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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에 관한 한, 나는 늙은 농부보다 못하다
공자 집안의 일을 정성스럽게 맡아서 돌본, 공자 제자가 있었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원헌’입니다. ‘원헌’(原憲)의 자(字)는 ‘자사’(子思)이고, 이름이 ‘헌’이지요. 일명 ‘원사’(原思)라고도 부른답니다. 공자보다 36세가 아래이며, 송(宋)나라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위(衛)나라로 가서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가신’(家臣)이나 ‘집사’(執事)를 두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공자가 ‘대사구’라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앞에서 말했지요? 그런 공자에게 ‘가신’이란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 말의 근원지는 ‘논어’에 있습니다.
‘원사’가 ‘재’(宰)의 일을 보게 되었을 때, 공자가 곡식 9백 섬을 주었다. 그러자 ‘원사’가 사양하니, 공자가 말했다. “사양하지 마라. 너의 이웃과 향당에 나누어 주면 되지 않느냐?”(원사위지재 여지속구백 사, 자왈 무 이여이린리향당호.: 原思爲之宰 與之粟九百 辭, 子曰 毋 以與爾隣里鄕黨乎.)【논어 6-3】
여기에서 ‘원사’(原思), 즉 ‘원헌’은 ‘재’(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글의 의미로 보아서 ‘재’란 ‘고을을 다스리는 읍장’ 정도를 말하지요. 그런데 해석들은 모두 이를 두고, ‘가신’이나 ‘집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을 보면, 공자가 곡식을 9백 섬이나 ‘원헌’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재’의 임무를 수행한 ‘원헌’에게 녹봉을 주었다는 말인데, 나라에서 지급해야 할 녹봉을 왜 공자가 주었을까요? 그리고 ‘원헌’은 떳떳하게 받아야 할 녹봉을 왜 사양했을까요?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공자가 ‘대사구’의 자리에 있었다고 가정해야 쉽게 풀릴 것 같습니다. 아마 여기에서 말하는 ‘가신’이나 ‘집사’는, 집안의 살림꾼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대부가 다스리는 고을 정도의 관리를 가리켰을 성싶습니다.
‘인리향당’(隣里鄕黨)이라는 말에서 ‘다섯 집’(五家)을 ‘인’(隣)이라고 하며 ‘스물다섯 집’을 ‘리’(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만2천5백 집’을 ‘향’(鄕)이라고 하였으며 ‘5백 집’을 ‘당’(黨)이라고 하였답니다.
그 일은 그렇다 치고, 공자는 ‘원헌’이 많다고 여길 만큼의 과한 녹봉을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원헌’은 몹시 가난했다고 전합니다.
‘장자’의 ‘양왕’(讓王) 편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원헌이 노나라에 살고 있을 때, 그의 집은 사방이 한 칸 정도였고, 초가지붕에는 잡초가 우거졌으며, 사립문은 온전하지 않았고 뽕나무 줄기로 문의 지도리를 삼았으며, 깨진 항아리로 들창을 낸 방이 둘 있었는데 칡으로 창을 가렸다. 위에서는 비가 새고 바닥은 축축했다. 그래도 ‘원헌’은 정좌하고 앉아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열전’이나 ‘공자가어’에서 이야기하는 ‘원헌’의 모습은 당당하였습니다. 공자가 숨을 거둔 뒤에, ‘원헌’은 세상을 등지고 풀이 무성한 늪 가에 숨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원헌’에게, 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내며 떵떵거리는 자공이 찾아왔습니다. 그 모습이 굉장했답니다. 네 필의 말이 끄는 으리으리한 마차를 타고 여러 호위병에게 둘러싸여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원헌’은 낡은 관과 낡은 옷으로 그를 맞았습니다. 자공은 ‘원헌’의 행색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쩌다가 병이 들었는가?”
‘원헌’이 힘없이 말했습니다.
“내가 들은 바로는, ‘재물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빈궁하다.’라고 하며,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들었다.’라고 한다. 나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병들지는 않았다.”
