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21. 이제는 누가 욕해도 화가 안 난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1. 31. 07:51

21
이제는 누가 욕해도 화가 안 난다





 노나라 애공(哀公) 3년, 공자는 60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공자가 스스로 자기 일생을 구분해서 말한 바로 그 ‘이순’(耳順)의 나이입니다. ‘이순’은 글자 그대로 ‘귀가 순해진다.’라는 뜻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아무리 듣기 싫은 말을 들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원만한 감성’을 지녔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요.
 그해 여름, 노나라에서 ‘환공’과 ‘희공’의 묘에 불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가 ‘공자가어’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사탁’(司鐸)이라는 벼슬을 지닌 관리가 공자에게 와서 말했다. 
“종묘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불이 탄 사당은 필시 ‘환공’과 ‘희공’의 사당일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진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물었다.
“무엇으로 그 사실을 아십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예에 보면, 공(功)이 있는 임금은 ‘조’(祖)라고 되어 있으며 덕(德)이 있는 임금은 ‘종’(宗)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사당은 헐어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제 ‘환공’과 ‘희공’으로 말하면 가까운 촌수도 지났고 또 그 공덕이 사당을 둘 만한 경우도 못 되는 터인데, 노나라에서는 이것을 아직 헐어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이 재앙을 내려서 없애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답이 있고 난 후에 3일이 지나자, 노나라 사자가 와서 전했다.
“환공과 희공의 사당이 불탔습니다.”
진나라 임금은 이 말을 듣고, 자공에게 말했다.
“내가 이제야 성인이 귀하다는 것을 알았소.”
자공이 그 말에 이렇게 답했다.
“알았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도를 오로지 믿고 그 덕화(德化)를 행하여 착하게 행동하느니만 못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중에 보면, ‘환공’(桓公)과 ‘희공’(僖公)의 묘에 난 불은, ‘남궁경숙’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껐다고 합니다. ‘남궁경숙’(南宮敬叔)은 알고 있지요? 공자의 제자이고, ‘맹의자’의 형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공자의 조카사위인 ‘남용’(南容)이라고도 합니다. 참으로 ‘남용’이라는 사람은 알쏭달쏭합니다. 또 하나의 설은, ‘남용’이 ‘남궁자용’(南宮子容)의 약칭이라고 주장합니다. 성은 ‘남궁’이고 이름은 ‘괄’(适)이며 별명이 ‘도’(縚)이고 자(字)는 ‘자용’(子容)이라고 하지요. 
 그해 가을에는 노나라의 세력가인 계환자(季桓子)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마차에 올라서 노나라의 도성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전에 이 나라는 거의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뒤를 이을 ‘강자’(康子)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노나라의 정권을 이어받게 된다. 그렇게 되거든 꼭 공자를 초청해 오도록 하여라.”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계환자가 죽고 계강자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계강자는 장례의 절차를 모두 끝낸 뒤에 공자를 노나라로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노나라 대부인 ‘공지어’(公之魚)가 말했습니다.
 “지난날에 정공께서 그를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여 결국은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또 그를 등용하려다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면 다시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계강자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초빙해야 옳겠소?”
 공지어가 말했습니다.
 “공자 대신으로 그 제자인 ‘염구’(冉求)를 부르십시오.”
 이에, 계강자는 사람을 보내어서 ‘염구’를 불렀습니다. 염구가 초빙에 응하려고 공자에게 가서 하직 인사를 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노나라 사람들이 ‘구’를 부르는 것을 보니, 이는 작게 쓰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크게 쓰려는 것이다.” 
 이 말 중에서 ‘작게 쓰려는 것’은 ‘염구의 쓰임’이요, ‘크게 쓰려는 것’은 바로 ‘공자의 쓰임’을 말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다음에 공자가 한 말은, ‘논어’의 공야장(公冶長) 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나라에서 공자가 말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우리 고장의 젊은이들은, 어떤 일에 미친 듯이 파고들지만 쉬운 듯이 엉성하여, 아름다운 문채는 이루었으나 마름질할 줄을 모른다.”(자 재진 왈 귀여 귀여! 오당지소자 광간 비연성장 부지소이재지.: 子 在陳 曰 歸與 歸與! 吾黨之小子 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논어 5-22】

