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22. 들소도 아닌데 들판을 헤매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1. 31. 14:25

22
들소도 아닌데 들판을 헤매다





 공자가 ‘섭’에서 채(蔡)나라로 옮긴 지 3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오나라가 진(陳)나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진나라는 초(楚)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초나라는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진나라를 구하기 위해, 초나라는 ‘진보(陳父)라는 곳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때, 초나라 소왕(昭王)은 공자 일행이 진나라와 채나라 국경 지역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서 공자를 자기 나라로 초청하려고 하였습니다. 공자도 싫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부름에 응하여 소왕을 만나러 초나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습니다.
 “공자는 현인이다. 그가 하는 말은 제후들의 잘못과 모두 들어맞는다. 지금 그가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에 오래 머물고 있는데, 이제 만약 초나라에서 그를 쓴다면 우리 두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공자 일행을 꼼짝하지 못하게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그야말로 공자는 들판에 갇힌 신세가 되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식량이 떨어지고, 또 7일이나 지났습니다. 하지만 바깥과는 통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된 제자들은 기력이 떨어져서 잘 일어서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의연하게 가르침을 펴고 책도 읽으며 거문고도 탔습니다. 그 상황에서 성미 급한 자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나라에 있을 때 양식이 떨어지고 따라간 사람들이 병들어서 일어서지를 못했다. 그러자, 자로가 화가 나서 공자에게 물었다. “군자도 또한 곤궁함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원래 궁하다. 그러나 소인이 궁하면 못 하는 짓이 없게 된다.”(재진절량 종자병 막능흥 자로온현왈 군자역유궁호. 자왈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논어 15-1】

 여기에서 말하는 ‘고궁’(固窮)은 ‘원래 곤궁한 것’을 뜻하는데, 이는 바꾸어 말해서 ‘곤궁해도 절조를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람’(濫)은 ‘물이 그릇에서 넘치듯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가리킨답니다.
 그러면 자공을 살펴볼까요? 그는 말을 안 했지만,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그 모양을 보고, 공자는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아는 게 있느냐? 아는 게 없다. 평범한 사람이 나에게 물으면, 나는 근본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도 그 문제의 양쪽 끝으로부터 캐어 들어가서 많은 의미를 얻고 난 뒤에 그에게 일러주는 것뿐이다.”
 공자는 마음이 쓸쓸해졌습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도’(道)를 가슴에 품고 들판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도’를 확실히 깨닫지도 못한 채로 자기만을 믿고 따라와서 고생하는 제자들이 애처롭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런 일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측은한 생각이 든다고 해서 제자들을 약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물론, 나에게 똑같이 배운 그들이지만 그들의 배움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이들 중에는 꽃도 피우지 못할 사람도 있고, 꽃은 피우나 열매를 맺지 못할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물러서서는 안 된다.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제자들의 참다운 벗이 되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들을 일으켜 주어야만 한다. 이는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사명이기도 하다. 도(道)를 쌓는 일은 마치 산을 쌓는 바와 같다. 그저 나는 앞을 바라보며 한시도 쉬지 않고 한 줌이라도 더 흙을 보태면 된다. 그리고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제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이 나를 따르고 있다. 내가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저들은 더욱 일어설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나아갈 때나 물러설 때나 괴로움을 피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저들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제자들이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공자는 무슨 말로든지 그들을 위로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자로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시에 이르기를 ‘들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면서 저 먼 들판을 헤매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에서 이런 곤란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공자의 이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여기에서 잠깐 공자가 인용한 ‘시’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의 이 시는, 공자가 모은 ‘노래 가사들’ 중의 ‘하초불황’(何艸不黃)을 가리킵니다.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하초불황   何艸不黃   어느 풀은 노랗게 아니 마르며
하일불행   何日不行   어느 날은 길을 안 끌려가서
하인부장   何人不將   어느 사람은 이끌리지 않는다고 하더냐.
경영사방   經營四方   여기저기의 싸움에서

하초불현   何艸不玄   어느 풀은 까맣게 아니 마르며
하인불환   何人不矜   어느 누군 홀아비 신세 아니랴.
애아정부   哀我征夫   그렇지, 불쌍하기는 우리 병사들
독위비민   獨爲匪民   사람이지만 사람대접을 받은 적 없다.

