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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세 가지로 나를 돌아본다
공자에게 많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논어’를 읽다가 보면, 그 수많은 제자 중에서 특별히 ‘유자’(有子)와 ‘증자’(曾子)라고 불리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더러는 이 두 사람이 ‘공자’나 ‘맹자’와 같은 반열에 드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의아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유자’나 ‘증자’는 그렇듯 대단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저 ‘유 선생님’이나 ‘증 선생님’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만 ‘논어’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가요? 이는, ‘논어’를 다룬 사람들이 특히 그 두 사람의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유자’는 ‘유약’(有若)이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자(字)는 ‘자유’(子有)이지요. 공자보다 43세가 아래입니다. 노나라 사람입니다. 736년인 당나라 때에 ‘변백’(汴伯)으로, 그리고 1009년인 송나라 때에 ‘평음후’(平陰侯)로 추봉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공자가어’의 ‘제자해’에서는 ‘유약’을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유(子有)이고 공자보다 36세가 적었으며, 사람됨이 강직하고 아는 게 많았으며 옛 도(道)를 좋아했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논어’에 실려 있는, ‘유약’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할까요?
유자가 말했다. “그 사람됨이 효도하고 공겸하면서 어른에게 거스르기를 좋아하는 이가 적으니, 어른에게 거스르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이는 지금까지 없었다.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근본이 서면 나아갈 도가 생기게 된다. 효도와 공경은 그 인의 근본이다.”(유자왈 기위인야 효제 이호범상자 선의 불호범상 이호작란자 미지유야. 군자 무본. 본립이도생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有子曰 其爲人也 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 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논어 1-2】
여기에서 말하는, ‘효제’(孝弟) 중 ‘효’는 ‘아들로서 어버이를 지성껏 섬기는 것’을 말하고, ‘제’(弟)는 ‘제’(悌)와 같이 ‘형이나 어른을 공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범상’(犯上)은 ‘윗사람을 거스르는 것’으로 ‘저항함’을 이르고, ‘선의’(鮮矣)는 ‘지극히 적음’으로 ‘거의 없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또, ‘작란’(作亂)은 ‘도리에 어긋난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며, ‘미지유야’(未之有也)는 ‘지금까지 있는 예가 없다.’라는 뜻으로 ‘결코 없다.’라는 강한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무본’(務本)은 ‘근본에 힘을 씀’을 말하는데, ‘무’(務)는 ‘전력함’을 뜻하지요. 그리고 ‘도’(道)는 ‘사람이 걸어갈 길’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수단과 방법’의 뜻으로, 뒤에 오는 ‘인’(仁)과 서로 호응한다고 합니다. ‘여’(與)는 단정을 주저하는 ‘의문조사’로 ‘~라고나 할까?’이고 ‘야자’(也者)는 ‘~라는 것은’이라고 새기며 위의 말을 무겁게 제기하는 어법이라고 합니다.
이는, ‘효와 제가 인간의 가장 높은 도덕인 인의 근본이다.’라는 말을 나타냅니다.
‘유약’의 특징이라면, 무엇보다도 그 생김새가 공자를 아주 빼닮았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여러 제자가 ‘유약’을 스승 대신으로 섬기자고 제안했던 이유도, 그의 생김새가 공자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슷한 연배이면서 여러 제자를 거느렸던 증삼(曾參)이 거칠게 반대하였으므로, 그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답니다. 처음에, 공자를 닮은 ‘유약’을 공자 대신으로 섬기자고 제안한 제자들은 ‘자하’와 ‘자장’과 ‘자유’ 등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증삼’이 말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선생님의 덕성은 ‘맑은 물’로 씻는 것과 같고 ‘가을볕’으로 익히는 것과 같은데, 거기에 구질구질하게 무엇을 덧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로써 ‘유약’과 ‘증삼’은 두 그룹 사이의 팽팽한 경쟁 관계에 있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제자들은 ‘질세라’하고 그 두 사람을 ‘유자’와 ‘증자’로 높여서 기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예기’ 중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증삼’이 말했습니다.