 앞의 말 중에서 ‘귀여’(歸與)는 ‘돌아가자’라는 뜻으로 영탄의 정을 나타냅니다. 또, ‘오당지소자’(吾黨之小子)는, ‘우리 향당의 젊은이들’을 말합니다. ‘소자’(小子)는 곧 ‘제자’를 이릅니다. 그리고 ‘광간’(狂簡)에서 ‘광’은 ‘미친 듯이 파고드는 것’으로 ‘진취적 기상’을 나타내며, ‘간’은 ‘쉬운 듯이 엉성한 것’으로 ‘조략한 행위’를 가리킨다고 여겨집니다. 그런가 하면, ‘비연’(斐然)은 ‘비단 무늬처럼 아름다운 모양’을 가리키고 ‘성장’(成章)은 ‘문채를 이루는 것’으로 ‘볼 만한 것이 있음’을 이릅니다. 그리고 ‘재’(裁)는 ‘마름질하다’를 이릅니다.
 이는, 공자가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전념하여 도를 후세에 전하려는 결심이 담긴 말입니다. 진정으로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가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그 가슴에 가득하였습니다. 공자의 그러한 마음을 눈치 빠른 자공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자공은 염구를 전송할 때 귀띔을 전했습니다.
 “곧 등용되면 선생님을 모셔가도록 힘써 주시오.”
 공자가 61세가 되던, 다음 해의 여름이었습니다. 공자는 3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던 진(陳)나라에서 채(蔡)나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채나라에 1년 정도 머물렀다가, 공자는 다시 채나라에서 ‘섭’(葉)이란 땅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에 초(楚)나라는, 제후로서 ‘공’(公)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왕’(王)이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즉, 초나라는 힘이 강해지자, 제후국인데도 불구하고 왕을 참칭했습니다. 그렇기에 초나라의 왕은 초나라의 대부인 심제량(沈諸梁)을 ‘섭’이란 땅의 주인으로 삼으면서 ‘섭공’(葉公)이라고 불렀습니다. ‘섭’은 지금의 ‘하남성 섭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심제량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정치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말했습니다.
 “정치란, 먼 데 있는 사람을 찾아오게 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심제량은 공자를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에 섭공은 자로에게 ‘공자의 사람됨’을 물었습니다. 이 이야기 또한, ‘논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할까요?

 ‘섭공’이 공자의 사람됨을 물었는데, 자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다. “너는 왜 말하지 못했는가? 그 사람됨이, 성이 났을 때는 밥 먹는 일도 잊고 즐거울 때는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며 늙어 가는 것마저 모른다고.”(섭공 문공자어자로 자로 불대, 자왈 여 해불왈기위인야 발분망식 낙이망우 부지로지장지운이.: 葉公 問孔子於子路 子路 不對, 子曰 女 亥不曰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논어 7-18】

 ‘섭공’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섭 땅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그 사람의 성은 ‘심’이고 이름은 ‘제량’입니다. 자(字)는 ‘자고’(子高)라고 한답니다. ‘해불언’(亥不言)은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라는 반어형이지요. 그런데 ‘발분’(發憤)이라는 단어의 풀이가 구구합니다. 어느 사람들은 ‘발분’을 ‘지식을 채우지 못해 속으로 분발하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분’(憤)은, 그저 그 뜻 그대로 ‘분하다’ 또는 ‘성내다’로 풀이하는 게 옳을 성싶습니다. 그래서 ‘발분’은 ‘성을 낼 때’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공자의 솔직함이 마음에 듭니다. 성이 났을 때는 밥도 안 먹고 기쁠 때는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공자입니다. 그에게 위선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습니다.
 그 며칠 뒤에,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귄 사람들 가운데에 그 몸가짐을 곧고 바르게 하여 조금도 굽힘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남의 집에서 기르는 염소를 도둑질하였는데, 자식인 그는 그 사실을 당국에 고발하고 증언해 주었습니다. 자식으로서 가장 가까운 아버지의 악행을 숨기지 않을 정도이니 이는 아주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중에 몸가짐을 곧고 바르게 가지는 사람은 이와는 다릅니다. 아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그 잘못을 감추어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으면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그 잘못을 감추어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합니다. 부자가 서로 감추어 주는 것은 일견 바르지 못한 듯이 보이지만 이는 인정의 지극함입니다. 고의로 곧음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연히 인정에 따라 서로 숨기는 가운데 곧음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무엇보다 부자간의 정을 더 소중히 여기는 휴머니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자는 ‘섭’ 땅도 오래 있을 곳은 못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섭’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노나라 애공 4년, 공자의 나이 63세였을 때였습니다. ‘섭’을 출발하여 채(蔡)나라로 돌아오는 중에, 공자 일행은 나루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자가 수레를 타고 흔들거리면서 가다가 보니, 마침 길가의 밭에서 두 농부가 땅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저와 걸익이 나란히 서서 밭을 갈고 있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자로에게 그들에게 나루터 있는 곳을 물어보게 하였다. 장저가 물었다. “저 수레의 말고삐를 잡은 사람이 누구요?”자로가 대답했다. “공구올시다.”(장저 걸익 우이경 공자 과지 사자로 문진언 장저왈 부집여자 위수. 자로왈 위공구.: 長沮 桀溺 耦而耕 孔子 過之 使子路 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 爲誰. 子路曰 爲孔丘.)【논어 18-6】
 