비시비호   匪兕匪虎   들소도 호랑이도 아니지만
솔피광야   率彼曠野   오늘도 들판을 헤매는 신세
애아정부   哀我征夫   그렇지, 불쌍하기는 우리 병사들
조석불가   朝夕不暇   아침저녁 어느 때에 틈인들 있나.

유봉자호   有芃者弧   꼬리를 질질 끌며 여우 한 마리
솔피유초   率彼幽艸   우거진 풀숲 사이로 사라지는데
유잔지거   有棧之車   오늘도 터벅터벅 짐수레 몰고
행피주도   行彼周道   끝없이 뻗은 길을 하염없이 가네.

 이는, 끝없는 싸움에 끌려다니는 병사들의 고통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의 처지가 그와 같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공자의 이런 말을 듣고, 자로가 말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게지요. 아마도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게지요.”
 자로의 이 말에 대한 공자의 멋진 대답이 ‘공자가어’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유야! 너는 아직 모르는 말이다. 내가 너에게 말해 주겠다. 어진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남들이 믿게 된다면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굶어 죽지 않았을 터이며, 지혜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남에게 쓰이게 된다면 왕자 ‘비간’의 배를 가르게 되지 않았을 터이다. 그리고 충성스럽다고 해서 반드시 보답이 있다면 ‘관용봉’이 형벌을 당하지 않았을 터이며, 간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임금이 들어 준다면 ‘오자서’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터이다. 대개 시대를 제대로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운명이고, 사람으로서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은 자신의 재주에 달렸다. 제아무리 군자로서 학식이 넓고 지모가 깊다고 할지라도 시대를 못 만난 자는 여럿 있다. 어찌 나 혼자뿐이겠느냐? 또, 비유해 말하자면 지초와 난초가 깊은 산골짜기에 났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 향기가 나지 않는 법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자도 도를 닦고 덕을 세우다가 곤궁에 빠졌다고 해서 절개를 변하지 않는 것이니,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고 살고 죽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다. 그런 까닭에 진(晋)나라 ‘중이’는 패왕 노릇을 할 뜻이 있기에 조(曹)나라와 위(衛)나라에 곤욕을 당해 가면서도 오히려 목숨을 끊지 않았다. 월왕 ‘구천’도 패왕 노릇을 할 의사가 있었기 때문에 회계산에서 수치를 당해 가면서도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랫자리에 처해서 조심이 없는 자는 생각을 멀게 하지 못하며 몸을 항상 편하게 갖는 자는 뜻하기를 넓게 하지 못하는 법이니, 이만하면 일의 처음과 끝을 알겠느냐?”
 이 말 중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여럿 있습니다. 특히 ‘백이’와 ‘숙제’에 대한 이야기는 ‘논어’에도 몇 번이나 나옵니다. 그중에 하나를 살펴볼까요?
 
 공자가 말했다. “백이와 숙제는 지난날의 나빴던 일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원망하는 일이 드물었다.”(자왈 백이숙제 불념구악 원시용희. 子曰 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논어 5-23】

