, 만일 재물을 구할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한 것에 따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도 공감합니다.
 ‘돈’이라는 것도 아무나 많이 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나쁜 짓을 하지 않고 ‘깨끗하게’ 많은 ‘돈’을 번다는 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공자는 정직하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한다면 ‘말의 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감수하겠다고 말하였지요. 그러나 그런 일을 해서 큰 ‘돈’을 벌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공자는, ‘즐기는 바에 따라 살겠다.’라고 말한 겁니다.
 ‘논어’의 ‘현문편’에서 공자는 말하기를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난처럼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며칠을 굶어 보면 온 세상이 ‘밥’으로 보입니다. 6.25 전쟁 당시에 굶었던 적이 많았지요. 그래서 그 어려움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처럼 배고픔이 따를 때 덕을 지닌 사람만이 원망하는 마음을 누를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지닌 사람이 검소하게 살기는, 그에 비하면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그러니 ‘안연’이야말로 ‘덕’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여러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안연’을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안연’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그는 그나마 거친 식사라도 할 수 있었던 날보다는 굶는 날이 더욱 많았다고 전합니다. 아무리 스승의 가르침이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도덕적인 것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먹을까?’ 하는 문제가 더욱 시급하게 다가왔을 성싶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진리 탐구’에 몰두했던 제자 ‘안연’의 모습이, 공자의 눈에 대견하게 보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러면, 장자의 ‘대종사’ 편에 기록된, ‘안연’과 공자의 대화를 엿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날, ‘안연’과 공자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전보다 나아진 게 있습니다.”
 “회야, 무엇을 말하느냐?”
 “인의(仁義)를 잊게 되었습니다.”
 “그러냐. 그러나 아직 부족한 게 있다.”
 다음 날, 다시 만나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 전보다 나아진 게 있습니다.”
 “회야, 무엇을 말하느냐?”
 “예악(禮樂)을 잊게 되었습니다.”
 “그러냐.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있다.”
 또, 며칠 뒤에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전보다 나아진 게 있습니다.”
 “회야, 무엇을 말하느냐?”
 “좌망(坐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놀라며 다시 물었습니다.
 “좌망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안연’이 대답했습니다.
 “자기의 몸이 손과 발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눈이나 귀의 움직임을 멈춘 후에 형체가 있는 몸을 떠나서 마음의 지각을 버리고 차별을 넘어서 저 위대한 도에 동화되는 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습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좋고 싫은 마음이 없어지며, 만물의 변화에 참여하면 집착하지 않게 된다. 너는 정말 훌륭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라야 하겠다.”
 공자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긴 여운을 끌며 가슴을 파고듭니다. 이왕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장자 ‘달생’ 편에 들어 있는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어느 날, ‘안연’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일찍이 ‘상심’(觴深)이라는 이름의 개울을 건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보니, 배를 다루는 사공의 솜씨가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노 젓는 기술을 배울 수 있습니까?’라고요. 그는, ‘물론 할 수 있습니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몇 번 만에 배울 수 있고, 무자맥질을 잘하는 사람은 배를 본 적이 없어도 곧 배울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 까닭을 물었지만, 사공은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몇 번 만에 배울 수 있다는 말은, 그가 물에 익숙하여 물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자맥질을 잘하는 사람이 배를 본 적이 없어도 노를 저을 수 있다는 말은, 그가 깊은 물을 언덕과 같이 여겨서 만일에 배가 뒤집혀도 수레가 뒤로 물러가는 것같이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뒤집히거나 물러나는 일 등의 온갖 사태가 눈앞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들이 그의 마음을 출렁거리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고 보면 어디 간들 여유가 없겠느냐? 예컨대 하찮은 질그릇을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잘 쏠 수 있지만, 좋은 ‘허리띠 은고리’를 내기로 걸고 활을 쏠 때는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니 값비싼 황금을 걸고 활을 쏠 때는, 그야말로 눈앞이 가물가물해지지 않겠느냐? 그 재주는 마찬가지인데 마음을 쓰는 바가 크게 생기게 되면 외물을 중하게 여기게 되니, 외물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의 속마음이 졸렬해지게 된다.”
 공자의 ‘활쏘기’에 대한 이야기는 ‘논어’ 중에도 나옵니다. 그 당시 ‘활쏘기’는 선비의 덕목 중에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다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수행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활쏘기’라고 했지요.
