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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새를 골라서 깃들게 할 수 없다
공자 일행은 ‘성보’ 땅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초(楚)나라 소왕(昭王)을 만났습니다. 소왕은 매우 기뻤습니다. 그래서 장차 ‘서사’(書社)의 땅 700리를 공자에게 내리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25가구(家)를 1리(里)로 하여 ‘리’(里)마다 ‘사’(社)를 만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사인’(社人)들의 이름을 ‘사적부’(社籍簿)에 적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서사’라고 불렀답니다.
공자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제야 드디어 가슴에 담긴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공자는 넘치는 기쁨을 가슴에 안고 제자들과 함께 ‘소왕’의 임시 거처에서 물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초나라의 재상인 ‘자서’(子西)가 소왕 앞으로 한 걸음 나왔습니다. ‘자서’는, 초나라 소왕의 서형(庶兄)으로, 공자(公子)인 ‘신’(申)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공자(孔子)는 평소에 이 사람을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듯싶습니다. ‘논어’의 ‘헌문’ 편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자서’에 관하여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공자는 ‘응! 그 사람? 그 사람?’이라고만 대답하였습니다. 원문으로는, ‘피재피재’(彼哉彼哉)라고만 했습니다. 이 말은, ‘저것이냐 저것이냐.’ 정도의 뜻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김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 ‘자서’가 소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의 사신으로 제후에게 보낼, ‘자공’만한 신하가 있습니까?”
소왕이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자서’가 또 소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을 보필할 신하 중에서 ‘안회’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소왕이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자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여러 장수 중에서 ‘자로’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소왕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자서’는 이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왕의 여러 장관 중에서 ‘재여’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소왕은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자서’는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초나라의 선조가 주(周)나라로부터 봉함을 받았는데 그때의 봉호는 ‘자남작’(子男爵)이었고 봉지는 50리였습니다. 지금 공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치국방법을 말하고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덕치를 본받고 있으니, 왕께서 만약 공자를 등용하신다면 초나라가 어떻게 대대로 당당하게 다스려 온 사방 수천 리의 땅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문왕(文王)은 풍(豐) 땅에서 일어났고 무왕(武王)은 호(鎬) 땅에서 일어났지만 일백 리밖에 안 되는 작은 땅을 가진 군주가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근거할 땅을 얻고 저렇게 현명한 여러 제자가 그를 보좌한다면 이는 초나라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듣고, 소왕은 본래의 계획을 취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소왕은 ‘성보’(城父) 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공자세가’ 중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공자가 ‘자서’에 대하여 좋은 마음을 가질 리가 없었겠지요. 이로 미루어서 앞의 ‘논어’에 나와 있는 공자의 말은, 이 일이 있고 난 후의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공자가어’의 기록 중에는 ‘공자’의 ‘자서’에 대한 긍정적인 면도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자는 처음부터 ‘자서’를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그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할까요?
초나라 임금이 형대(荊臺)로 놀러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마자기(司馬子祺)가 간하였고, 왕은 매우 노여워했습니다. 이에, 영윤 ‘자서’(子西)가 궁전 아래에서 임금께 하례하고 말했습니다.
“지금 곧 형대로 놀이를 꼭 가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임금은 기뻐서 말했습니다.
“함께 가서 놀고 오겠습니다.”
이리하여 초나라 왕은 ‘자서’와 함께 형대를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10리쯤 갔을까요? ‘자서’는 말고삐를 잡고 말을 멈추며 임금에게 이렇게 청했습니다.
“신이 잠시 여쭐 말씀이 있는데 즐겁게 들어 주시겠습니까?”
임금이 말했습니다.
“이야기해 보십시오.”
이에, ‘자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듣자 오니 남의 신하가 되어서 그 임금에게 충성하는 자는 벼슬과 녹으로 상을 주어야 하며, 그 임금에게 아첨하는 자는 형벌을 주어야 하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데, 이번 일을 보면 ‘사마자기’는 충신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첨하는 신하입니다. 그런즉, 충성한 ‘사마자기’에게는 상을 주시고, 아첨한 신은 형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초나라 임금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마자기가 간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 말은 나 혼자만 못 놀게 하는 데 불과하고 뒷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놀아도 좋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노여워했습니다.”