 이의 풀이는 이러합니다. 백이와 숙제는 결백한 성격으로 부정과 불의를 미워하는 정도가 몹시 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악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았답니다. 지나가 버린 구악을 마음에 언제나 지니는 도량이 아니었으므로, 남을 원망한다든지 또는 남에게 원망을 산다든지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백이’와 ‘숙제’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라는 사람들은, 멀고 먼 옛날의 중국에 있던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었습니다. 고죽국의 임금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왕위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셋째’ 아들에게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 셋째 아들이 바로 ‘숙제’였지요. 그러나 왕은 왕위를 물려주기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숙제’는 맏형인 ‘백이’에게 보위를 내놓으려고 하였습니다. 
 ‘백이’는 펄쩍 뛰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정한 일이니, ‘셋째’가 왕이 되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숙제’가 말을 듣지 않자, ‘백이’는 홀로 멀리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숙제’도 대단했지요. 그 또한, ‘백이’를 따라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고죽국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둘째 왕자인 ‘중자’(中子)를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백이’는 ‘숙제’를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듣기에, 서백창은 사람을 잘 맞아 준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로 가서 몸을 의지해 보는 게 좋겠다.” 
 ‘서백창’(西伯昌)은, 바로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주나라를 찾아갔으나, 이미 문왕은 이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주나라 문왕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인 ‘무왕’(武王)이었습니다. 무왕은 왕이 되자마자 은나라 ‘주왕’(紂王)을 치려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은나라’는 ‘상왕조’(商王朝)임은 알지요? ‘무왕’이 ‘상왕조’를 무너뜨린 후에 ‘은(殷)나라’라고 격하하여 불렀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겠지요? 
 ‘백이’와 ‘숙제’는,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로 떠나려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매달렸습니다. 그 모양을 보고, 무왕의 좌우에 있던 병사들이 시퍼런 칼을 빼 들고 ‘백이’와 ‘숙제’를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무왕의 군사(軍師)인 태공망 ‘여상’(呂尙)이 급히 말렸습니다.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니 죽이지 마라.”
 그 길로 ‘무왕’은 많은 군사를 이끌고 ‘주왕’을 쳐서 ‘상왕조’를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백이’와 ‘숙제’는 말했습니다.
 “부끄러운 세상이다. 우리가 어찌 주나라의 곡식을 먹고 살겠는가?”
 두 사람은 그 길로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풀뿌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었답니다.
 그리고 ‘비간’(比干)은 상대(商代)의 대신이었습니다. 자세히 말하면, 주왕(紂王)의 숙부입니다. 관직이 소사(少師)였다고 하는데, 현자(賢者)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여러 번이나 조카인 ‘주왕’에게 선정(善政)과 덕행(德行)을 베풀도록 간언하다가 결국은 주왕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왕은, ‘성인은 심장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다.’라고 말하며, ‘비간’을 죽인 후에 그의 배를 가르고는 과연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또, ‘관용봉’(關龍逢)은 하(夏)나라의 어진 신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걸왕’(桀王)에게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못하도록’ 간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한 사람, ‘오자서’(伍子胥)라는 사람이 있지요. 춘추시대 오나라 사람입니다. 이름은 ‘원’(員)이고 자(字)는 ‘자서’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오사’(伍奢)이며 그의 형 이름은 ‘오상’(伍尙)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초나라의 평왕(平王)에게 처형당했습니다. 그 때문에 ‘오자서’는 오나라로 도망쳤습니다.
 그 후, ‘오자서’는 오나라를 도와서 초나라를 쳤습니다. 그리고 평왕의 무덤을 파헤친 다음, 그 시체에 3백 번이나 매를 때림으로써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았다고 합니다. 그 뒤에, 그는 또 오나라를 도와서 월나라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재(太宰) ‘백비’(伯嚭)는 참신들에 뇌물을 받고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끝내는 그를 죽게 했습니다.