“안자는 예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안자’(晏子)는 제(齊)나라의 현자(賢者)인 ‘안영’(晏嬰)을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앞에서 이 사람에 대해 기술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에서의 언급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유약’이 이렇게 반론을 폈습니다.
“안자는 여우 가죽옷 하나로 30년을 입었으니 이는 자신에게 절약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버이 장례에는 수레 한 대만을 썼으니 이는 어버이에 관한 절약함이다. 예법에 매장이 끝난 후에는 손님들을 대하는 절차가 있다. 그런데 안자는 이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는 손님들에게 예를 생략하였다고 본다. 이것만 보더라도 어찌 안자가 예를 안다고 하겠는가?”
당시 예법에서 어버이 장례 때에는 수레 다섯 대를 써야 하고 손님들을 전송하는 일도 꼭 해야 했기 때문이랍니다.
이에 ‘증삼’이 다시 말했습니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 군자는 완비한 예의 행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바니, 나라가 사치하면 검소함을 보이고, 나라가 검소하면 예를 갖추어서 행하는 일을 보여야 한다.”
‘안자’의 행위를 두고, 이렇듯 두 사람은 반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또, 이런 내용이 ‘열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약’이 스승인 ‘공자’를 대신해서 섬김을 받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유약’에게 물었습니다.
“옛날 선생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실 때 저에게 우산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서 과연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묻자, 선생님께서는 ‘시에 이르기를 달이 필(畢)의 별에 걸리면 많은 비가 내린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때는 ‘상구’(商瞿)가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도 자식이 없자, 그 어머니가 새 며느리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선생님께서는 그를 제나라로 심부름을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상구의 어머니는 그 심부름을 뒤로 미루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에 선생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구는 마흔이 넘으면 반드시 아들을 두게 될 겁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로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감히 묻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를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선생님’은 모두 ‘공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유약’은 이 질문을 받고도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답니다. 그러자, 어느 제자가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약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시오. 그곳은 당신이 앉아 있을 자리가 아니오.”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선비라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런 행동을 했을 리는 만무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면 ‘논어’에 실려 있는 ‘유약’의 말을 살펴보도록 할까요?
“예를 운용함에는 화(和)가 귀중하다. 선왕의 도는 이로써 아름다웠던 것으로, 크고 작은 일에 모두 이를 따라 했다. 그러나 행해지지 못할 것이 있으니, 화(和)가 좋은 줄만 알고 예로써 절제할 줄 모르면 또한 행해지지 않는다.”
이는, ‘조화는 예를 행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덕이지만 자칫하면 친압하여 문란해지기 쉽기에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조절함이 중요하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예지용화위귀’(禮之用和爲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예의 운용에는 순화시켜서 조화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 유약의 말입니다.
“약속은 의리에 가까워야 말대로 실천할 수가 있고, 공손함은 예의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할 수가 있으며, 의지함은 친함을 잃지 않아야 그를 존경하고 받들 수 있다.”
이는, ‘언행 교제에 있어서 처음을 삼가고 나중을 생각하라.’라는 교훈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저지르게 됨으로써 후회하게 된다.’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약속은 의리에 가까운 것’의 원문은 ‘신근어의’(信近於義)이고, ‘그 말을 이행할 수가 있음’의 원문은 ‘언가복’(言可復)입니다.
한번은 노나라 군주인 애공(哀公)이 ‘유약’에게 물었습니다.
“올해는 흉년으로 국가의 비용이 모자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유약’이 대답했습니다.
“어찌 철법을 쓰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철’(徹)이란 ‘통한다.’ 또는 ‘균등하다.’라는 뜻이랍니다. 주(周)나라 당시에 백무(百畝)를 불하하여 우물과 농로수를 함께 쓰는 사람들이 균등하게 배분해서 수확의 10분의 9는 본인들이 갖고 10분의 1은 국가에게 지불한다는 제도가 있었답니다. 바로 이런 제도를 ‘철’이라고 하였지요. 다시 말해서 ‘철’은 ‘1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유약’은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면 되지 않겠느냐?’라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애공이 반문하였습니다.