‘자서’가 다시 말했습니다.
“뒷세상 사람들이 노는 것을 금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임금께서 붕어하신 뒤에 그곳에 산릉(山陵)을 만들어 놓으면 자손들이 조상의 분묘 위에서는 차마 놀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 말을 듣고, 초나라 임금은 무릎을 쳤습니다.
“그것은 참 좋은 의견입니다.”
임금은 가던 길을 중지하여 형대로 가지 않고 되돌아왔습니다. 공자가 이 소문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서의 간한 말이 정말 지극하구나. 10리 밖에 나가서 100세 뒤의 일을 억제하였구나.”
이렇듯이 공자는 이 당시만 하더라도 ‘자서’를 칭송하였습니다. 그러니 공자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객관적인 평가보다도 자기와의 연관성을 먼저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신적인 공자보다는 인간적인 공자가 훨씬 정이 갑니다.
이 당시의 일 하나가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가 노래를 부르며 공자 곁을 지나갔다. “봉이여, 봉이여, 그대의 덕은 어찌 그리 쇠하였는가! 지나간 일이야 말릴 수 없지만 앞으로 닥칠 일이야 피할 수 있을 테니. 그만두소, 그만두소. 지금의 정치하는 사람들은 모두 위태하구나.”공자가 내려서서 그와 대화를 나누려고 하였으나, 그가 빨리 피하고 말아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초광접여 가이과공자왈 봉혜봉혜 하덕지쇠! 왕자 불가간 내자 유가추 이이이이. 금지종정자 태이. 공자 하 욕여지언 추이피지 부득여지언.: 楚狂接輿 歌而過孔子曰 鳳兮鳳兮, 何德之衰! 往者 不可諫 來者 猶可追 已而已而. 今之從政者 殆而. 孔子 下 欲與之言 趨而辟之 不得與之言.)【논어 18-5】
여기에서 ‘광접여’(狂接輿), 즉 미치광이 ‘접여’는,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육’(陸)이고 이름은 ‘통’(通)이며 자(字)가 ‘접여’입니다. 이 사람은, 진짜 미친 게 아니고, 미친 척하고 천하의 무도함을 한탄하며 머리를 풀어 헤친 채로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봉’(鳳)은 ‘성군이 나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새’인 상상의 동물입니다. 수컷을 ‘봉’(鳳)이라고 하며, 암컷을 ‘황’(凰)이라고 했지요. 여기에서 ‘봉’은 공자를 지칭하였다고 합니다. 또, ‘왕자’(往者)는 ‘과거의 일’이고, ‘내자’(來者)는 ‘장래의 일’입니다. ‘이이’(已而)에서 ‘이’(已)는 ‘지’(止)의 뜻이고 ‘이’(而)는 조사입니다. 그리고 ‘태이’(殆而)에서 ‘태’(殆)는 ‘위’(危)의 뜻이며 ‘이’(而)는 앞에서처럼 조사에 불과합니다. 또한, ‘하’(下)는 ‘당에서 내려온 후에 밖으로 나감’을 가리키고 ‘추’(趨)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피’(辟)는 ‘피’(避)와 같은 뜻이라고 합니다.
‘접여’는, ‘미치광이’로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은사’(隱士)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난세를 피하여 홀로 숨어 살았습니다. 공자는 앞에서도 ‘장저’와 ‘걸익’ 등의 은사들로부터 핀잔을 들었습니다.