 ‘중이’(重耳)는,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이름입니다. 태자인 형의 이름은 ‘신생’(申生)이었고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헌공’(獻公)의 측실이 자기가 낳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신생’을 자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중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됨으로써 무려 19년 동안이나 망명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는 아슬아슬한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이’는 그 어려움을 모두 넘기고 나중에 진(晋)나라로 돌아와서 임금이 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월왕 ‘구천’의 이야기는 앞에서 길게 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잇겠습니다.
 공자의 말을 듣고, 자로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공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자로에게 한 말과 똑같이 자공에게도 말해 주었습니다. 자공은 모두 말을 듣고 나서 이렇게 청했습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큰 까닭에 천하에서 선생님을 능히 용납하지 못하오니, 선생님께서는 조금 도를 낮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사야, 들어라! 아무리 농사를 잘하는 자라도 자기 힘으로 능히 심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거두는 일은 잘하지 못하며, 물건을 잘 만드는 장인은 능히 교묘하게 하기는 하지만 남의 마음에 꼭 맞는 물건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자도 능히 그 도를 닦아서 기강은 세울지언정 세상에 꼭 용납된다는 것은 기약할 수 없다. 그런데 더욱이 이제 그 도는 부지런히 닦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용납되기만 구하니, 너는 뜻하는 바도 넓지 못하고 생각하는 바도 원대하지 못하구나.”
 공자의 말을 듣고, 자공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안회가 들어왔습니다. 공자는 역시, 자로와 자공에게 말한 대로 안회에게 모든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안회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에 선생님을 능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선생님께서는 이 도를 더욱 미루어 행하실 뿐입니다. 세상에서 쓰지 못하는 것이야 나라를 가진 자가 고루해서 그런 것이오니, 선생님께 무슨 병이 될 게 있습니까? 원래 세상에서 용납하지 못한 뒤에라야 비로소 군자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자, 얼굴에 기쁜 빛을 나타내며 말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저 안씨(顔氏)의 아들이여! 나는 또한 생각하기를 네가 만약 재물이 많다면 내가 네 집의 가신 노릇을 하려고 하겠다.”
 정말로 입이 딱 벌어집니다. 얼마나 안회가 사랑스러웠으면, 이런 말을 공자가 하였을까요? 
 ‘공자가어’의 ‘재액’(在厄) 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공자 일행이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국경 지대에서 여러 사람에게 포위되어 모두 굶주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공이 남모르게 저축했던 비상금으로 쌀 한 섬을 사 왔습니다. 안연이 그 쌀로 밥을 짓는데, 바람이 휙 불며 지붕의 먼지를 밥 위로 날렸습니다. 그 귀한 밥에 먼지가 떨어졌으니, 안연은 안절부절못했지요. 그러다가 그는 먼지가 떨어진 부분의 밥을 떠서 자기가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자공이 멀찌감치 서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자공은 안연이 배가 너무 고파서 밥을 훔쳐 먹는다고 여겼지요. 그렇기에 그는 공자에게로 가서 넌지시 물었습니다.
 “어진 사람이나 청렴한 선비도 곤궁에 빠지게 되면 절개를 바꿉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해도 변절한다면 어찌 어질고 청렴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공이 또 물었습니다.
 “안연 같은 사람은 아무리 곤궁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절개를 변치 않을 사람이겠습니까?” 
 공자는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렇다.”
 이에, 자공은 공자에게 조금 전에 안연이 밥을 훔쳐먹더라는 이야기를 모두 했습니다. 공자는 그럴 리가 없다며, 안연에게 직접 물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 의심을 가졌던 듯싶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안연을 부른 다음에 짐짓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젯밤 꿈에 성인을 만나 뵈었다. 이는 혹시 나의 앞길을 열어 주고 복을 주시려는 게 아닌지 알 수 없으니, 네가 짓는 밥이 모두 되었으면 성인께 먼저 제사를 지낸 후에 먹어야 하겠다.” 
 그 말에, 눈치 빠른 안연이 그 참뜻을 깨닫고 얼른 대답했습니다.
 “조금 전에 밥을 지을 때, 지붕에서 먼지가 떨어져서 그대로 두자니 깨끗하지 못하고 버리자니 아깝기에 제가 그 밥을 떠서 한 덩어리를 먹었습니다. 그러니 여기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음, 그렇게 되었느냐? 먼지가 떨어졌다면 나 역시 떠서 먹었을 거다.”
 안연이 밖으로 나가자, 공자는 여러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안연을 믿어 온 것은, 오늘날의 이런 일이 있기를 기다린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여러 제자가 마침내 모두 안연에게 복종하고 말았답니다. 잠시라도 안연을 의심했던 공자도, 크게 부끄러웠겠지요. 