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29. 집으로 돌아가는 새는 쏘지 않는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2. 5. 08:03

29
집으로 돌아가는 새는 쏘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공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지금쯤은 공자에 대한 이미지를 짚을 수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잊지 않으셨지요?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섭공(葉公)이 자로에게 공자의 사람됨을 물었을 때, 자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공자는 이렇게 말했지요.
 “너는 왜 이렇게 말하지 못했는가. ‘그 사람됨이, 성이 났을 때는 밥 먹는 일도 잊고 즐거울 때는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며 늙어 가는 것조차 모른다.’라고.”
 이제 기억이 납니까? 이 말대로, 공자는 정열적인 사람입니다. 또 다른 뜻으로는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뜨거운 사람’이지요. 아, 또 한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하여도 ‘염구’가 계씨를 위하여 세금을 많이 거두자, 공자는 벌컥 성을 내며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이제 나의 제자가 아니니, 너희들은 북을 울리며 그를 크게 책망해도 좋다.”
 그런 성격에 걸맞게, 공자는 군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느 때, 그는 군자의 행할 바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음식을 먹을 때는 배부름을 바라지 않고, 머무를 때는 편안함을 바라지 않으며, 일할 때는 민첩하고 말을 삼간다. 이렇듯 도를 지닌 이에게 나아가서 나를 바로잡으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자왈 군자 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 子曰 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논어 1-14】

 여기에서 말하는, ‘민어사’(敏於事)의 ‘민’(敏)은 ‘민첩하다’ ‘재빠르다’ ‘총명하다’ ‘자세하다’ ‘소상함’ 등의 의미를 나타내고, ‘사’(事)는 ‘도를 구하는 것’의 뜻으로 지행(知行) 등을 가리키지요. 또 ‘취유도’(就有道)는 ‘도가 풍부한 사람에게 나아감’을 이릅니다. ‘취’(就)는 ‘친근하게 따라붙는다.’라는 뜻이랍니다. 
 공자는 무슨 일을 시작했다고 하면 깊이 빠지는 성격이지만, 한가하게 머물 때는 ‘마음이 풀리고 온화한 듯싶으며 여유 있고 확 퍼진 것 같았다.’라고 ‘논어’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음이 풀리고 온화한 듯싶으며 여유 있고 확 퍼진 것 같았다.’라는 표현을 원문에서 ‘신신여 요요여’(申申如 夭夭如)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문학적 표현입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공자의 일상적인 행동에 대한 언급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고향의 마을에서는 너무 공손하여 마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그러나 종묘나 조정에서는 조리 있게 말을 잘하면서도 오로지 신중히 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상대부와 이야기할 때는 태연하면서도 할 말을 능히 다 하였으며 여러 하대부와 이야기할 때는 온화하면서도 즐겁게 대하였다.
공자는, 군주의 궁문을 들어갈 때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경의를 표하였고, 그 앞으로 빨리 걸어 나갈 때는 단정하게 예의를 차렸다. 왕이 그에게 손님을 접대하라고 명하면 정성을 다하는 표정이었으며, 왕의 부름이 있을 때는 마차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달려갔다.』

 ‘논어’ 중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손하다’를 ‘논어’에서는 ‘순순여’(恂恂如)라고 하였고, ‘말을 제대로 못 하다.’를 ‘변변언’(便便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태연하면서도 할 말을 능히 다 하다.’의 원문은 ‘은은여’(誾誾如)입니다. ‘은’(誾)은 ‘화기애애하다’ ‘온화하다’ ‘점잖다’ ‘이야기하다’나 ‘향기 짙다’ 등의 의미가 있지요. 그래서 ‘은은’(誾誾)이라고 하면, ‘화기애애하게 의논하는 모양’ 또는 ‘향기가 대단히 나는 모양’ 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온화하면서도 즐겁게’는 ‘간간여’(侃侃如)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간’(侃)은 ‘강직하다’ ‘화락하다’ 등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강직했다.’라고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공자의 성격으로 볼 때 동료나 아랫사람 앞에서 목에 힘을 주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논어’에는 이 말 외에도 ‘임금이 나오면 경건하면서도 예의가 바른 모습이었다.’라는 글귀가 더 들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 ‘경건하다’를 ‘축척여’(踧踖如)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예의가 바른 모습’을 ‘여여여’(與與如)라고 하였습니다.
 또, ‘허리를 굽히고 경의를 표한다.’를 ‘논어’의 원문에서는 ‘국궁여야 여불용’(鞠躬如也 如不容)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상반신 굽히기를 문이 작아서 마치 몸이 안 들어가는 듯이 함’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런가 하면 ‘정성을 다하는 표정’을 ‘논어’에서는 ‘색발여’(色勃如), 즉 ‘얼굴빛을 바꾸는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사기’에는 없고 ‘논어’에만 기술되어 있는 공자의 행동에 관해 기술하여 보겠습니다.

