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30. 태산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다/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2. 5. 14:41

30
태산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다





 공자의 나이가 70살이 되었습니다. 바로 기원전 482년이고 애공 13년이었지요. 공자는 그의 일생을 회상하며, ‘나이가 70살이 되니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의 원문은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從)은 ‘멋대로 풀어놓는다.’라는 뜻이랍니다. 그리고 ‘유’(踰)는 ‘넘다’ ‘이기다’ ‘뛰다’ ‘더욱’ ‘멀다’ ‘아득하다’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구’(矩)라는 글자입니다. 이 ‘구’는 원래 ‘곱자’를 가리킵니다. ‘곱자’는, 나무나 쇠로 만들었는데, 90도 각도로 된 ‘ㄱ’자 모양의 자입니다. 그래서 ‘기역자자’라고 부르기도 하며 ‘곡척’(曲尺) 또는 ‘구척’(矩尺)이라고도 말합니다. ‘컴퍼스’(compass)를 뜻하는 ‘규’(規)와 함께 ‘법도’ ‘규칙’ ‘기준’ ‘준칙’ 등의 뜻을 지닙니다. 이러한 상태야말로 ‘인격 완성’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올 때만 하여도 정치에 대한 미련은 아주 조금이나마 그 마음에 남아 있었을 듯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70살이 되었을 때는 그러한 미련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서(書)에 이르기를 ‘효도하라. 형제 사이에 우애 있게 하라. 그러면 네가 하는 일에 늘 정치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정치하는 일입니다. 어찌 정치를 한다고 나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서’(書)라는 것은 지금의 ‘서경’(書經)을 말하는데, 서경 군진편(書經 君陳篇)에 ‘오직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여 정치를 베풀 수가 있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 원문은 ‘유효 우우형제 극시유정’(惟孝 友于兄弟 克施有政)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군진편은, 진대(晋代)의 위작으로 보기도 한답니다. 게다가 ‘주희’(朱熹)는, 이를 정공(定公)의 초년(初年)인, 공자 나이 43세 때의 일이라고도 했지요. 
 여하튼,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군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갔습니다. 공자는 스스로 다짐하듯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도(道)를 들어서 터득한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습니다.
 “선비로서 도(道)에 뜻을 두고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더불어서 이야기할 상대가 되지 못한다.”
 또, 공자는 ‘군자’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군자는 세상의 모든 일에 좋다고 오로지 주장하지도 않으며 나쁘다고 반드시 배척하지도 않는다. 오직 의로움을 좇을 뿐이다.”
 ‘좋다고 오로지 주장하지 않고 나쁘다고 반드시 배척하지도 않는다.’의 원문은 ‘무적야 무막야’(無適也 無莫也)입니다. ‘적’(適)은 ‘오로지 주장하는 것’으로 ‘좋다고 고집하는 것’을 이릅니다. 그리고 ‘막’(莫)은 ‘반드시 배척하는 것’으로 ‘나쁘다고 멀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특히 공자는 ‘배움’에 있어서 늘 제자들에게 강조했습니다.
 “배울 때는 아무리 해도 미치지 못할 듯이 하고 배워서 알게 되면 혹시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이 하라.”
 또, 이렇게 경험을 실토하기도 했습니다.
 “내 일찍이 하루 내내 먹지 않고 밤새도록 사색했으나 유익함이 없었다. 그러니 그저 배움이 제일이다.”
 어느 때,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방종하지 않음으로써 잃는 사람은 드물다.”
 이 말의 원문은 ‘이약실지자 선의’(以約失之者 鮮矣)입니다. 여기에서 ‘약’(約)이 ‘절검’(節儉)의 뜻인데,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방종하지 않은 것’을 나타냅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선’(鮮)은 ‘드물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렇듯 공자는 ‘절약하고 검소함’에 대하여 강조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런 말까지 했지요.
 “사치하면 교만해지고, 검약하면 고루해진다. 교만해지느니, 차라리 고루해지는 게 낫다.”
 공자의 각오가 대단했지요. 공자는 이 말대로 마음과 몸가짐이 항상 반듯하였습니다. 그런데 70살이 넘고 나서는 덜컥 병에 걸렸습니다. 그토록 튼튼한 공자가 왜 병에 걸렸을까요? 게다가 절제를 몸에 익혔을 텐데, 너무나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지난해에 공자는 아들 ‘리’(鯉)를 잃었습니다. ‘공리’(孔鯉)의 자는 ‘백어’(伯魚)인데, 공자가 20살 때에 낳은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공자가 69세 때에 50세가 되었지요.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리(鯉)가 나이 50세로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공자는 크나큰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몸에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공자가 병이 든 이야기는 ‘논어’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가 병이 나자, 자로가 기도를 청했다. 이에 공자가 물었다. “그런 선례가 있느냐?” 그 말에 자로가 대답했다. “있었습니다. ‘뇌문’(誄文)에 이르기를 ‘너를 위하여 천지신명께 기도드린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그런 기도를 드린 지가 오래되었다.”(자 질병 자로청도. 자왈 유저. 자로대왈 유지. 뇌왈도이우상하신기. 자왈 구지도 구의.: 子 疾病 子路請禱. 子曰 有諸. 子路對曰 有之. 誄曰禱爾于上下神祇. 子曰 丘之禱 久矣.)【논어 7-34】