이때, 공자는 초나라에서 위(衛)나라로 돌아왔습니다. 이 해에 공자의 나이는 63세였으며, 그때는 노나라 ‘애공’(哀公) 6년이었다고 사마천의 ‘사기’ 중 ‘공자세가’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해에 오나라는 노나라와 ‘증’(繒)에서 회합하고, 오나라는 노나라에게 제사에 쓸 ‘백뢰’(百牢)를 너무 심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증’이란, 옛 나라 이름인데,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조장시(棗莊市)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답니다. 또, ‘백뢰’에서 ‘뢰’(牢)는 ‘제사에 쓰이는 희생’을 말합니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상공(上公)이 9뢰를 쓰고 후백(侯伯)이 7뢰를 쓰며 자남(子男)이 5뢰를 쓰게 되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오나라에서 100뢰를 요구한 일은 주례에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로, 오나라의 태재(太宰)인 ‘비’(嚭)가 노나라의 계강자(季康子)를 불렀습니다. 태자인 ‘비’는, 성이 ‘백’(伯)이고 이름은 ‘비’(嚭)입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앞에서 ‘오자서’를 설명할 때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이 납니까?
계강자는 자공을 초나라로 보내어서 응대하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제사에 쓸 가축을 바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처럼 비슷하다.”
이는, 노나라와 위나라는 원래 형제 사이의 나라인데 두 나라의 정치가 모두 땅에 떨어져 있음을 한탄한 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노(魯)나라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셋째 아들인 ‘주공’(周公)이 봉(封)함을 받은 나라이고, 위(衛)나라는 주공의 동생인 ‘강숙’(康叔)이 봉(封)함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러니 형제의 나라이지요. 그런 두 나라가 이제는 정치마저 쇠퇴하여 ‘예’의 문란함이 형제와 같게 되었습니다.
이 때, 위나라 군주인 ‘첩’(輒)의 아버지, 즉 ‘괴외’(蒯聵)는 국외로 나가서 망명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제후는 위나라 군주인 ‘첩’더러 부친인 ‘괴외’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위해야 한다고 몇 차례나 말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괴외’는 영공의 아들인데 행실이 문란한 어머니, 즉 ‘남자’ 부인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진나라로 도망갔고, 그 아들 ‘첩’인 ‘출공(出公)이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는 이미 위나라에서 벼슬을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위나라 군주인 ‘출공’은 공자에게 정사를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이 당시의 이야기가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을 맞아들여서 정치를 하게 된다면 선생님은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공자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그러자, 자로가 이렇게 반문하였다. “그렇습니까? 선생님의 생각은 너무 그 길이 구불구불 돌아서 멉니다. 어찌 명분을 먼저 바로잡는다고 하십니까?”(자로왈 위군 대자이위정 자장해선. 자왈 필야정명호. 자로왈 유시재 자지우야 해기정.: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논어 13-3】
여기에서 말하는, ‘위군’(衛君)은 위나라의 군주인 ‘출공’(出公)을 말합니다. 그리고 ‘정명’(正名)은, ‘군신부자’의 명분을 바로잡음을 말합니다. 또, ‘유시재’(有是哉)에서 ‘시’(是)는 ‘정명’을 가리킵니다. 영탄적인 표현이지요. 또한, ‘우’(迂)는 ‘우원’(迂遠)한 것을 이르는데, ‘우원’은 ‘구불구불 돌아서 먼 것’을 이릅니다.
‘논어’에서 이 대화는 계속 이어집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유야, 너는 천하고 속되구나. 군자는 모르는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이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불순하고, 말이 불순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며,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며,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면 백성은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가 명분을 바르게 하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실행하게 된다. 그러니 군자는 그 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앞의 말 중에서 ‘천하고 속되다’의 원문은 ‘야’(野)입니다. 이는, ‘잘 생각하지 않고 경솔히 함’을 이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르는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원문이 ‘궐여’(闕如)입니다. 이는, ‘알지 못하는 것을 잠깐 젖혀 놓음’을 말합니다. 또 ‘적중하지 못함’은 ‘부중’(不中)입니다. 이는, ‘공평치 않음’을 말합니다. 그 외에, ‘소홀함이 없는 것’의 원문은 ‘무소구’(無所苟)인데 ‘구차함이 없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이는, 인륜을 밝히는 게 정치의 근본임을 나타낸 말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위나라 ‘출공’은 실제 행동이 인륜에 어긋난 점이 많았습니다. 공자는 이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다음 해에 염유는 계씨(季氏)의 명을 받고 장군이 되었으며 ‘낭’(郎)에서 제나라와 싸운 끝에 크게 이겼습니다. ‘낭’은 옛 읍의 이름인데 노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의 동북쪽에 있답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가 ‘공자가어’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제나라 재상인 ‘국사’(國史)가 노나라를 공격해 왔다. 이에 계강자는 염구에게 ‘좌사’(左史)라는 직책으로 적을 막게 했다. 그리고 번지를 우사(右史)로 삼았다.