 ‘안연’은 항상 예의 바르고 조용히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모양이 참으로 바르고 진지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안연’은 ‘공자의 그림자’라고 하는 게 알맞겠군요. 이를 ‘장자’라는 문헌(田子方)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연’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걸으시면 저도 걸어가고, 선생님께서 빨리 걸으시면 저도 빨리 걸으며, 선생님께서 뛰시면 저도 뛰어갑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티끌 하나 일으키지 않으시고 달리시면, 저는 뒤에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바라볼 뿐입니다.”
 공자가 ‘안연’에게 말했습니다.
 “회야, 그게 무슨 말이냐?”
 ‘안연’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걸으시면 저도 걷는다는 말’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면 저도 말한다는 뜻입니다. 또, ‘선생님이 빨리 걸으시면 저도 빨리 걷는다는 말’은, 선생님께서 변론하시면 저도 변론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뛰시면 저도 뛴다는 말’은, 선생님께서 도를 말씀하시면 저도 도를 말한다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티끌 하나 일으키지 않으시고 달리시면 저는 뒤에서 눈만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라는 말’은,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셔도 남에게 신임받고 남들과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남들이 친하게 따르며 벼슬이나 권력이 없어도 사람들이 앞에 모여드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안연’은 공자의 충직한 제자였습니다. 공자 또한 ‘안연’을 진실한 제자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안연’에게 공자는 너무나 큰 산이었습니다. 그 안타까움을 나타낸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연’이 탄식하여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게 보이고 뚫고 들어갈수록 굳으며 앞에 있는 것같이 보이다가도 어느새 뒤에 와 있는 듯이 보인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달래면서 이끌어 나가시는데, 글로써 나의 지혜를 넓혀 주시고 예절로써 나의 행위를 단속하신다. 학문을 그만두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나의 재주가 다하여 앞에 멈추어 있는 바가 마치 우뚝 서 있는 모양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따라가려고 하여도 따라갈 수가 없다.”(안연 위연탄왈 앙지미고 찬지미견 첨지재전 홀언재후. 부자 순순연선유인 박아이문 약아이례. 욕파불능 기갈오재 여유소립탁이. 수욕종지 말유야이.: 顔淵 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 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논어 9-10】

 앞에 소개한 말에서 ‘위연’(喟然)은 ‘탄식하는 모양’을 이릅니다. 그리고 ‘미고’(彌高)는 ‘더욱 높음’을 이르지요. 또, ‘찬’(鑽)은 ‘끌로 구멍을 파는 것’을 말하고, ‘유’(誘)는 ‘유도하여 개발함’을 뜻하며, ‘홀언’(忽焉)은 ‘홀연히’ 또는 ‘갑자기’ 등을 나타냅니다. 또한, ‘순순연’(循循然)은 ‘순서를 따라 하는 모양’이고, ‘박아이문’(博我以文)은 ‘학문이나 문화로써 나를 열어 넓힘’이며, ‘약아이례’(約我以禮)는 ‘예절로 나를 붙잡아서 규모 있게 단속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갈’(竭)은 ‘다함’을 말하고 ‘여유소립탁이’(如有所立卓爾)에서 ‘탁이’는 ‘높이 솟은 모양’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여유소립탁이’는 ‘새로운 그 무엇을 앞에 우뚝 세워 놓고 배우고 따르라고 하는 듯하다.’라는 말입니다. 또, ‘말유야이’(末由也已)에서 ‘유’는 ‘쫓음’을 이릅니다. 그래서 ‘말유야이’는 ‘따를 도리가 없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안연’이 공자의 높은 덕에 크게 감탄한 내용입니다. 그 깊고 큰 덕을 보고 그 진가를 안다는 말은, 그만큼 아는 힘이 있어야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지혜로운 사람만이 지혜로운 사람을 알아본다는 의미일 성싶습니다.
 ‘안연’이 공자 앞에서 묵묵히 그저 듣기만 하는 모습이, 어쩌면 공자의 눈에 ‘바보가 아닌가?’하는 부정의 모습으로 비추어졌을지도 모르지요. 그런 의미가 담긴 내용이 ‘논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설명하여, ‘위정’ 편에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이 나옵니다. 
 “내가 ‘회’와 더불어서 종일토록 이야기하였어도, 한 마디 어긋남이 없어서 (그가) 마치 멍청이 같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가 물러나서 홀로 거동하는 모양을 살펴보니 (그가) 확실히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회’는 어리석지 않다.”