그 말을 듣고, 자공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언짢은 마음으로 떠났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자기의 말이 지나쳤음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렇듯 ‘원헌’은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더욱 열심히 스승의 가르침을 닦기에 밤낮으로 열중하였고, 그 때문에 뜻이 있는 선비들은 ‘원헌’을 아주 귀중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참으로 ‘원헌’의 삶은 고귀하였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 공자를 늘 가까이에서 보살폈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번지’입니다. ‘번지’(樊遲)라는 사람은 성이 ‘번’이고 이름은 ‘수’(須)입니다. 자(字)는 ‘자지’(子遲) 또는 ‘번지’라고 했습니다. 노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제(齊)나라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공자보다 36세가 아래랍니다. 그런데 ‘공자가어’에는 46세 아래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용기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어렸을 적에 노나라 권력자인 ‘계씨’ 밑에서 벼슬살이를 지냈다는군요. 739년인 당나라 때에 ‘번백’(樊伯), 1009년인 송나라 때에 ‘익도후’(益都侯)로 추봉되었답니다.
‘번지’는 공자 옆을 언제나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지가 ‘무우’ 아래에서 공자를 따라 거닐다가 말했다. “덕을 숭상하고 간특함을 바로잡으며 미혹을 분별하는 데 대하여 감히 묻고자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좋은 질문이다. 먼저 일을 마친 다음에 그 소득을 얻으면 덕을 높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나쁜 점을 비판하되,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비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원한을 없앨 수 있다. 하루아침에 분노로 자기를 잊고 심지어는 부모까지도 잊는다면 미혹됨이 아니겠느냐?”(번지 종유어무우지하 왈 감문숭덕수특변혹. 자왈 선재 문. 선사후득 비숭덕여. 공기악 무공인지악 비수특여. 일조지분 망기신 이급기친 비혹여.: 樊遲 從遊於舞雩之下 曰 敢問崇德脩慝辨惑. 子曰 善哉 問. 先事後得 非崇德與. 攻其惡 無攻人之惡 非脩慝與. 一朝之忿 忘其身 以及其親 非惑與.)【논어 12- 21】
이 중에서 ‘무우’(舞雩)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 또는 ‘기우제를 지낼 때 춤을 추는 곳’을 말합니다. ‘무우귀영’(舞雩歸詠)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무우에서 놀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라는 뜻으로, ‘자연과 풍류를 즐김’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수특’(脩慝)에서 ‘수’는 ‘다스려 없앰’을 말하고, ‘특’은 ‘사특한 마음’으로 ‘마음속에 숨어 있는 사악을 다스려 없애는 것’을 뜻합니다. 또, ‘선사후득’(先事後得)은 ‘수양을 먼저 하고 그 효험은 뒤로 함’이나 ‘사회적 봉사를 먼저 하고 이득이나 보수를 나중에 받음’을 나타냅니다. 또, ‘공기악’(攻其惡)은 ‘자기의 악을 쳐 없앰’을 가리킵니다.
이는, 공자가 ‘번지’에게 ‘이해에 얽매이지 않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먼저 하고 그 얻음은 나중에 하라.’라는 말을 강조하였습니다. 어느 날, ‘번지’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인(仁)이란 무엇입니까?”
이에, 공자가 말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또, ‘번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知)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또 말했습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
‘번지’가 여전히 깨닫지 못하자, 공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곧은 사람을 뽑아서 굽은 사람 위에 두면, 굽은 사람이 곧게 된다.”
‘번지’가 물러나서 자하를 찾아보고 말했습니다.
“방금 선생님을 찾아뵙고 ‘지’(知)에 관해 물었더니, 선생님께서는 ‘곧은 사람을 뽑아서 굽은 사람 위에 두어라.’라고 하시더군.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인가?”
자하가 말했습니다.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씀인가! 순(舜) 임금께서 다스릴 때 많은 사람 가운데서 ‘고요’(皐陶)를 골라서 쓰시니 어질지 아니한 자가 멀리 사라졌으며, 탕(湯) 임금께서 천하를 다스림에도 여러 사람 중에서 ‘이윤’(伊尹)을 골라서 쓰시니 어질지 아니한 사람이 멀리 사라져 버렸지.”
‘고요’라는 사람은 ‘유우씨’(有虞氏)로 자(字)는 ‘견정’(堅庭)이랍니다. 순임금 때의 사사(士師)로서 사법을 맡았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윤’은 성이 ‘이’(伊)이고 이름은 ‘지’(摯)라고 하지요. 은나라 탕 임금 때의 재상이라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서 ‘번지’는 조금 아둔한 사람이었을 성싶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쉽게 알아듣건만 자신은 얼른 이해가 안 되므로 마음이 어두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번지’는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어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오곡 가꾸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늙은 농부’보다 못하다.”
‘번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채소 가꾸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늙은 ‘채소 가꾸는 사람’보다 못하다.”