이는, 계강자가 적을 대적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모든 백성이 그를 신임하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3시간이 지나서 여러 군사가 제나라 군사의 진중으로 쳐들어가니 제나라 군사는 뿔뿔이 도망쳐 버렸다. 이 싸움에 이긴 것은 오로지 염유가 창을 잘 쓴 때문이었다.
공자는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염유는 의리에도 맞고 군법에도 어긋남이 없다.”
전쟁이 모두 끝나자, 계강자는 염유에게 물었다.
“그대는 전쟁에 대해서도 배운 일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배우지 않고서도 자연히 아는가?”
염유가 대답했다.
“전쟁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계강자가 또 물었다.
“공자를 모시고 있으면서 전쟁에 대한 일을 누구에게 배웠단 말인가?”
염유가 다시 대답했다.
“전쟁에 대한 일도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큰 성인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모르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과 무를 아울러 쓰고 겸하여 통달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전쟁에는 병졸에 대해서만 대강 들었을 뿐이고 자세히는 모릅니다.”
계강자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했다. 번지가 이 이야기를 공자에게 모두 고했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계손씨가 이제야 남의 유능한 것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구나.”』
앞에서 ‘공부’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공부는 ‘육례’(六禮)라고 말했지요. 다시 말하자면, 선비들은 ‘문’(文)과 ‘무’(武)의 공부를 병행하였습니다. 평화로울 때는 관리의 직책을 수행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장군의 직책을 수행하였습니다.
‘공자세가’를 보면, 계강자와 염유의 대화가 더 이어져 있습니다. 계강자가 염유에게 물었습니다.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이에, 염유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을 등용하면 나라의 명성이 높아집니다. 선생님의 정치 방법은 백성들에게 시행하거나 신명에게 고하거나 간에 아무런 유감스러운 일이 결코 없을 겁니다. 선생님에게 나와 같은 이 길을 걷게 한다면 비록 수천 ‘사’(社)를 준다고 해도 선생님은 그 이익을 취할 분이 아니십니다.”
‘사’(社)에 대한 설명은 앞에서 한 적이 있지요? 25가구(家)가 1리(里)입니다. 1리에 1사를 설치했으니, 1000사는 25,000가구입니다.
그러자, 계강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공자를 초빙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그 말을 듣고, 염구는 힘주어 말했습니다.
“선생님을 부르고자 하신다면 선생님을 신임하시고 소인들이 선생님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셔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공자는 어디에 머물고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위(衛)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위나라의 공문자(孔文子)는 장차 태숙(太叔)을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공문자’는 위나라의 대부로 ‘괴외’의 누나를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의 성은 ‘공’이고 이름은 ‘어’(圉)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공이 물었다. “공문자는 어째서 ‘문’(文)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민첩하여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시호를 ‘문’이라고 하였다.”(자공 문왈 공문자 하이위지문야. 자왈 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지문야.: 子貢 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논어 5-15】
여기에서 ‘문자’는 그의 시호(諡號)입니다. ‘시호’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행해진 제도인데, 그 사람의 평생 업적과 인품을 참작해서 그에 알맞은 시호가 붙여졌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시호’는 사후에 내리는 명칭으로서 왕이나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그 시호를 보면 그 사람의 생전에 행한 업적과 인격을 짐작할 수 있었답니다.