 여기에서 ‘회’(回)는 ‘안연’을 가리킨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요? ‘한 마디 어긋남이 없어서 멍청이 같았다.’라는 말을, ‘불위여우’(不違如愚)라고 합니다. ‘안연’이 공자의 말에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듣고만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공자의 말을 듣기만 하여도 그 뜻을 모두 환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로써 모든 의심은 풀렸습니다. 
 제자들을 모두 사랑하는 공자였습니다. 특히 ‘안연’에 대한 사랑은 끔찍했습니다. 게다가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안쓰러움에 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그래서 공자는 그에게 왜 벼슬을 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 내용이 장자 ‘양왕’ 편(讓王篇)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공자가 ‘안연’에게 말했습니다.
 “회야, 집안이 가난하고 신분도 미천한데 어째서 벼슬을 하지 않느냐?”
 ‘안연’이 대답했습니다.
 “벼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성 밖에 50무(畝)의 밭이 있으니 그것으로도 죽을 쑤어 먹을 만합니다. 성의 안에는 10무의 밭이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삼으로 베옷을 지어 입을 만합니다. 또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만족하다고 여길 수 있으며, 선생님에게 배우는 도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저는 벼슬살이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무’(畝)는 ‘밭이랑’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성 밖에는 50 이랑쯤 되는 밭이 있었고, 성의 안에는 10 이랑쯤 되는 밭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측정 단위가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답니다. 즉, 1무(畝)는 333.3㎡에서 1250㎡까지 다양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1무가 약 20평 정도의 넓이입니다.
 ‘안연’의 말을 듣고, 공자는 놀란 얼굴로 말했습니다.
 “네 생각이 매우 훌륭하구나! 내가 들으니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이욕(利慾) 때문에 자신을 해치지 않고, 자득(自得)할 줄 아는 사람은 이득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신 수양을 쌓은 사람은 지위가 없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 지가 오래되었는데, 네 말을 듣고서야 깨닫게 되었구나.”     
 ‘안연’의 소극적 성격과 모든 일에 철저하여지고자 했던 결벽증 같은 성격은 출세와는 거리가 멀게 만들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은 때 묻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우글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안연’은 벼슬에 몹시 부정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은 ‘안연’과 노나라 대부인 ‘숙손무숙’(叔孫武叔)의 대화입니다.

 ‘숙손무숙’이 말했습니다.
 “나는 벼슬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안연’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임금에게 손님 대우만 받겠다는 말입니까?”
 이에 ‘무숙’은 그 말을 대답하는데, 남의 허물만 두고 이러쿵저러쿵 헐뜯었습니다. 그러자, ‘안연’은 다시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찾아올 적에 무슨 유익한 말이라도 들으려고 왔다면 내가 이야기해 드리리다. 선생님께 들으니, 남의 악한 점을 말하는 것도 자기 몸을 아름답게 만들지 못하며, 남의 그른 점을 말하는 것도 자기 몸을 바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자기 몸의 잘못만 다스릴 뿐이며 남의 잘못은 다스리지 않습니다.”
 정신이 번쩍 드는군요. 이 말은 가슴에 꼭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안연’도 사람이었습니다. 공자의 말처럼, 그는 진리를 깨우치는 데는 가까이 갔지만 너무 자주 끼니를 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땐가는 정치를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지, 그는 공자에게 정치에 대한 일을 물었습니다. 그 기록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안연’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하(夏)나라의 역법을 행하고 은(殷)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周)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순(舜)임금의 소무(韶舞) 음악을 해야 한다. 또, 정(鄭)나라의 음악을 버려야 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해야 한다. 정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아첨하는 자는 위태롭다.”(안연 문위방 자왈 행하지시 승은지로 복주지면 악즉소무. 방정성 원녕인. 정성 음 녕인 태.:顔淵 問爲邦 子曰 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 淫 佞人 殆.)【논어 15-10】

 앞에서 ‘위방’(爲邦)은 ‘천하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말하고, ‘하지시’(夏之時)는 ‘하(夏)나라의 역법에서 봄을 세초(歲初)로 삼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농업에 편리하지요. 하나라의 역법은 지금의 음력입니다.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마다 윤달을 두었습니다. 또, ‘은지로’(殷之輅)는 ‘은(殷)나라 때에 천자가 타던 수레’를 가리킵니다. 나무로 만들었다는데, 질박하지만 아주 튼튼했답니다. 그런가 하면, ‘주지면’(周之冕)에서 ‘면’은 ‘제례에 쓰는 관’을 이릅니다. 주대에는 예제(禮制)가 아주 발달하였답니다. 그리고 ‘소무’(韶舞)는 ‘순(舜)임금의 음악’을 말합니다. 중국 고대에서는 음악에 반드시 춤이 따랐다고 합니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바가 있습니다. 공자가 무척이나 좋아해서 고기 맛을 잊어버렸다고 했지요. 공자가 ‘안연’에게 한 말은, 공자가 선왕의 예를 짐작하여 오래도록 행해질 큰 법을 세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안연’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한 번은 노나라 군주인 ‘정공’(定公)이 ‘안연’을 청하여 물었습니다. 