‘번지’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소인이구나, 번지는.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불경하게 굴지 못할 것이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진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무릇 이렇게 되면 사방의 백성들이 그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찾아오게 된다. 그러니 농사를 배워서 무엇 하겠는가?”
‘번지’는 공자로부터 ‘군자’가 되기 위한 학문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백성을 다스리는 공부는 하지 않고, 농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니 공자의 입에서 ‘소인’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코 농사가 천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농사’는 농부가 지어야 하고, ‘군자’는 지도자로서 여러 백성을 이끌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각자 ‘천명’에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비’는 학문에 정진해야 마땅합니다.
‘번지’는 공자를 따라다니다가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식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인가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나라 대부인 ‘포견’(鮑牽)이 임금을 섬길 때는 그 정치를 맡아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는 참으로 충성스럽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임금이 그의 다리를 끊는 형벌까지 행했으니 그 임금은 너무나 어두운 임금이 아닙니까?”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옛날에 선비는 그 나라에 도가 있으면 충성스럽게 임금을 도와서 일하지만, 그 나라에 도가 없으면 물러가서 화를 피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포견’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음란한 조정에서 녹을 타 먹기에만 급급하여 벼슬을 하고, 그 임금이 밝은 임금인지 어두운 임금인지를 헤아려 보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크나큰 형벌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즉, 이리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그의 지혜가 한 송이 해바라기만도 못한 게다. 해바라기는 오히려 해를 따라 얼굴을 돌이킴으로써 자기의 삶을 보전하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은, 사람의 섬김에 대한 법칙을 생각하게 합니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사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비방을 행함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섬길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즉시 그 곁을 떠나는 게 옳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두운 사람을 계속 섬기다가 그와 같은 화를 당하게 된다면 그 모두가 섬기는 사람의 잘못이 되고 말지요. 공자의 말이 그대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공자는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제자 중에는, 공자의 사위도 있었습니다. 그는 ‘공야장’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앞의 둘째 단락에서 조금 소개가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공야장’(公冶長)이라는 사람은 성이 ‘공야’이고 이름은 ‘장’입니다. 그리고 자(字)는 ‘자장’(子長)이라고 했습니다. 기억이 납니까? 그런데 어느 기록에는, 이름이 ‘장’(萇)이고 자(字)가 ‘자지’(子芝)라고 했지요.
‘공야장’은 제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노나라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739년인 당나라 때에 ‘거백’(莒伯), 1009년인 송나라 때에 ‘고밀후’(高密侯), 1530년인 명나라 때에 ‘선현공야자’(先賢公冶子)로 추봉되었습니다.
공자가 ‘공야장’을 사위 삼을 당시에 그는 감옥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자기의 딸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공야장’은 무슨 연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까요?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궁금증을 풀어 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논어집설’(論語集說)의 황간(黃侃)이 전하는 ‘논석’(論釋)이란 책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요. 듣기에 매우 황당하지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공야장’이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올 때의 일이랍니다. 두 나라의 경계 지역에 이르렀을 때, 그가 숲에서 새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짹짹짹짹, 청계로 가보자. 거기에는 시체 하나가 있다.”
‘공야장’이 그 소리를 듣고 얼마 동안을 걸어가고 있자니까, 한 할머니가 엎드려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이유를 물으니,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애가 며칠 전에 집을 나가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것 같은데, 어디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공야장’은 조금 전에 새들이 속삭이던 소리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새들이 청계로 가면 시체가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곳으로 찾아가 보십시오.”
할머니가 부리나케 달려가 보았더니, 그 할머니네 아이가 틀림없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사실을 관가에 알렸습니다. 관가에서 관리가 나와서 사실을 확인한 후에, 관리는 할머니에게 ‘시체가 여기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공야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관리가 말했습니다.
“그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겠는가?”
그리고는 ‘공야장’을 감옥에 가두었으며, 곧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사람을 죽였는가?”
“새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당신 말이 정말인지를 시험해 보겠는데, 당신이 만일 새소리를 듣고 그 뜻을 알 수 있다면 반드시 풀어 주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사형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공야장’은 이렇게 해서 60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60일째가 되던 날, 참새들이 감옥 창문 앞에 와서 ‘짹짹짹짹’하자, ‘공야장’이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이 사실이 감옥 관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관리가 와서 ‘공야장’에게 물었습니다.
“참새들이 무어라고 말했기에 웃었소?”
‘공야장’이 대답했습니다.
“짹짹짹짹, ‘백색의 연꽃이 물가에 피었고, 마차가 거기로 뒤엎어져서 기장과 좁쌀이 엎질러졌으며 황소도 뿔이 부러졌다. 모두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우리 가서 쪼아 먹자!’이렇게 말했습니다.”