 이 이야기는 길게 이어집니다. 그다음부터는 풀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장저(長沮)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사람이 노나라의 공구인가요?”
 자로가 대답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자, 장저는 말했습니다.
 “노나라 공구라면 나루터쯤은 알고 있을 테지요.”
 장저는 이 말만 하고, 나루터를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하는 수 없이, 자로는 걸익(桀溺)에게로 가서 똑같이 물었습니다. 걸익이 말했습니다.
 “그대는 누구요?”
 자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중유라고 합니다.”
 걸익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노나라 공구의 제자인가요?”
 자로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듣고, 걸익은 말했습니다.
 “큰물이 도도하게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어지럽고 무도한 천하를 구제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 어디로 가나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런데 당신의 스승은 도대체 누구와 힘을 합하여 이런 난세를 태평스러운 세상으로 바꾸겠다는 겁니까? 쓸데없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당신들은, 사람을 피하는 공자를 따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나를 따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치며, 그는 모르는 체하고 다시 밭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자로는 더 이상 무어라고 물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자로는 돌아와서 공자에게 그동안의 모든 일을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 말을 모두 듣고, 공자는 길게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을 피하여 산다고 하더라도, 새나 짐승과 한데 어울려서 살 수야 있겠느냐? 천하 사람들과 같이 살지 아니하고 대체 누구와 함께 살겠느냐? 결국에 인간사회 이외에는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오늘날처럼 세상에 도가 쇠퇴해 있을수록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들을 이끌어 주어야만 한다. 만약 천하에 도가 있었던들 내가 굳이 세상을 구제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그때의 또 한 이야기가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이니, 그 이야기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로가 공자를 따라가다가 뒤떨어졌다. 그리고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지팡이를 짚고 삼태기를 걸머지고 있었다. 자로가 그에게 물었다. “영감님께서는 공자님을 보셨습니까?”그 노인은 말했다. “손발을 부지런히 놀리지 않고 오곡을 분간하지 못하니 누가 선생이라고 하겠습니까?”(자로 종이후 우장인 이장하조 자로 문왈 자견부자호. 장인왈 사체불근 오곡불분 숙위부자.: 子路 從而後 遇丈人 以杖荷篠 子路 問曰 子見夫子乎. 丈人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논어 18-7 일부】