 “그대도 또한 ‘동야필’(東野畢)이 말을 잘 몬다는 말을 들었는가?”
 ‘동야필’은 그 당시에 말을 잘 몰기로 유명했던 사람의 이름입니다. ‘안연’이 대답했습니다.
 “잘 몰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말을 몰아서는 말이 내쳐 달아나 버리고 말게 되겠지요.”
 정공은 ‘안연’의 말을 듣고는 아주 불쾌한 얼굴로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군자도 사람을 속이는군!”
 ‘안연’이 물러간 지 사흘이 지난 때였습니다. 말을 먹이는 사람이 정공에게로 와서 아뢰었습니다.
 “동야필의 말이 과연 내쳐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두 필의 말이 두 채의 수레를 끌고 마구간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정공은 그 말을 듣고 급히 수레를 보내어서 ‘안연’을 청해 오라고 하였습니다. ‘안연’이 다다르자, 정공은 성급히 물었습니다. 이때는 정공의 말씨가 아주 공손해졌습니다.
 “저번에 내가 ‘동야필’의 말 모는 것을 물었을 때, 대답하기를 ‘몰기는 잘 몰지만 그렇게 몰았다가는 말이 내쳐 달아나 버릴 것’이라고 했으니 무엇으로 그 사실을 미리 알았습니까?”
 정공의 물음에 ‘안연’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정치에 비추어 보아서 그럴 것을 알았습니다. 옛날에 순(舜)임금은 백성 부리기를 잘하고, ‘조보’(造父)는 말 부리기를 잘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임금은 백성을 부리되, 그 백성들의 힘을 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보’는 말을 부리되, 그 말의 힘을 궁하게 하지 않았지요. 그런 까닭에 순 임금의 백성은 길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조보’의 말도 길들지 않은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야필’의 말 모는 법을 보니, 말 위에 앉아서 고삐를 잡고 빨리 달리는데도 오히려 채찍질하여 더욱 달리게 할 뿐만 아니라, 험한 곳을 지나고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리게 합니다. 그러니 얼마 못 가서 말의 힘이 다할 게 불을 보듯 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될 것을 알았습니다.”
 정공이 다시 물었습니다.
 “참으로 그 말과 같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어 보니 과연 그 뜻이 큽니다. 조금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없습니까?”
 ‘안연’이 말했습니다.
 “새는 궁하면 아무것이나 쪼아먹게 되고, 짐승이 궁하면 사람을 해치게 되며, 사람이 궁하면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馬)이 궁하면 내쳐 달아나 버린다고 했지요.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아랫자리에 처해 있으면서 능히 위태롭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정공은 ‘안연’의 말을 듣고, 공자에게 그대로 말했습니다. 공자는 환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안회가 이름이 나게 된 까닭은 대개 이런 종류의 일입니다. 이쯤을 가지고 놀랄 일이 결코 아닙니다.”
 공자는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흐뭇하였을 터입니다. 남에게서 제자의 칭찬을 듣는 기쁨보다 더 큰 게 없겠지요. 앞에서도 말한 바가 있지만, 공자는 그 많은 제자를 평하면서 결코 ‘인’(仁)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지요? 
 “그가 인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게 공자의 말이었지요. 그런데 단 한 사람, ‘안연’만은 예외였습니다. ‘논어’의 ‘옹야’ 편에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지나도 인에 어긋나지 않았는데, 그 나머지는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이르고 말더라.”
 이는, ‘안연’이 몇 달을 두고도 그 마음에 인을 어기는 일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기껏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 정도를 어쩌다가 인에 다다랐는가 하면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이보다 큰 칭찬은 없습니다. 공자의 가장 큰 칭찬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한 제자가 때로는 불만일 때도 있었던 듯합니다. 이야말로 ‘즐거운 비명’이기도 했겠지만, 공자는 자신의 수기(修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했답니다. ‘수기’는 ‘자기의 몸을 닦음’을 이릅니다. 즉, ‘논어’의 ‘선진’ 편에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이 똑똑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안회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 말에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구나.”