관리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으나, 사람을 보내어서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가서 확인하고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놀랍습니다.”
관리는, 돼지와 제비의 말까지 정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지, 여러 차례 시험해 보고 나서야 ‘공야장’을 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제자는, 공자의 조카사위가 되었습니다. 공자에게, 발이 불편한 ‘맹피’(孟皮)라는 형이 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겠지요? 바로 그의 딸을, 공자는 ‘남용’이라는 제자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남용’(南容)이라는 사람은 자(字)가 ‘자용’(子容)입니다. ‘남궁도’(南宮縚)라고도 한답니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용’은 맹손씨(孟孫氏)의 일족인 ‘남궁괄’(男宮适)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맹의자’(孟懿子)의 형인 ‘남궁경숙’(南宮敬叔)을 말한답니다. 물론, 그들의 아버지는 ‘맹희자’(孟僖子)입니다.
‘공자가어’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남궁도는 지혜롭게 스스로 세상을 대처해 나가는 인물이다. 세상이 맑으면 버려지지 아니하고 세상이 혼탁해도 물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이에 관한 내용이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남용’에 대해 말했다. “나라의 정치가 깨끗하면 버림받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라도 형벌과 주륙에서 면할 수 있겠다.”이에 공자는 형의 딸로서 그의 처를 삼게 하였다.(자 위남용 방유도 불폐 방무도 면어형륙 이기형지자 처지: 子 謂南容 邦有道 不廢 邦無道 免於刑戮 以其兄之子 妻之)【논어 5-2】
여기에서 말하는 ‘불폐’(不廢)는 ‘버려지지 않고 반드시 등용된다는 말’이고 ‘형륙’(刑戮)은 ‘형벌과 주륙’이며 ‘형지자’(兄之子)는 ‘형의 딸’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지만, ‘남용’은 공자가 모은 3백여 편의 노래에 포함된 ‘대아’(大雅)의 ‘억편’(抑篇)이라는 시를 몇 번이고 암송했다고 합니다. 또한, 말을 아주 신중히 했다고 전합니다. 공자는 무엇보다도 ‘시’를 가까이하고 말을 신중히 하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니 그렇듯 ‘남용’이 마음에 쏙 들었겠지요.
‘공자가어’에는 또 이런 내용의 글이 씌어 있습니다.
‘남용’이 말했습니다.
“중손하기가 벌써 복을 벗었으나 소공은 외국에 나가 있어서 경대부로 쓰라는 명령이 없었더니, 정공이 즉위한 뒤에야 비로소 명령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중손하기는 사양하고 말하기를 ‘선신(先臣)께서 유명(遺命)을 내리실 때, 예란 곧 사람의 줄거리이니 이 예가 아니면 일어설 수가 없다. 가로(家老)에게 부탁하여 우리 두 신하에게 반드시 공자를 섬기고 예를 배워서 그 예를 정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중손하기’(仲孫何忌)는 ‘맹의자’(孟懿子)를 말합니다. 여기의 말대로 따른다면, ‘남용’의 동생입니다. 이에, 정공은 그 말을 허락하여 그 두 사람을 공자에게 보내어서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남용’뿐만 아니라, ‘맹의자’도 공자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능히 허물을 보충해 나갈 줄 아는 사람은 군자이다. 시에 말하기를 ‘군자란 자기 몸이 곧 법이 되고 본받을 바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맹희자야말로 남의 법이 되고 본받을 바가 될 사람이다. 자기의 잘못을 징계하여 그 아들에게 훈계했으니 대아(大雅)에 ‘이른바 그 손자에게 법을 끼쳐 주고 그 아들을 편안하게 해준다.’라고 한 게 모두 이런 유(類)이다.”
‘맹희자’(孟僖子)라는 사람은 ‘남용’과 ‘맹의자’의 아버지입니다. ‘맹희자’는 이름이 ‘중손확’(仲孫貜)이고 ‘맹이자’(孟釐子)라고 하기도 합니다.
또, ‘공자가어’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남궁경숙은 부자로 살면서 정공에게 죄를 짓고 위(衛)나라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정공은 ‘경숙’에게 다시 돌아오도록 청했습니다. 이리하여 ‘경숙’은 다시 보물을 싣고 와서 조견(朝見)했습니다. 이 ‘남궁경숙’이 바로 ‘남용’이지요. 그럼 이야기를 더 들어 볼까요?