 그 이후의 이어진 이야기도 계속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다음, 그 노인은 지팡이를 땅에 꽂고 잡초를 뽑았습니다. 자로는 두 손을 마주 잡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자로를 묵어가게 한 후에 닭을 잡고 수수밥을 지어서 대접하였으며, 두 아들까지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이튿날, 자로가 떠나와서 이 일을 고하니, 공자가 말했습니다. 
 “은자(隱者)로다.”
 공자는 자로로 하여금 되돌아가서 그를 만나도록 하였는데, 자로가 그 곳으로 가니 그는 벌써 떠나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자로는 그 집의 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벼슬살이를 지내지 않고 있는 것은 의롭지 못하오. 어른과 아이의 예절도 없앨 수 없는데,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어떻게 없앨 수 있겠소?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다가 큰 인륜을 어지럽히니,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자기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오. 정도가 행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하’(荷)는 ‘둘러메다’를 이르고 ‘조’(篠)는 ‘대로 만든 삼태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오곡’(五穀)은 ‘벼와 기장과 보리와 콩과 피’를 말한답니다. 또, ‘불분’(不分)은 ‘구별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며 ‘숙’(孰)은 ‘수’(誰)와 같게 쓰인다고 합니다.
 또한, ‘지팡이를 땅에 꽂고 잡초를 뽑는 것’을 원문은 ‘식기장이운’(植其杖而芸)이라고 했지요. 여기에서 ‘식’(植)은 ‘세움’이나 ‘꽂음’을 가리키고 ‘운’(芸)은 ‘풀을 뽑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서 있는 것’을 ‘공이립’(拱而立)이라고 합니다. 바로 ‘공’(拱)은 ‘두 손을 모아서 잡음’을 이릅니다. 
 이 이야기는, 원래의 ‘논어’에는 없었던 내용이고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공자는 ‘은일사상’(隱逸思想)을 그리 좋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노장사상’(老壯思想)이 끼어들었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공자와는 달리, 깊은 산골에 숨어 살든지 밭이나 갈면서 이름 없이 사는 선비들이 많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공자는 ‘은자’(隱者)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삶이 결코 세상을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 나름의 멋진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시기적으로 어느 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은자’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여기에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미생무(微生畝)라는 사람이 대뜸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골똘하게 애쓰고 있는가? 혹시 입술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게 아닌가?”
말투로 보아서 ‘미생무’는 공자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일 듯싶은 느낌이 듭니다.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감히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완고한 사람들의 마음을 고쳐 놓으려고 할 뿐입니다.”
 공자의 이 말은, ‘은자’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여실히 밝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 어두운 세상일수록 ‘외면’보다는 ‘참여’가 옳다고, 공자는 확신했습니다. ‘미생무’는 ‘미생묘’라고도 읽습니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미생회’(尾生晦)라고도 씌어 있습니다.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공자를 보고 ‘구’(丘)라고 불렀다니, 이 사람은 치덕(齒德)이 높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논어’ 중의 ‘헌문’ 편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주(註)에서는 ‘미생무’(微生畝)의 ‘미생’은 성이고 ‘무’는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논어’의 ‘공야장’ 편에는 ‘미생고’(微生高)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미생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의 자(字)가 ‘고’(高)일 듯싶습니다. 이 사람도 ‘은자’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남을 도와주기 위해 ‘내게 없는 것은 없다고 거절하지’ 않고 남에게서 얻어 주는 갸륵한 마음을 지녔답니다. 일설에, ‘미생고’는 원래 융통성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다는군요. 그는 여자하고 다리 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기다렸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서 냇물이 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물이 넘치게 됨으로써 끝내는 그 물에 빠져서 죽었다고 전합니다.
 또, 이 이야기도 그 당시의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상황이 비슷하기에 여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자로가 일행과 떨어진 후에 석문(石門)에서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문지기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디에서 오시었소?”
 자로가 대답하였습니다.
 “공씨 집에서 왔소.”
 그 말을 듣고,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굳이 하려는 그 사람이겠구먼.” 
 이 이야기는 ‘논어’ 중의 ‘헌문’ 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석문’(石門)은 ‘지명’인데, ‘노나라의 성문 밖’이라고도 합니다. ‘문지기’를 ‘논어’에서는 ‘신문’(晨門)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직명’이고 ‘문지기’일 뿐만 아니라 ‘문을 여닫는 일’에도 종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은자’였다는군요. 당시에 ‘은자’들은 대체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직책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했답니다. 자, 그러면 또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착하게 그림자를 접으면
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하다.

나무는 달빛 아래에서
달팽이와 나란히 잠든다.

바람 소리를 베개 삼아
서서도 눕고
누워서도 서며
저절로 흐르는 길을 꿈꾼다.

세상에서 가장 적막한 밤에
큰 너그러움의 나라에 닿는다.
- 졸시 ‘꿈꾸는 길’ 전문

 문득, 공자가 위(衛)나라에 있을 때, ‘삼태기를 지고 걸어가는 노인’이 공자가 치는 ‘경’(磬) 소리를 듣고 읊던 시가 생각납니다. 
 “내를 건널 때 물이 깊으면 옷을 입은 채로 건너는 것이 옳다. 그리고 냇물이 얕으면 입은 옷을 조금만 걷고 건너면 그만이다.”
 그리고 공자는 ‘번지’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선비는 그 나라에 도가 있으면 충성스럽게 임금을 도와서 일하지만 그 나라에 도가 없으면 물러가서 화를 피하는 법이다.”
 그런데 바로 그 당시는, 도가 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소위 ‘은자’(隱者)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장저’와 ‘걸익’이 모두 그런 사람이겠지요. ‘걸익’이 ‘자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도한 물결에 온 천하가 모두 휩쓸려 있는데, 이를 누구의 힘으로 바꾸겠소? 그러니 당신은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세상을 피하는 우리를 따르는 게 어떻겠소?” 
 그런데 이에, 공자는 초심을 잃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을 피하여 산다고 하더라도 새나 짐승과 한데 어울려서 살 수야 있겠느냐? 더구나 오늘날처럼 세상에 도가 쇠퇴해 있을수록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들을 이끌어 주어야만 한다. 만약 천하에 도가 있었던들 내가 굳이 세상을 구제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사람이란 이렇듯 그 모두가 ‘자기중심’입니다. 처지에 따라 모든 생각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달라지게 마련이지요. 이를 두고,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이라고 하겠지요. 공자가 이럴 정도이니, 요즘 정치인들이 밥 먹듯이 하는, ‘자기가 한 말의 뒤집기’를 그리 탓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공자에게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자의 이런 면이 더욱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만듭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버리면 착해집니다. 그리고 착하게 그림자를 접으면 ‘큰 너그러움의 나라’에 닿을 수가 있습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