“10분의 2도 부족한데, 어떻게 10분의 1의 철법을 쓰겠습니까?”
이에 ‘유약’이 힘주어 말했습니다.
“백성이 풍족하면 군주가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이 풍족하지 못하다면 군주가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겠습니까?”
‘유약’의 이 말은, ‘백성들이 부유해지는 것은 곧 군주가 부유해지는 것’이고 ‘백성이 가난해지면 군주도 가난해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보면, ‘유약’은 그 모습뿐만 아니라 그 생각도 공자와 아주 닮았다고 여겨집니다.
‘공자가어’에는 ‘유약’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때인가, ‘유약’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같은 성씨라면 그 대우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모두 높이는 도의가 있는 까닭에 아무리 나라의 임금일지라도 백 세대를 지내도록 그 친척을 없애 버리지 않는다. 이는 친하게 함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또는 아무리 한 족속으로 친절하다고 할지라도 감히 임금에게 친하게 할 수 없는 것은 겸양하는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공자의 말은 늘 새겨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 따라 공자의 대답이 아주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요? 사실은, ‘유약’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으로 해두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증자’는 ‘증삼’(曾參)을 가리킵니다. 남무성(南武城) 사람으로 자(字)는 ‘자여’(子輿)이고, 공자보다 46세가 아래였다고 합니다. 668년인 당나라 때에 ‘태자소보’(太子少保)로, 739년에는 ‘성백’(郕伯)으로, 1267년에는 ‘성국공’(郕國公)으로, 그리고 1330년인 원나라 때에는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으로 추봉되었습니다.
‘공자가어’의 ‘제자해’에는 ‘증삼’에 대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증삼’은 무성 사람으로 자는 ‘자여’이다. 공자보다는 46세가 적었다. 제나라에서 그를 불러서 ‘경’을 삼고자 하였으나 그는 나가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늙은 부모를 모시고 있다. 이제 만일 남의 녹을 먹게 되면 멀리해야 할 터이니 그런 일을 차마 하지 못한다.”
계모 밑에서 구박당했으나, 그는 여전히 변치 않고 잘 봉양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부모의 아침상에 나물을 덜 익게 삶아서 내놓았다고 하여 그는 내쫒기로 작정했다. 이를 보고 남들이 이렇게 말하며 만류했다.
“그만한 일로 아내를 내쫓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이에 ‘증삼’은 말했다.
“나물을 삶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인데도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모에게 봉양을 못 하니 하물며 더 큰 일에 있어서야 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아내를 내쫓아 버리고서 죽는 날까지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그 아들 ‘원’(元)이 아버지더러 장가들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고종(高宗)은 후처 때문에 효기(孝己)를 죽였고 윤길보(尹吉甫)도 후처 때문에 백기(伯奇)를 내쳐 버린 일이 있었다. 나는 위로 고종에도 못 미치고 중간으로는 길보에게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이 겪은 이러한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겠느냐?”』
‘효기’는, 은(殷)나라 고종(高宗) 왕의 아들로 대단한 효자였는데, 부왕이 후궁의 말만 믿고 그를 내쫓았으나 그는 끝내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기’도 그 아버지와 생이별하였는데, 그들이 죄 없이 허물을 쓴 이유는 계모의 참소 때문이었답니다.
무엇보다도 ‘증삼’은 ‘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논어’ 중에서 증삼이 ‘효’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증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선생님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맹장자의 효도에 있어서 그의 다른 일들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 옛날 신하들을 그대로 등용하였으며 아버지가 행하던 정사를 그대로 계승하여 고치지 않았다. 이 점만은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일이다.’라고 하셨다.”
‘맹장자’(孟莊子)라는 사람은 노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속’(速)이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또한 노나라의 대부인 ‘맹헌자’(孟獻子), 즉 ‘중손멸’(仲孫蔑)이란 사람입니다.
그러나 ‘증삼’의 위대성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논어’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을 소개하겠습니다.