공자가 그 소식을 듣고 말했습니다.
“재물이 그리 중하단 말이냐? 지위를 잃었을 바에는 차라리 빨리 가난해지는 것이 옳다.”
자유가 곁에 있다가 물었습니다.
“어찌해서 그렇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부유하면서 예를 좋아하지 않으면 재앙이 있게 마련이다. 저 ‘경숙’으로 말하면 부유하기 때문에 지위를 잃어버렸는데도 역시 자기의 허물을 고칠 줄 모르니 반드시 후환이 있을까 걱정된다.”
‘경숙’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빨리 공자에게 가서 문의한 다음, 예에 의하여 재물을 남에게 흩어 줌으로써 모두 없앴답니다.
이 ‘남용’이라는 사람에게는 ‘공멸’이라는 처남이 있었습니다. 이 ‘공멸’(孔蔑)이 공자의 형인 ‘맹피’의 아들입니다. 다음은 ‘공자가어’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공자의 조카(형의 아들)로 ‘공멸’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복자천과 함께 벼슬살이를 지내게 되었다. 어느 날, 공자는 ‘공멸’을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다.
“네가 벼슬에 나온 후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공멸’이 말했다.
“얻은 것은 한 가지도 없으나 잃은 것은 세 가지나 있습니다. 임금의 일에만 얽매어 괴롭게 되니 어느 겨를에 학문을 익힐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학문에 대하여 밝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봉록이 적어서 죽을 먹게 되니 어느 겨를에 친척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이는 골육 간에 더욱 소홀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무에 다급해서 죽은 자를 조상하고 병든 자를 문병하지 못하게 되니 이는 친구 간에도 소홀하게 됩니다. 그 ‘잃어버린 바가 세 가지’란, 이런 것들입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공자는 그 길로 복자천을 찾아보고 ‘공멸’에게 물은 말대로 물어보았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자천’을 이야기할 때 이미 기술했습니다. 즉, ‘자천’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얻은 것이 세 가지라고 대답했지요. 이렇듯 두 사람은 차이가 컸습니다. 그러니까, ‘공멸’은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자천’은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때, ‘공멸’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행동하는 도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고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며, 친절하면서도 믿어 주지 않으면 친절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즐거운 일이 지금 온다고 해도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하며, 걱정되는 일이 장차 온다고 해도 근심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공멸’은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행동하는 도는 이것뿐입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자기가 능하지 못한 것은 애써 해야 하며, 자기에게 갖춰지지 못한 것은 보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자기가 능하지 못한 것으로 남을 의심하지 말고, 자기가 능한 것으로 남에게 교만하지 말아야 하며, 해가 지도록 이야기할지라도 자기의 걱정을 남에게 끼치지 말아야 하며, 해가 지도록 일할지라도 자기의 근심을 남에게 끼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이는 오직 지혜 있는 사람이라야만 능히 할 수 있다.”
공자는 조카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습니다. 그 이유를 나는 알지요. 공자의 형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정상적이지 못했습니다. 즉, 절뚝거렸습니다. 그 측은함이 조카에게 더욱 따뜻한 시선을 보내도록 만들었을 테지요.
그러면 이제는 ‘신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신정’(申棖)이라는 사람은 자(字)가 ‘자주’(子周)이며, 노나라 사람이랍니다. ‘공자가어’에는 ‘신적’(申績)으로 나와 있고, ‘사기’에는 ‘신당’(申黨)으로 나와 있습니다. 739년인 당나라 때에 ‘노백’(魯伯)으로 추봉되었고, 1009년인 송나라 때에 다시 ‘문등후’(文登侯)로 가봉되었다고 합니다.
‘논어’에는 ‘신정’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아직 꿋꿋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신정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다. “신정은 욕심이 있는데, 어찌 꿋꿋할 수 있겠느냐?”(자왈 오미견강자. 혹 대왈 신정. 자왈 정야 욕 언득강.: 子曰 吾未見剛者. 惑 對曰 申棖. 子曰 棖也 慾 焉得剛.)【논어 5-11】
여기에서 말하는, ‘강’(剛)은 ‘강단이 있는 것’을 말하고, ‘욕’(慾)은 ‘명리(名利)와 기욕(嗜慾)과 성색(聲色) 등의 모든 욕심’을 나타낸답니다. ‘언득강’(焉得剛)은 ‘어찌 강직하다고 하겠는가.’라는 뜻이지요.