‘시법해’(諡法解)에서는, 어떤 인물에 어떤 시호가 붙여지는가에 대한 ‘법칙’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호’ 중에서 ‘문’(文)이라는 시호는 최상에 속했다고 합니다. 즉, ‘천지’(天地)를 경위(經緯)하는 것, 도덕(道德)이 박후(博厚)한 것, 배움에 열심이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 백성을 어여삐 여기고 예를 존중하는 것, 백성들에게 작위(爵位)를 주는 것 등을 ‘문’(文)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면 공문자는 어떤 위인이었을까요? 앞에서, 그는 ‘괴외’의 누나를 아내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괴외’의 누나는 위나라 영공의 맏딸인데 그 이름이 ‘백희’(伯姬)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이름이라기보다는 ‘맏딸’을 지칭하지요. 공문자와 백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름은 ‘공회’(孔悝)입니다. 이 사람 이름은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이 사람을 자로가 섬겼는데, 이 사람 때문에 자로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한 마디로, 최고의 시호를 받은 ‘공어’(孔圉), 즉 공문자는 그러한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는 게 세간의 평이었을 성싶습니다. 그래서 자공이 그렇게 물었던 모양입니다.
‘좌전’에 의하면, 노나라 애공(哀公) 11년 겨울, 공자는 위나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68세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 당시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위(衛)나라의 태숙(太叔)인 호남자 ‘질’(疾)은 송(宋)나라 자조(子朝)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숙 ‘질’은 부인을 따라온 그녀의 여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또 엉뚱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조’가 위나라를 떠나서 송나라로 돌아가자, 위나라의 공문자가 태숙 ‘질’로 하여금 ‘자조’의 딸인 그 부인과 강제로 이혼하도록 한 다음에 자기의 딸인 ‘공길’(孔姞)과 다시 결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공문자는 태숙 ‘질’을 전부터 사위로 점찍어 두었던 듯싶습니다.
그러나 태숙 ‘질’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이혼한 부인의 여동생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은 자기의 부하들을 시켜서 그 여자를 몰래 데려다가 별궁을 짓고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공문자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질’을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장인이 사위를 공격하려고 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 일에 대한 ‘공자가어’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위나라 공문자는 태숙 ‘질’을 부추겨서 본처를 내쫓게 한 후, 자기의 딸을 태숙 ‘질’의 아내로 삼게 했다. 그리고 태숙 ‘질’은 자기 본처의 동생을 꾀어서 역시 자기의 아내를 삼았다. 결국 공문자의 딸과 함께 두 아내를 두었다. 이를 알고 공문자는 노하여 곧 태숙 ‘질’을 치려고 했다.
이 무렵, 공자는 위나라 거백옥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있었다. 문자는 공자를 찾아가서 자기의 계획을 상의했다. 그의 말을 듣고, 공자는 말했다.
“나는 제사 지내는 일은 일찍이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남을 치는 일은 듣지 못했습니다.”
문자가 돌아가자, 공자는 수행자에게 말했다.
“새는 나무를 가려서 앉을 수 있으나, 나무야 어찌 새를 가려서 앉게 할 수 있다는 말이냐?”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문자는 공자를 만류하였다.
“제가 어찌 사사로운 일을 꾀하겠습니까?”
문자는 위나라 화란(禍亂)을 방지할 계책을 공자에게 물었다.』
그 이후의 일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공문자가 태숙 ‘질’을 치려고 하자, 공자가 말렸습니다. 이에, 공문자는 자기의 딸인 ‘공길’을 데려오고 말았습니다. 그 후, 태숙 ‘질’은 민심을 잃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위나라를 떠나서 송(宋)나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었으니, 위나라 사람들은 태숙의 자리에 ‘질’의 동생인 ‘유’(遺)를 세웠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공문자는 자기 딸 ‘공길’을 다시 ‘유’에게 시집보냈습니다.
그리고 공문자가 죽으니, 그의 부인이었던 ‘백희’(伯姬)는 젊고 잘생긴 ‘혼량부’(渾良夫)와 정을 통하였고, 그 어리석은 ‘혼량부’를 이용하여 ‘괴외’가 자기 아들인 출공을 축출하고 위나라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자공이 공문자의 ‘문’이라는 시호에 대해 의문을 품었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자공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아주 의외였습니다. 공자의 공문자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관대하였습니다. 공자는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가 외면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결과보다는 그 내면적 삶의 원칙을 존중했습니다.