증자가 말하였다. “나는 매일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꾸미되 성실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더불어 사귀되 신의가 없지나 않았는가. 전해 받은 바를 익히지 않은 것은 없었는가.”(증자왈 오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논어 1-4】
여기에서 말하는, ‘일’(日)은 ‘매일’을 말하고, ‘모’(謀)는 ‘무슨 일을 도모함’을 이릅니다. 그리고 ‘충’(忠)은 ‘정성을 다함’ 또는 ‘성심성의를 다함’이고, ‘신’(信)은 ‘거짓이 없이 참된 것’을 이릅니다. 다시 말해서 ‘충’은 ‘자기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신’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거짓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매일 반성하여 잘 되지 못한 곳이 있으면 고치고 잘된 곳은 더욱 힘쓴다.’라는 말입니다. ‘증삼’은 이처럼 정성을 다하여 자기 수양에 힘썼답니다.
그러면 ‘증삼’의 말을 더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묻고, 듣고 본 일이 많으면서도 적게 들은 사람에게 물으며, 도가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하고 덕이 실하면서도 허한 듯이 하며, 남이 나에게 침범해 와도 옳고 그름을 따져서 다투지 않아야 한다. 그 옛날 나의 벗이 일찍 이런 일에 종사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의 벗’은 ‘안회’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증삼’은 ‘안회’보다 나이도 아래지만 까마득한 후배이기 때문에 터놓고 지낸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런가 하면, ‘아이(15세 이하의 아비를 잃은 이, 여기에서는 어린 나이에 위에 오르는 임금. 六尺之孤)나 한 나라의 명맥을 그에게 맡길 수 있고 위급한 상황에 놓여서도 동요하거나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을 군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다!’라고도, 그는 말했습니다. ‘증삼’은 ‘군자’에 대하여 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덕을 높인다.”
‘글로써 벗을 모으는 것’을 원문으로 ‘이문회우’(以文會友)라고 합니다. 이는, ‘시서나 예악 등의 학문과 문예를 가지고 만나서 사귀며 벗이 되는 것’을 말하지요. 요즘으로 치면, 문인들이 ‘동인’으로 모임을 여는 것을 말할 성싶습니다. 그리고 ‘벗으로써 인덕을 높이는 것’을 ‘이우보인’(以友輔仁)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보인’(輔仁)은 ‘자기의 인덕을 높이는 수양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알다시피 ‘증삼’은 공자의 후기 제자입니다. 그 어린 제자와 공자의 이야기가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삼아, 내 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그러자 ‘증자’가 말하였다. “예.” 공자가 밖으로 나가고 난 후, 다른 제자가 ‘증자’에게 물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이다.”(자왈 삼호, 오도 일이관지. 증자왈 유. 자출문인문왈 하위야. 증자왈 부자지도 충서이이의.: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논어 4-15】
여기에서 말하는, ‘일이관지’(一以貫之)는 ‘하나로서 모든 것을 꿰뚫음’을 나타냅니다. 또, ‘충서’(忠恕)에서 ‘충’은 ‘성심성의’나 ‘진실’을 이르고, ‘서’는 ‘남을 자기 생각하듯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을 이르지요. 그리고 ‘유’(唯)는 “예.”라고 하는 ‘겸손한 대답’이고, ‘이이의’(而已矣)는 ‘강한 단정’의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인데, ‘오직 그것뿐이고 다른 것은 없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증삼’은, ‘하나로 꿰뚫고 있는’ 공자의 도를 가리켜서 ‘충과 서일 뿐’이라고 말했지요. 정말 그럴까요? 나는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공자는 무엇보다 ‘인’(仁)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충’과 ‘서’는, ‘인’에 안겨 있을 뿐이지, ‘인’을 안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충’과 ‘서’는 ‘인’의 한 방편은 되지만 목적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증삼’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공자입니다. 그런데 ‘논어’ 중의 ‘선진’ 편을 보면, 공자는 ‘증삼’을 가리켜서 ‘노(魯)하다.’라고 평했습니다. 이 ‘노하다.’라는 말은, ‘노둔(魯鈍)하다.’라는 의미랍니다. ‘노둔’은 ‘재주도 없고 미련함’을 일컫습니다. 그러니 공자가 보기에, 어린 ‘증삼’은 아무래도 모자란 점이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증삼’이 노나라 무성(武城)이라는 곳에 머무를 때의 이야기입니다. ‘증삼’이 ‘무성 사람’이라고 했으니, 그곳이 ‘증삼’의 고향이겠군요. 어느 때, 월(越)나라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증삼’에게 말했습니다.