『함께 서 있는 손님에게 읍할 때는 손을 왼쪽으로 했다가 오른쪽으로 돌렸는데, 옷자락의 앞과 뒤를 가지런히 되게 하였다. 빠른 걸음으로 나갈 때는 그 움직임이 단정하였다. 손님이 물러간 뒤에는 복명하기를 ‘손님은 뒤도 안 돌아보고 잘 가셨습니다.’라고 했다.
조정에 서 있을 때는 문 한가운데는 서지 않았고, 들어설 때는 문지방을 밟지 않았다. 임금의 자리를 지나갈 때는 얼굴빛이 달라지고 발걸음이 빨라지며 말이 모자라는 것같이 했다. 또, 옷자락을 잡고 대청에 오를 때에는 몸을 굽히고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나올 때는 층계를 하나 내려와서 얼굴을 펴고 마음을 놓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계단을 모두 내려온 후에 빠른 걸음으로 나갈 때는 두 팔을 펴고 걸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서는 더욱 신중하고 경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 ‘옷’에 대한 공자의 생각은 어떠했을까요? 그의 ‘옷에 관한 생각’을 엿보게 하는 내용이 ‘논어’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에 관한 내용을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는 보랏빛과 주홍빛으로 장식하지 아니하고 붉은빛과 자줏빛으로 일상복을 만들지 않았다. 더운철에는 칡베로 만든 홑옷을 입었으나 굵은 베옷을 꼭 껴입었다. 검은 옷엔 어린 양의 갖옷을 입고 흰옷엔 어린 사슴의 갖옷을 입었으며, 누른 옷엔 여우의 갖옷을 입었다. 일상복으로 입는 갖옷은 길게 하였으나 길이는 키에 비교하여 한 배 반이었다. 여우와 담비의 두꺼운 가죽은 집에서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장사지내고 나면 어떤 노리개든지 가리지 않고 찼다. 예복이 아니면 주름을 잡지 않았다. 검은 양의 가죽옷이나 검은 비단의 관을 쓰고는 조상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매달 초하루에는 반드시 조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하였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하고 마음을 가라앉힐 때는 반드시 깨끗한 옷을 갈아입었는데, 다름 아닌 베로 만든 옷이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할 때는 술이나 매운 것이나 냄새나는 것 등은 먹지 않았고, 거처할 때는 반드시 자리를 옮겼다.
상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비록 친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태도를 바꾸고, 예모를 쓴 이와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비록 보는 이라도 예의를 갖추었다. 수레를 타고 가다가 죽은 이의 옷과 생전에 쓰던 물품을 가지고 가는 이를 만나면 몸을 약간 앞으로 구부리고 손으로는 수레의 가로막대를 잡으며 예를 표하였다. 나라의 지도나 호적을 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도 그처럼 하였다.』

 공자가 입는 옷을 보면 한눈에 그가 검소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은 옷에 따라 예를 표했음도 알 수 있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공자의 ‘음식’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공자의 아버지도 체구가 컸고, 공자 역시 기골이 장대하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식성에 대해서도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생선이 상하였거나 고기가 부패하였거나 아무렇게나 잡아서 멋대로 잘라놓은 고기는 먹지 않았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안 앉았고, 상(喪)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할 때는 배불리 먹은 일이 없었다.』