이는, 욕심이 없어야 강직하다는 말입니다. 명리를 쫓는 사람은 반드시 이(利)나 세(勢)에 굴복하고 말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 이야기 중에는, ‘신정’은 노나라 사람이긴 해도 그 조상은 신(申)나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지 않겠느냐는 설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성이 ‘신’이기 때문이겠지요.
이 글을 보면, ‘신정’이 강단이 있기는 해도 그의 강함이 어떤 개인적인 욕망이나 사사로운 욕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공자가 지적했다고 느껴집니다. 욕심이 있는 것과 강직하다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욕심은 이익이 없어지면 적극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공자가 생각한 ‘진정으로 강직한 사람’은 바로 ‘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쉽게 말해서 ‘강직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한 사람’은 ‘인’(仁)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 ‘공석애’(公析哀)는, 제나라 사람이고 자(字)는 ‘계심’(季心)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대부에게로 가서 벼슬하는 것을, 그는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남의 신하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고, 공자는 이를 특별히 귀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전’(梁鱣)은, 제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숙어’(叔魚)라고 했습니다. 공자보다 39세가 적었다고 합니다. 나이 30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는 자기 아내를 내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상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지 말게. 옛날 내가 30세가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으므로, 우리 어머니께서 나를 위하여 다시 장가를 가라고 하셨으나 나는 차마 아내를 내보내지 못했다네.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걱정하지 마라. 40세가 되면 아들 5형제를 두게 된다.’라고 하셨는데 이제 과연 그 말씀대로 되었네. 자네도 내가 보기에는 아들을 늦게 얻을 뿐이지 전혀 없는 신수가 아니니 아내의 허물만을 생각지 말고 조금 더 기다려 보게.”
‘양전’이 그 말을 좇았더니, 과연 그 후 2년 만에 아들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상구’(商瞿)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자목’(子木)입니다. 공자보다 29세가 적었답니다. 그는 특별히 ‘주역’을 좋아했으므로, 공자는 이것을 그에게 전해 주고 잘 기록하라고 하였답니다.
또 ‘숙중회’(叔仲會)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字)는 ‘자기’(子期)라고 합니다. 공자보다 50세가 적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선’(孔璇)과 나이가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공선’이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성이 ‘공’(孔)이었으므로, 공자와 혈연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무튼 ‘숙중회’는 어릴 때부터 붓을 잡고 공자의 일을 기록했다는군요. 그리고 ‘공선’과 함께 늘 공자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렇기에, 맹무백(孟武伯)이 물었습니다. ‘맹무백’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맹의자’의 아들입니다. ‘무’(武)는 시호이고 ‘백’(伯)은 ‘맏아들’을 뜻합니다. 그 성은 ‘중손’(仲孫)이고 이름은 ‘체’(彘)이며 자(字)는 ‘설’(泄)이랍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어린 나이인데 어찌 장성한 사람보다도 학문에 대하여 출중합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조금만 더 성취하고 보면 그 성품과 같아질 것이고, 더욱 익숙하게 되면 자연에 맞게 될 것이다.”
‘맹의자’가 공자의 제자이니, ‘맹무백’은 제자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어린 ‘맹무백’에게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겠지요. 그 부드러운 음성이 내 귓전에서 지금도 맴도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또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값이 자꾸 내린다고 하니
고추는 발끈해서
어디 누구든지 건드려만 봐라,
잔뜩 벼르고 있다.
고추야,
왜 내가 네 맘을 모르겠느냐
뻐꾸기 우는 점심나절
물만밥을 앞에 놓고
속이 타는 농부가
고추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 졸시 ‘고추와 농부’ 전문
공자의 제자인 ‘번지’는 조금 아둔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 가르침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했던 성싶습니다. 그 때문인지, 그는 공부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나 짓고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공자에게 ‘오곡 가꾸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번지의 그 말을 듣고, 공자는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라고 아주 짧게 대답했지요.
이런 일은, 요즘에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정년퇴직이 되었거나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곧잘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나 지을까?’하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은 농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농사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하니, 새로 기술을 배우고 정성을 들이고 부지런하게 일할 생각이라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구태여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도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사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낫다는 말입니다.
나는 10여 년 동안 농사를 지었기에 농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농작물을 열심히 가꾸었다고 해도, 그 수확물을 제값을 받고 팔기도 쉽지 않습니다. 농작물의 값이 내리면 농부들의 가슴이 탑니다. 그래서 물만밥이 아니면 목에 넘기기도 어렵지요. 반찬이라야 ‘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게’ 고작인데, 그마저도 ‘맵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에 고추의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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