또다시 공자의 이런 모습이 인간미를 나타냅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공자는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 생각에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초(楚)나라 소왕(昭王)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초나라 소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병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점을 치는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 병은 하수(河水)에 탈이 있어서 생겼으니, 임금이 하수에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여러 대부가 이 말을 듣고, 소왕에게 교제를 지내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소왕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옛날 삼대 때, 제법(祭法)을 마련할 적에 천자는 천자대로 제후는 제후대로 각각 자기 국경을 넘어가지 못하게 했다. 또, 초나라로 말하면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와 저수(沮水)와 장수(漳水)라는 큰물이 있는데도 저 하수를 위해서 제사 지내라는 말인가? 그리고 이런 것으로 해서 사람의 화복(禍福)이 이른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닌가? 내가 아무리 덕이 없을망정 하수에 죄를 지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소왕은 마침내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초나라 소왕은 큰 도를 알았으니 자기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마땅한 일이다. ‘하서’에 말하기를 ‘오직 저 도당씨(陶唐氏)는 하늘의 떳떳한 도를 따라 행해서 구주(九州)의 하나인 기방(冀方)을 두었는데 지금 와서는 그 일을 잊어버리고 그 기강을 어지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라고 했다.”
 공자는 말을 이었습니다.
 “남에게 옳은 일을 시키자면 우선 자기 몸부터 착한 말과 착한 마음으로 떳떳이 하늘의 도를 따라서 하는 게 옳다.”
 이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초나라 소공은 자기의 주장이 뚜렷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공자가 믿었겠지요. 
어느덧,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습니다. 공자는 자공을 불렀습니다.
 “사(賜)야, 성보 땅으로 가서 초나라 소왕에게 도움을 청하여라.” 
 자공은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날이 훤히 밝았기 때문에 에워싸고 있는 무리를 뚫고 나가기가 어려울 듯이 느껴졌습니다. 그 모양을 보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오늘까지 엿새 동안이나 에워싸고 있으니, 저 사람들도 지치지 않았겠느냐? 그러하니 밤보다는 낮에 마음을 놓을 게 분명하다.”
 자공이 산책을 하는 척하고 그들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그들은 공자의 말대로 피곤을 못 이기고 여기저기에 쓰러져서 잠들어 있을 뿐, 사람이 지나가고 있어도 별다른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공은 큰 어려움 없이 초나라 군사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진나라와 채나라의 사람들은 포위망을 풀었습니다. 공자 일행은 이레 만에야 무사히 궁지에서 풀려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사람들은, 공자가 여러 날 동안 궁지에 몰린 채로 굶주렸던 이 사건을 가리켜서 ‘진채지액’(陳蔡之厄)이라고 했습니다.
 공자의 여러 해 동안의 방랑, 즉 ‘거노’(去魯)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노나라를 떠나서 햇수로 14년 동안이나 유랑한 경험에서 공자는 중요한 삶의 각성을 얻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크나큰 좌절과 고난을 겪어 봄으로써 삶의 인식을 크게 전환하고 마지막에는 이상의 비상을 이루었을 듯합니다. 마음을 비웠다고나 할까요? 그 이후, 공자는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작고 아름답다.
너는 추운 계절에 서정을 찾아서
명랑하고 우아하게 날아온다.
뜨겁게 앓는 부리로,
변함없이 푸른 가슴으로
동백꽃은 오로지 너를 기다리고 있다.
배고픔을 바람으로 채우며
너는 매우 사랑스럽게 살아간다.
철썩이는 바다에 깃이 젖고
펄럭이는 하늘에 울음이 찢겨도
그리 서러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너는 작지만 위대하다.
- 졸시 ‘아름다운 동박새’ 전문

 공자 일행이 진나라와 채나라의 국경 지대에서 여러 날 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양식은 떨어지고 따라간 사람들은 병들어서 일어설 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자, ‘자로’가 씩씩거리며 ‘군자도 곤궁함이 있는지’를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궁하다. 그러나 소인은 궁하면 못 하는 짓이 없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작고 약한 존재입니다. 며칠만 굶어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군자는 의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공자는 굶주림 속에서도 책을 읽으며 거문고를 탔습니다. 그 모습이 ‘추운 계절에 서정을 찾는’ 작지만 아름다운 ‘동박새’와 같습니다. 
 공자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제자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런 일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측은한 생각이 든다고 해서 제자들을 약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제자들이 나를 보고 있다. 그들이 나를 따르고 있다. 내가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저들은 더욱 일어설 수 없게 된다. 그러니 나아갈 때나 물러설 때나 괴로움을 피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저들 앞에 힘차게 서 있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동백꽃’이 기다리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희망을 안고 동박새처럼 당당히 괴로움과 맞서야 합니다. ‘철썩이는 바다에 깃이 젖고 펄럭이는 하늘에 울음이 찢겨도 그리 원망하거나 서러워하지 않듯’ 모든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