 그 내용이 비교적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논어’에는 이보다 조금 더 상세한 내용이 씌어 있습니다. 그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밥은 흰 것을 싫어하지 않았고 회는 가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밥이 쉬거나 생선이 상하거나 하면 먹지 않았고 빛깔이 변한 것도 먹지 않았다. 나쁜 냄새가 나도 안 먹고 익지 않아도 안 먹었으며, 제철에 나지 않은 것도 안 먹고 반듯하게 자르지 않은 것도 안 먹었으며, 간이 맞지 않으면 안 먹었다. 또, 상위에 고기가 많이 차려져 있더라도 밥보다 많이 먹지 않았고, 술은 사양하지 않고 마셨으나 취하여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며, 받아온 술과 사 온 육포는 먹지 않았다. 그리고 나라에서 제사 지낼 때 받은 고기는 그 밤을 넘기지 아니하였다. 그런가 하면, 집에서 제사에 썼던 고기는 사흘을 넘기지 않았으나 사흘이 지난 것은 먹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에는 말하지 않았고, 잠자리에 든 뒤에도 말하지 않았다.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엄숙한 태도로 ‘고수레’를 하였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고, 고향 마을 사람들과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지팡이 짚은 노인이 일어선 후에야 자리를 떴다.』

 그 행동이 눈에 보이는 성싶기도 합니다. 그러하였겠지요. ‘공자’와 ‘술’이 아주 멋지게 어울립니다. 스스로 ‘정열적인 사람’이라고 말한 공자였는데, 술을 어찌 좋아하지 않았겠습니까? 한 마디로 ‘두주불사’(斗酒不辭)의 공자였겠지요. 그러나 절대로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았다니 참으로 현명합니다. 위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표현한 공자의 말이 다음과 같이 ‘논어’에 담겨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밖으로 나가서는 ‘공경’(公卿)을 섬기고 들어와서는 ‘부형’을 섬기며 상사(喪事)에는 정성을 다하고 술로 말미암아 실수하지 않으니, 이런 일 말고 나에게 어떤 일이 있겠는가?”(자왈 출즉사공경 입즉사부형 상사 불감불면 불위주곤 하유어아재.: 子曰 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 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논어 9-15】

 여기에서 말하는, ‘공경’(公卿)은 ‘임금과 재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주곤’(酒困)은 ‘술에 정신과 마음이 어지러워짐’을 이르지요. 또, ‘하유어아재’(何有於我哉)는, 공자가 즐겨 사용하는 말투인데, ‘이것 이외에 무엇이 나에게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이지요. 다시 말해서 ‘나는 오로지 이것만을 힘써 왔다.’라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이 나에게 좋은 마음으로 주는 음식이라도 어쩐지 내가 먹기에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 게 있습니다. 아마도 공자 역시 그런 경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노나라 권력자인 계강자(季康子)가 약을 건네자, 공자는 절을 하고 받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 약의 성분을 모르니, 감히 복용할 수는 없소.”
 그러나 임금에게 하는 행동은 사뭇 달랐습니다. 공자가 임금에게 하는 행동은 참으로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의 행동에 관한 내용도 ‘논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익힌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자리를 바로 하고 먼저 맛보았으며, 임금이 날고기를 내리면 익혀서 제물로 올렸고, 임금이 살아 있는 짐승을 내리면 반드시 길렀다. 임금을 모시고 밥을 먹을 때, 임금이 고수레를 올리면 자신이 임금을 대신하여 밥을 맛보았다.』