“침략군이 도착하였는데, 어찌 도망을 가지 않습니까?”
이에 ‘증삼’이 말했습니다.
“내 집에 사람을 보내어 섶과 나무를 훼손하거나 상하지 않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고 나서 ‘증삼’은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적이 물러가자, 돌아오기에 앞서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집의 담장과 지붕을 수리해 놓아라. 내가 장차 돌아가겠다.”
집의 수리가 모두 끝나자, ‘증삼’은 무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일에 대해 여론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을 공경하였거늘, 적이 이르자 먼저 도망치고 적이 물러가자 돌아오니 옳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와 비슷한 경우에, ‘자사’(子思)는 그 행동이 사뭇 달랐습니다. ‘자사’는 알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공자의 손자입니다. ‘자사’가 위(衛)나라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그 어느 날, 제나라의 도둑 떼가 그곳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자사’에게 말했습니다.
“도둑 떼가 몰려오니 도망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자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도망치다니! 내가 만일에 떠난다면 임금께서는 이 땅을 누구와 더불어 지키실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의 행동에서 느끼는 바가 큽니다. 하지만, ‘증삼’은 공자로부터 칭찬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공자가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제인가, 증자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노나라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노나라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증자에게 한 고을을 떼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증자는 그것을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때, 사람들이 누구나 다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원한 것이 아니고 노나라 임금이 자기 마음에서 주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사양하는가?”
이렇듯 사람들이 증자에게 받기를 권유하자, 증자는 이렇게 말했다.
“듣자니 남의 것을 받는 자는 항상 남을 두려워하게 마련이고, 남에게 물건을 주는 자는 항상 남에게 교만하게 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임금이 나에게 땅을 주기만 하고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로서야 어찌 두려운 마음이 없겠는가?”
이 소문을 듣고,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삼의 말은 족히 그 절개를 완전히 하였구나.”』
정말 그렇게 공자가 말했을까요? 겸손한 마음으로 사양한 게 아니라 두려운 마음에서 그리하였다는 말인데, 공자가 칭찬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증삼’은 20대의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증삼’의 아버지도 공자의 제자였지요. ‘증석’(曾晳)이라고 하였는데, 이름은 ‘점’(蒧)이었습니다. ‘증석’과 ‘증삼’의 이야기가 ‘공자가어’에 실려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증삼’이 참외밭을 매다가 잠깐 실수하여 참외 포기의 뿌리를 캐어 버렸습니다. 그걸 보고, ‘증석’이 화가 나서 커다란 막대기로 ‘증삼’의 등을 마구 때리니, ‘증삼’은 땅에 엎어져서 사람이 오가는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증삼’은 얼굴에 웃는 빛을 띠고 ‘증석’ 앞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 제가 아버님께 죄를 지었을 때, 아버님께서 너무 힘을 들여서 저를 훈계하셨으니 혹 병환이나 나시지 않으셨습니까?”
말을 마친 다음, ‘증삼’은 자기 방으로 물러나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는, 아버지인 ‘증석’으로 하여금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자기의 몸이 아무렇지도 않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답니다.
공자는 이 소문을 듣고, 노여워하며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삼’이 온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마라.”