 ‘공자가 하는 말마다 깨달아서 기뻐함’을 ‘무소불열’(無所不說)이라고 하지요. 이는, 다른 제자들은 ‘공자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질문하여 공자의 지혜를 높여 주기도 하는데, ‘안연’은 공자의 말을 잠자코 들어서 깨우칠 뿐이고 지혜를 더해 줌이 없다는 투정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미 넘치는 공자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연’은 그저 공자의 가르침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서 기뻐하고 있으니, ‘그가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여 공자에게 새로운 지혜를 얻게 하지 못한다.’라는 불평입니다.
 아마도 ‘안연’처럼 몸가짐에 대하여 마음을 쓴 사람도 드물 성싶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공자에게 묻곤 했지요.
 어느 때, ‘안연’은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미 성인(成人)이 된 사람의 행동은 어떠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인정과 성품의 이치도 통달해야 하고 물체의 변화도 알아야 하며, 유명(幽明)의 연고도 알아야 하고 유기(遊氣)의 근원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만 되면 이미 성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 그 위에 또 인의와 예악을 알고 행해야만 성인으로서의 행실이 갖춰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명’은 ‘어둠과 밝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유기’는 ‘떠다니는 기운’을 가리키지요. ‘안연’은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 때문에 친구가 적었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답니다. 이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있습니다.
 ‘안연’이 물었습니다.
 “친구 간의 교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군자는 친구를 사귈 적에 자기 마음속으로 그른 일이 없으며 이를 몰랐다고 하지 않으며, 어진 사람에게는 아무리 오래되어도 득이 되는 일이 있었으면 이를 잊어버리지 않으며, 아무리 오래되어도 원망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질다고 말하는 거다.”
 이 말은 한마디로, 친구와의 교제는 ‘어진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른 일이라든가 몰랐다는 말은, 친구의 사귐에 방해가 됩니다. 친구의 덕을 잊지 말아야 하고, 친구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지녔다면 빨리 잊어야 합니다. 
 자, 이만하면 ‘안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안연’의 이야기는 일단 끝내기로 하고,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고요가 살고 있다.
해묵은 기침 소리 모두 잠재우고
두툼한 햇솜 이불 깔아놓고
하얀 숨결이 날개를 접고 있다.
낮아서 더욱 아늑한 자리
시린 바람 불어서 한껏 자유로운 곳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만지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분의 절대로 늙지 않는 사랑
졸고 있는 산봉우리 멀찍이 세워두고
거기, 씨암탉 같은 고요가
온 우주를 가만히 품고 있다.
- 졸시 ‘겨울 산을 오르면’ 전문

 ‘안회’의 일생을 보면, 마치 겨울 산을 오르는 바와 같았습니다. 안회가 그렇듯 ‘겨울 산’을 올랐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겨울 산에는 하얀 ‘고요’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여기에서 말하는 ‘고요’란, 공자가 말한 ‘인’(仁)이라고 해도 될 성싶습니다. ‘안회’는 ‘배움’에 목마른 사람입니다. 그러니, ‘인’을 만날 수 있다면 어디엔들 가지 않았겠습니까? ‘하얀 숨결이 날개를 접고 있는 그곳!’이 바로 ‘겨울 산’입니다. 물론, ‘하얀 숨결’은 ‘인’을 가리킵니다.
 문득, ‘안연’을 칭찬하는 공자의 말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질다, ‘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거처하며 살고 보면 남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 터인데, ‘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구나. 그러니 어질다, ‘회’여!”
 이런 삶이 바로 ‘겨울 산’을 오르는 바와 같은 삶입니다. 그리고 ‘낮아서 더욱 아늑한 자리’와 ‘시린 바람이 불어와서 한껏 자유로운 곳’은 ‘그의 안빈낙도하는 상태’를 이릅니다. 아, 흰 눈이 쌓인 겨울 산을 홀로 오르는 ‘안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그는 가난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군자의 길을 걷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어느 때인가 노나라 ‘정공’이 ‘안회’를 칭찬하자, 공자는 어깨가 으쓱해져서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쯤을 가지고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하지만 공자는 늘 ‘겨울 산’을 오르는 듯한 ‘안회’를 안쓰럽게 바라보곤 했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