 이렇듯 공자는 임금에게 예의를 다했습니다. ‘공자가어’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공자가 노나라 임금인 ‘애공’을 모시고 있었는데, 어린 임금은 이때 마침 복숭아와 기장밥을 공자에게 내리며 말했습니다. 아, ‘기장’은 볏과의 한해살이 식물로 ‘수수와 비슷한 곡류’입니다.
 “청컨대 먼저 기장밥을 자시고 뒤에 복숭아를 자시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입을 가리고 웃었습니다. 그 모양을 보고, ‘애공’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기장밥은 복숭아를 씻으라는 것이고 밥으로 자시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나도 그런 줄은 압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장’이라는 곡식은 오곡 중에 어른이기 때문에 교례(郊禮)와 종묘(宗廟)에도 맨 위로 쓰게 됩니다. 그러나 복숭아로 말하자면 여섯 가지 과일 중에 제일 하품이므로 제사에도 쓰지 않고 교묘(郊廟)에도 올리지 않게 됩니다. 군자는 천한 것으로 귀한 것을 씻어 주기는 하겠으나 귀한 것으로 천한 것을 씻어 주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이제 오곡 중에 제일 어른인 기장으로 과일 중에 제일 하품인 복숭아를 씻어 준다면 이는 ‘위의 것’으로 ‘아래의 것’을 씻어 주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일은 교육에도 방해가 되고 의리에도 어긋나는 까닭에 아무리 왕의 명령이 있다고 해도 저는 감히 행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애공’이 말했습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자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기에 노래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던 노래를 305편이나 수집하였으며,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노래를 한번 해보라고 하고는 따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공자는 노래를 듣기도 즐겼겠지만 노래도 잘 불렀던 모양입니다.
 한 번은, 노나라 ‘유비’(孺悲)라는 사람이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병을 핑계로 만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말을 전해 온 사람이 문을 나서자, 공자는 비파를 타며 노래를 크게 불렀습니다. 이는, 그에게 전해 듣게 하기 위함이었답니다. 
 앞의 말에서 ‘말을 전해 온 사람’을 ‘장명자’(將命者)라고 합니다. 공자가 ‘유비’더러 들으라고 비파를 타며 노래를 부른 것은, 소위 ‘불설지교회’(不屑之敎誨)라고 한답니다. 면회를 거절당하고 난 다음에 저 스스로 반성하도록 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공자는 음악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음악은 군자에게 교만한 마음을 없애게 하고, 소인에게 두려운 마음을 없애게 한다.”
 사마천의 ‘사기’ 중에 공자가 ‘추조’(陬操)를 지었다는 내용이 있지요. ‘주초’란 ‘거문고 곡조’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자는 작곡자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위(衛)나라에서도 자신을 써주지 않자, 공자가 그곳을 떠나서 진(晉)나라로 가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진나라는 이미 국정이 어지러워져서 ‘두명독’이니 ‘순화’니 하는 어진 대부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에 공자는 진나라로 가려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때에 자공이 그 까닭을 묻자,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비록 날짐승이라도 봉황과 같은 신령스러운 새라면 제가 만든 집이 무너지고 제가 낳은 알이 깨어져 버렸을 때 그 장소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거다.”
 이런 말을 하고 난 뒤에 지은 곡조가, 공자의 이 유명한 ‘추조’였다고 합니다. 
 공자는 특히 ‘말재간을 뽐내는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까짓 말만 잘해서 무엇에 쓰겠느냐?’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논어’에는 함부로 지껄이는 일에 대해 경계하는 공자의 말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중에서 몇 개를 여기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옛사람들이 말을 앞세우지 않았던 이유는, 몸이 말에 따르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또 공자가 말했습니다.
 “나라의 정치가 깨끗하면 말과 행동을 정직하게 해야 하고, 나라의 정치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대담하게 하고 말은 주의해야 한다.” 
 다시 공자가 말했습니다.
 “가히 더불어서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아니하면 사람을 잃고, 가히 더불어서 말할 만하지 못한데 말하면 말을 낭비하게 된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을 잃지 않고 또한 말도 낭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게 만들고,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반드시 큰일을 그르치게 된다.”
 제자들에게 공자가 엄숙히 말했습니다.
 “군자를 모시고 있을 때 저지르게 되는 세 가지 허물이 있으니, 아직 말을 할 차례가 되지 않았는데 말하는 것을 ‘조급하다’라고 이르며,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숨긴다’라고 이른다. 또, 군자의 얼굴빛을 살피지 않고 말을 꺼내는 것을 ‘눈치 없다’라고 이른다.” 
 또 공자가 말했습니다.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가지고 길거리에서 전하는 일은 덕을 버리는 바와 같다.”
 다시 공자가 말했습니다.
 “날카로운 말로 나라와 가문을 뒤집어엎는 것을, 나는 미워한다.”
 그리고 공자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그 뜻을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어느 날, 공자가 자공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 말에, 자공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을 안 하시면, 우리가 무엇을 전해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이 운행되고 여러 사물이 생성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그러나 공자가 늘 말하는 것은, ‘시’(詩)를 읽고, ‘서’(書)를 익히고, ‘예’(禮)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실천했지요. 이의 한 실천으로 공자는 자연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공자는 함부로 살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담겨 있습니다.