그러나 ‘증삼’은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공자에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공자는 여러 제자를 모아놓고 다시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듣지 못했느냐? 옛날 고수(瞽叟)의 아들이 ‘순’(舜)이었다는 것을. ‘순’이 그 아버지 ‘고수’를 섬길 당시, ‘고수’가 심부름을 시키고자 할 때는 그 곁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순’을 잡아서 죽이려고 할 때는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또, 매를 맞을 때도 작은 매로 때리면 그대로 맞고 있다가 큰 매로 때리려고 하면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고수’는 아무리 악했어도 그가 아비가 아니라는 죄까지는 범하지 않았고, ‘순’도 지극한 효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증삼’은 그 아비를 섬기는 데에 몸을 생각하지 않고 맘대로 때리도록 버리어 둠으로써 죽기에 이르러도 피하지 않았으니, 만약에 자기가 죽었다면 그 아비는 불의에 빠지게 되었을 게 아니냐? 그러니 그 불효함이 이보다 더 큰 게 어디 있겠느냐? 너희들은 천자의 백성이 아니냐? 천자의 백성을 죽이게 되면 그 죄가 과연 어떠하겠느냐?”
‘증삼’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공자께 나아가서 잘못을 빌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 죄가 과연 큽니다.”
이렇듯 ‘증삼’은 공자의 눈에 들지 않은 제자였던 듯싶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는 ‘증자’라는 호칭에 걸맞게 언제부터인가 여러 사람에게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공자의 학통(學統) 한복판에 그가 자리하였기 때문일 터이지요. 즉, 공자에서 ‘증삼’으로, 그리고 ‘증삼’에서 ‘자사’로, 또 ‘자사’에서 ‘자사 문인’으로, 그 후에 ‘자사 문인’에서 ‘맹자’(孟子)로, 학통 체계에 있어서 ‘증삼’은 공자의 학문을 정통으로 ‘맹자’에게 이어 주었습니다.
나중에 ‘증삼’이 병이 들어서 위중할 때의 이야기가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증자가 병이 위중할 때,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내 손을 열어 보고 내 발을 열어 보아라. 시에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가에 있는 듯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다.’라고 했는데, 오늘 이후에야 부모님에게서 받은 몸을 다치지 않은 줄을 알겠구나, 그대들이여!”(증자 유질 소문제자왈 계여족 계여수. 시운 전전긍긍 여림심연 여리박빙, 이금이후 오지면부. 소자!: 曾子 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沈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논어 8-3】
여기에서 말하는, ‘전전’(戰戰)은 ‘두려워하는 모양’을 이르고, ‘긍긍’(兢兢)은 ‘조심하는 모양’을 이릅니다. 그리고 ‘이박빙’(履薄氷)은 ‘엷은 살얼음을 밟음’을 가리키며, ‘지면부’(知免夫)는 이제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모에게 받은 몸을 더 이상 다치게 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알겠다.’라는 뜻입니다. ‘소자’(小子)에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용한 ‘전전긍긍 여림심연 여리박빙’이란 ‘노래’(詩)는 대체 어떤 내용일까요? 이 ‘노래’는 ‘공자가 모은 305편의 시’ 중에 들어 있습니다. 자세히 말하면, ‘소아’(小雅) 편의 ‘소민’(小旻)이라는 ‘노래’입니다. ‘소민’은 ‘작은 하늘’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 당시의 어지러운 정국(政局)을 비판한 노래라고 합니다. 그럼, 이 노래의 가장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지요.
불감포호 不敢暴虎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지 못하고
불감빙하 不敢馮河 걸어서는 황하를 못 건널 줄을
인지기일 人知其一 그 것쯤은 모두 다 알고 있건만
막지기타 幕知其他 도리어 먼 일을 모르는구나.
전전긍긍 戰戰兢兢 두렵게 여기며 조심하라
여림심연 如臨深淵 깊은 못물 건너가는 듯이
여리박빙 如履薄氷 얇은 얼음 위를 걸어가는 듯이!
어떻습니까? 흥이 좀 납니까? 아무튼 ‘증삼’은 죽을 때가 되어서 그동안 몸을 다치지 않고 보전한 데에 대하여 참으로 다행하게 여긴 듯합니다. 더욱 쉽게 말해서 불효를 저지르지 않게 되어 천만다행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문득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생각납니다.