마침내 계강자는 ‘공화’(公華)와 ‘공빈’(公賓)과 ‘공림’(公林)을 내쫓아 버리고 예물을 갖추어서 공자를 초빙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 만에 노나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요. 이때는, 공자의 나이가 68세 되던 해의 10월이었습니다. 얼마나 감회가 깊었을까요?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올 때의 모습이 ‘공자가어’에는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공자가 돌아올 때였습니다. 공자는 ‘하수’(河水) 다리에서 수레를 멈추고 발밑의 물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물의 깊이는 30길이나 되고, 흐르는 둘레는 90리나 되었습니다. 물고기도 다니지 못하고 큰 자라도 살지 못하는, 깊고 위험한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한 젊은이가 오더니 위험을 무릅쓰고 그 물을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공자는 사람을 시켜서 언덕으로 간 다음에 그를 향하여 크게 외치도록 하였습니다.
“이 물은 깊이가 30길이나 되고 흐르는 둘레는 90리나 되는데, 물고기와 큰 자라도 살지 못하니 건너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들은 척도 않고 물을 무사히 건너갔습니다. 공자는 의아하여 그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용합니다. 무슨 도술이라도 지녔소?”
그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처음 물에 들어갈 때도 충신(忠信)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들어갔고 물을 건너고 나온 지금도 오직 충신을 생각하는 마음뿐입니다. 나는 이 충신의 마음만 가지고 물을 건넜으며, 어떤 도술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실도 반드시 기록해 두어라. 물을 건너는 것 또한 충신의 마음으로 했기 때문에 위험이 없어졌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게 있겠느냐?”
어쨌든, 이렇게 되어서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고, 노나라에서는 공자를 나라의 원로로서 대접했습니다. 즉, 국로(國老)로 예우했답니다. ‘국로’는 나라의 ‘경’(卿)이나 대부 벼슬을 지낸 높은 사람들에게 예의로써 대우해 주는 제도라고 합니다. 공자는 말했습니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 음악이 바로잡히고 ‘아’(雅)와 ‘송’(頌)이 제각기 자리를 찾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는 ‘조정의 무악(舞樂)’을 가리키고, ‘송’은 ‘종묘(宗廟)의 무악’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또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높이 지은 집 하나
지붕이 아예 없으니 오히려
맑고 밝은 달빛이 정답게 내려앉는다.
그분 쪽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앉으니
고운 손길이 바닥을 가볍게 쓰다듬는다.
한꺼번에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져도
그치면 보송보송 잘 마르는 자리
때로는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도
숭숭 뚫린 구멍으로 모두 빠져 버리니
가난한 그 집엔 아무런 근심이 없다.
지금은 누구든지 와서 편히 머물다 가라고
비워 놓고 떠난 집
별빛들이 내려와서 하룻밤을 묵는다.
미루나무 많은 잎들이 소곤거리는 소리
가물가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저 먼 북극성과 남극성도 같이 잠든다.
- 졸시 ‘비워 놓은 까치집’ 전문
높은 미루나무 꼭대기에 까치집이 하나 있습니다. 까치 한 쌍이 살다가 비워 놓고 떠난, 빈집입니다. 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이 그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이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빈 까치집에 명분을 부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명분’(名分)은 ‘명의라든가 신분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도의상의 본분’ 또는 ‘표면상의 이유나 구실’을 나타냅니다. 즉, 그 쓸모없는 빈 까치집에 ‘누구든지 와서 편히 머물다 가라는’ 명분을 부여하니, 그 까치집이 더없이 환한 등불처럼 내걸리게 됩니다. 그렇듯 ‘명분’은 중요합니다.
위(衛)나라 출공(出公)이 공자에게 정사를 맡기려고 하였을 때,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를 하시게 된다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공자는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자로는 ‘선생님의 생각은 너무 그 길이 구불구불 돌아서 멉니다. 어찌 명분을 먼저 바로잡는다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말에 공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유야, 너는 천하고 속되구나. 군자는 모르는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이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불순하고, 말이 불순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며,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며,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면 백성은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가 명분을 바르게 하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실행하게 된다. 그러니 군자는 그 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요. 무엇이든지 명분을 잃으면 만사가 끝나 버리고 맙니다.(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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