 공자는 낚시질로 물고기를 잡기는 하였으나 그물질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살을 쏘아서 새를 잡기는 했지만, 쉬려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는 쏘지 않았다.(자 조이불강 익불석숙.: 子 釣而不綱 弋不射宿)【논어 7-26】

 여기에서 말하는, ‘강’(綱)은 ‘큰 줄로 망을 엮은 다음, 물을 가로질러서 물고기를 잡는 것’, 또는 ‘긴 줄에 많은 낚시를 묶은 것’ 등을 이릅니다. 그리고 ‘익’(弋)은 ‘주살’이라고 하는데, 화살 끝에 끈이 매달려 있어서 활을 쏘면 그 끈이 새의 날개를 휘감게 되어 있답니다. 또, ‘석’(射)은 ‘쏘아서 맞힘’을 가리키고 ‘숙’(宿)은 ‘잠자는 새’ 또는 ‘쉬고 있는 새’ 그리고 ‘머무는 집’ 등을 나타낸답니다. 그래서 나는 ‘머무는 집’을 택하여 ‘쉬려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라고 풀이했습니다. 
 물고기를 잡을 때도 먹기 위한 몇 마리만 잡는 게 군자의 도리입니다. 어린 물고기까지 모두 잡는 그물질은 군자가 해서는 안 되겠지요. 또, 먹고 살기 위하여 때로 새를 잡기도 하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까지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게, 군자의 행동입니다. 공자는 인(仁)을 강조하였는데, 어찌 그 행동이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었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공자는 이런 동물들을 통하여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습니다. ‘공자가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어느 때, 공자는 참새를 그물로 잡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잡았다는 참새는 모두 어렸습니다. 공자가 그를 보고 물었습니다.
 “큰 새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큰 새는 잘 놀라기 때문에 잡기가 힘들고 새끼는 먹이만 탐하는 까닭에 잡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새끼도 큰 새를 쫓아가 버리면 잡을 수가 없고 큰 새도 새끼를 쫓아가 버리면 역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놀라기를 잘하면 해(害)를 멀리할 수가 있고 먹는 것만 탐내고 보면 환난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그 마음 갖는 대로 되는 게다. 그러나 다만 좇아서 행하는 데 따라 화와 복이 되는 까닭에 군자는 그 행하는 바를 삼간다. 말하자면 어른을 따라서 염려하여 행하면 몸을 온전히 할 기회가 있고, 작은 사람을 따라 우직하게 굴면 망신만 당하고 말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아주 큰 즐거움은, 좋은 ‘벗’을 사귐에 있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벗’에 대한 가르침도 제자들에게 많이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자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선비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서로 간절하게 착한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하고 기뻐하여 화합하면 가히 선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벗에게 간절히 착한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하고 형제 사이에는 기뻐하고 화합하여라.”
 여기에서 말하는, ‘벗에게 간절히 착한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한다.’의 원문은, ‘붕우 절절시시’(朋友 切切偲偲)로 되어 있습니다. ‘시’(偲)는 ‘굳세다’ ‘착한 일을 하도록 서로 권하다’ ‘똑똑하다’ ‘수염이 많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살펴보았을 때, 친구를 아주 잘 사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외롭게 지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친구를 잘 사귈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덕을 갖춘 사람은 외롭지 아니하니, 반드시 뜻을 함께하고 따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또 공자는 말했습니다.
 “충성스러운 마음과 진실한 마음을 주로 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벗으로 사귀지 말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어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점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즉, 사람은 겉으로 보아서 그 참모습을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공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행한 바를 보며 그 하는 동기를 살피고 그 만족하는 바를 관찰하면, 그 사람됨을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그 행한 바를 본다.’의 원문은 ‘시기소이’(視其所以)입니다. ‘이’(以)는 ‘위’(爲)와 같은 뜻으로, ‘행하는 바’ 또는 ‘행위’ 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하는 동기를 살핀다.’의 원문은 ‘관기소유’(觀其所由)입니다. ‘유’(由)는 ‘이유’ ‘동기’ 등의 의미를 지니지요. 또, ‘그 만족하는 바를 관찰한다.’의 원문은, ‘찰기소안’(察其所安)입니다. ‘안’(安)은 ‘편안하다’라는 뜻으로 ‘만족하는 바’를 나타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무릎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유익한 벗을 사귀어야만 합니다. 그럼 공자가 말한 ’유익한 벗과 해로운 벗‘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유익한 벗이 셋 있고 해로운 벗이 셋 있다.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많이 아는 사람과 벗하면 유익하고, 아첨 잘하는 사람과 줏대가 없는 사람과 말만 앞세우는 사람과 사귀면 해롭다.”
 공자가 말한, 원문에서의 유익한 벗은 ‘직’(直)과 ‘량’(諒)과 ‘다문’(多聞)의 사람이고, 해로운 벗은 ‘편벽’(便僻)과 ‘선유’(善柔)와 ‘편녕’(便佞)의 사람입니다.
 이어서 공자는 유익한 즐거움과 해로운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익한 즐거움이 셋 있고, 해로운 즐거움이 셋 있다. ‘예악의 절도 맞추기’와 ‘남의 장점 말하기’와 ‘현명한 벗이 많음’을 좋아하면 유익하고, ‘교만한 쾌락’과 ‘하는 일 없이 노는 것’과 ‘주색에 빠짐’을 즐거워하면 아주 해롭다.”
 여기에서의 ‘유익한 세 가지 즐거움’은 ‘절예악’(節禮樂)과 ‘도인지선’(道人之善)과 ‘다현우’(多賢友)이고, ‘해로운 세 가지 즐거움’은 ‘교락’(驕樂)과 ‘일유’(佚遊)와 ‘연락’(宴樂)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현명한 벗’이 많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성싶습니다. 든든하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논어’를 읽다가 보면 깜짝 놀랄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처럼 점잖은 공자에게 정말로 형편없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라기보다는 어릴 적에 고향에서 함께 자란 사이였답니다. 이름은 ‘원양’(原壤)이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쪼그리고 앉아서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자가 그 모양을 보고 말했습니다.
 “어려서는 겸손할 줄 모르고 자라서는 이렇다 할 일도 하지 않았으며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네가 바로 도적이다.”
 그리고는 지팡이로 그의 다리를 후려쳤습니다.
 벗처럼 좋은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바로 벗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벗이 보낸 선물은 그것이 비록 수레와 말이라도 고맙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사 지낸 고기에는 절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 지낸 고기’에 대해서는 예(禮)를 표시했지만, 그토록 ‘예’를 아주 중하게 여기는 공자까지도, 친구 사이에는 ‘예’의 형식을 버리고 ‘의’(義)로서 대하였다는 뜻이랍니다. 