“부모는 그 자식이 오직 병이 날까 걱정뿐이다.”
‘오직 병이 날까 걱정뿐이다.’라는 이 말은, 원문으로 ‘유기질지우’(唯其疾之憂)라고 합니다. 요즘에 많이 쓰는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라.’라는 말과 통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된 자는, 그 몸을 병들게 만드는 게 가장 큰 불효이지요.
‘증삼’이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노나라의 대부인 ‘맹경자’(孟敬子)가 문병을 왔습니다. ‘증삼’은 ‘맹경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새가 바야흐로 죽으려고 할 때는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고 합니다. 이는, 나의 마지막 말이니 명심해 주십시오. 남들 위에 서서 정치를 하는 군자는, 소중히 여겨야 할 일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몸가짐과 행동을 신중히 하고 예에 맞게 하면 자연히 남을 괴롭히는 난폭한 짓과 교만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안색에 성의를 나타내고 예를 잃지 않으면 자연히 남에게 속지 않게 됩니다. 또, 셋째는 말할 때 예를 벗어나지 않으면 도리를 어기는 천한 사람의 말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언제나 예로써 태도와 언어와 안색을 삼가고 밖에서 몹쓸 사람이 가까이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은 군자가 취할 소중한 길입니다.”
‘한비자’의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 편에는 이런 고사가 전합니다.
‘증삼’의 처가 시장에 가는데 아들이 따라오면서 울었습니다. 그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돌아가거라. 돌아와서 너를 위해 돼지를 잡아 주겠다.”
처가 시장에서 돌아오자, ‘증삼’이 돼지를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처가 그를 말리며 말했습니다.
“다만 어린아이와 장난했을 뿐인데 정말로 돼지를 잡는단 말이오?”
그 말을 듣고 ‘증자’가 말했습니다.
“어린아이와 장난하면 안 되오. 어린아이는 아는 게 없소. 부모를 의지하여 배우므로 부모의 가르침을 듣소. 만일에 자식을 속인다면 이는 자식에게 속임을 가르치게 되오. 어머니가 자식을 속이면 자식이 어머니를 믿지 않게 되오.”
말을 마치고, ‘증삼’은 돼지를 잡았습니다.
그날 저녁, ‘증삼’의 아들은 푸짐하게 돼지고기 반찬이 놓인 밥상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부모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가슴에 부모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크게 자리를 잡았을지, 나는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나무 밑에 그 가슴만 한 넓이로
물빛 그늘이 고여 있다.
그 안에 내 발을 들이밀었다가
아예 엉덩이까지 밀어 넣는다.
고요가 시원하다.
그때, 개구쟁이인 바람이 달려와서
그늘을 튀기고 도망간다.
큰 나무 그 깊은 무릎 아래에서는
온갖 것들이 이리 어리다.
- 졸시 ‘시원한 고요’ 전문
공자가 활기 있게 가르침을 베풀었을 당시, ‘유약’이나 ‘증삼’은 모두 20대였습니다. 아직은 어린 티가 약간은 남아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내 생각에, ‘유약’은 공자보다 43세 아래이고, ‘증삼’은 공자보다 46세가 아래일 성싶습니다. 그러니 ‘큰 나무인 공자의 무릎 아래’에서는 이들 또한 어린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증삼은,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한다.’라는, 다시 말해서 ‘삼성오신’(三省吾身)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를 상징하는 말로, 지금도 많이 애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의 핵심은 ‘성실’과 ‘신의’와 ‘익힘’입니다. 이 단어들은 그동안 공자가 제자들에게 수없이 강조하여 가르친 내용들이지요. 스승의 말씀을 이처럼 가슴에 깊게 새겨 두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좋은 스승을 만났다는 그 하나로도 그 일생에 큰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늘이 그립습니다.
‘떼를 쓰는 어린 아들을 달래려고 농담으로 한 처의 말’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돼지를 잡은 ‘증삼’이 참으로 위대합니다. ‘약속대로 푸짐하게 돼지고기가 놓인 밥상’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의 아들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식에게 거짓말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글: 김 재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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