 공자는 말했습니다.
 “묵묵히 마음속에 새기고 배우는 데 싫증 내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아니하니, 이런 일 말고 나에게 어떤 일이 있겠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묵묵히 마음속에 새긴다.’라는 원문이 ‘묵이지지’(黙而識之)이고, ‘배우는 데 싫증 내지 않는다.’라는 원문은 ‘학이불염’(學而不厭)이며, ‘다른 사람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아니하다.’라는 원문은 ‘회인불권’(誨人不倦)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원문의 ‘하유어아재’(何有於我哉)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풀이가 구구하지요. 이와 똑같은 글이 ‘논어’의 ‘자한’(子罕) 편에도 들어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밖으로 나가서는 공경을 섬기고, 들어와서는 부형을 섬긴다.’라는 공자의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거기에도 ‘하유어아재’(何有於我哉)라는 말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공자의 말투가 그렇다는 걸 짐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 뜻을 ‘이것 이외에 나에게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라고 풀이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바가 있듯이, 공자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공자도 그런 희망 사항이 있었음이 놀라운 일입니다. 어느 한때,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공자는 자로에게 말했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벗들에게는 믿음을 갖게 하며,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그리움을 품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 이제는 생각이 나겠지요. 이보다 더 멋진 말은 이 세상에 없을 성싶습니다. 물론,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말 이외에 더할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공자도 ‘우려하게 되는 바’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덕이 닦여지지 않는 것, 학문이 익혀지지 않는 것, 의를 들어도 능히 옮기지 못하는 것, 선하지 못함이 능히 고쳐지지 않는 것 등이 바로 나의 근심이다.” 
 사람이란, 비록 성인(聖人)이라는 일컬음을 받는, 공자까지도 모두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결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느 때, 숙손무숙(叔孫武叔)이라는 사람이 어느 대부에게 말했습니다. 
 “자공이 공자보다 현명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자복경백(子服景伯)이라는 사람이 자공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러자, 자공이 말했습니다.
 “집의 담에다 비유한다면, 저의 담은 어깨에 닿아서 집안의 좋은 것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은 여러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찾아낸 후에 들어가지 않고는 그 안 종묘의 아름다움과 많은 관원을 보지 못합니다. 그 문을 들어가 본 사람조차 적으니,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그럴 법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숙손무숙’이라는 사람은 노나라 대부로 숙손씨(叔孫氏)의 8대손인데, 이름은 ‘주구’(州仇)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자복경백’도 노나라의 대부이며, 이름은 ‘하’(何)라고 합니다. 그런데 ‘숙손무숙’은 무슨 이유인지, 공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싶습니다. 어쩌면 공자에게 핀잔을 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어느 날인가, 그가 또 공자를 헐뜯자, 자공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별수가 없소. 선생님은 헐뜯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의 잘난 것은 언덕 같아서 그대로 넘어갈 수 있으나, 선생님은 해와 달 같아서 넘을 수가 없소. 사람이 스스로 관계를 끊으려고 한들 해와 달에 무슨 소용이 있겠소? 단지 자기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드러낼 뿐이오.”
 자공은 공자를 이처럼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자공의 이 말을 들었다면 또 이렇게 말했겠지요.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남을 알고 있지 못함을 한탄해야 한다.”
 그러면 또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손에 들고 놓지 못한 만년필
나무에게 맡겨 놓은 채

바람의 길을 밟겠다.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한 번도 닿아 보지 못한 곳
나무와 함께 걸으며

멋지게 휘파람을 불겠다.
- 졸시 ‘오늘 하루는’ 전문

 공자는 특히 ‘말재간을 뽐내는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그까짓 말만 잘해서 무엇에 쓰겠느냐?’라고 호통을 쳤다지 않습니까. 나는 공자의 그 말이 ‘그까짓 시만 잘 써서 무엇에 쓰겠느냐?’라는 말로 자꾸 들리곤 합니다. 시도 잘 쓰지 못하는 나 자신이 더욱 부끄럽기만 합니다.
 하기는, ‘시’(詩)도 말의 일종입니다. ‘말’을 글로 쓴 것이 ‘시’이니까요. 공자는 ‘함부로 지껄이는 것’을 경계하여 많은 가르침을 폈습니다. 즉, ‘옛사람들이 말을 앞세우지 않았던 이유는, 몸이 말에 따르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라든지, ‘교묘한 말은 덕을 어지럽게 만들고,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반드시 큰일을 그르치게 된다.’라든지,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길거리에서 전하는 일은 덕을 버리는 바와 같다.’라는 등의 말들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도, ‘시’를 쓰는 데에 글을 앞세우지 말고 교묘한 글을 쓰지 말며 길거리에서 주워들은 말을 함부로 글로 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이었지요. 공자가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니, ‘자공’이 놀라서 ‘선생님께서 말을 안 하시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자공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이 운행되고 여러 사람이 생성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이는, ‘천명’을 따르는 데에 온 힘을 모두 쏟으라는 뜻이겠지요.(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