 여기에서 말하는, ‘유저’(有諸)는 ‘그런 일이 있었는가?’ 또는 ‘선례가 있었는가?’라고 묻는 뜻이지요. 그리고 ‘뇌’(誄)는 ‘뇌문’이라고 하여 ‘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그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말합니다. 또 ‘신기’(神祇)에서 ‘신’은 ‘하늘의 신’을 가리키고 ‘기’는 ‘땅의 신’을 이른다고 합니다. 자로가 인용한 ‘뇌문’의 ‘너를 위하여 천지신명께 기도한다.’라는, ‘잘못을 뉘우치고 착함을 실천하기 위해 마음의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그런 기도라면 나는 지금까지 줄곧 해왔는데, 무얼 새삼스럽게 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내용이 ‘논어’에 이렇게 실려 있습니다. 공자가 몹시 병이 깊어지자, 자로가 공자 가문의 사람으로 가신을 삼아서 ‘공자 장사지낼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공자의 병이 조금 좋아졌지요. 그래서 공자가 말했습니다.
 “오래되었구나, 유(由)가 거짓말을 한 지가. 가신이 없는데 가신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또, 나는 가신의 손에 안겨서 죽는 것보다 차라리 제자들의 손에 안겨서 죽겠다. 그리고 훌륭한 장례를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길에서야 죽겠느냐?”
 공자는 71세가 되었습니다. 때는, 애공 14년으로 기원전 481년의 봄이었습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이런 내용이 씌어 있습니다.

『노나라 애공 14년 봄에 대야(大野)에서 수렵하였다. 숙손씨(叔孫氏)의 마부인 서상(鉏商)이 괴이한 짐승을 잡았는데, 사람들은 이 짐승이 잡힌 게 상서로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그 짐승은 기린이다.”
그 말을 전해 듣고 그 사람들은 그 짐승을 잡아 왔다. 그러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옛날처럼 황하에서 다시는 용이 도판(圖版)을 메고 나타나지 않고 낙수(洛水)에서 다시는 거북이가 서판(書版)을 지고 나타나지 않으니, 나의 희망도 이제는 끝나는가 보다.”』

 여기에서 ‘대야’(大野)는, 노나라의 소택지 이름이랍니다. 이곳은 수렵하는 장소였지요. 지금의 산동성 거야현(山東省 巨野縣)의 북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공자가어’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노나라 숙손씨의 수레를 몰고 다니는 ‘자조상(子鉏商)이라는 자가 있었다. 넓은 들에 나무를 실으러 갔다가 기린 한 마리를 얻었는데, 그 기린은 왼쪽 앞발이 꺾여 있었다. 그 짐승을 수레에 태우고 돌아왔더니 숙손씨가 말했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성 밖에 내다 버려라.”
그리고 숙손씨는 사람을 시켜서 공자에게 묻게 했다.
“사슴처럼 생기고 뿔이 있는 짐승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그 동물을 가서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어찌해서 여기를 왔느냐? 이 짐승은 기린이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를 왔느냐? 어찌해서 여기를 왔느냐?”
공자가 옷자락을 올려서 낯을 씻으니 눈물에 옷깃이 젖었다. 숙손씨는 이 말을 전해 듣자, 자기가 버리라고 했던 기린을 다시 붙잡아 오라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우셨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기린은 밝은 임금을 위해서 온다. 그런데 때가 아닌 때에 왔다가 해를 당하게 되었구나. 그래서 나는 이를 슬퍼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린’(麒麟)은 ‘성인이 나려면 이 짐승이 나타난다고 전하는 상상의 동물’을 이릅니다. 그러니 위의 이야기는 모두가 ‘픽션’이지요. 짐짓 ‘기린’을 내세워서 그 당시의 혼란한 정세를 그려 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내용도 ‘공자세가’에는 이렇게 담겨 있습니다. 

『곡부(曲阜)의 서쪽에서 잡힌 기린을 보고 공자가 말했다.
“도(道)를 행하려는 나의 희망도 이제는 모두 끝났다.”
그리고 공자는 다시 탄식하여 말했다.
“나를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구나.”
이에 자공이 말했다.
“어째서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하십니까?”
공자가 다시 말했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래에서 인간사를 배움으로써 천명에 이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니 하늘만이 날 알아주는 게 아니겠느냐?”』

 그런데 이 중에서 공자와 자공의 대화 내용이 ‘논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내용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자공이 말했다. “어찌 선생님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까?”공자가 말했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는다. 아래로부터 배워서 위로 통달하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역시 저 하늘이다.”(자왈 막아지야부. 자공 왈 하위기막지자야. 자왈 불원천 불우인. 하학이상달 지아자 기천호.: 子曰 莫我知也夫. 子貢 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논어 14-37】

 여기에서 말하는, ‘야부’(也夫)는 ‘개탄의 뜻을 나타내는’ 종조사입니다. 그리고 ‘원’(怨)은 ‘원망하다’ ‘미워하다’ ‘힐책하다’ ‘원수’ 등을 나타내고, ‘우’(尤)는 ‘더욱’ ‘특히’ ‘뛰어남’ ‘허물’ ‘탓’ ‘재앙’ ‘탓하다’ 등을 가리킵니다. 또,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은 ‘비근한 사람의 일로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고매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이릅니다.
 아마도 공자가 어떤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한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공자는 죽은 후에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춘추’(春秋)를 지었답니다. 그 이야기가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비교적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안 되지, 안 돼.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나의 도가 행하여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이에 공자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 이는, 위로 은공(隱公)에서 아래로는 애공(哀公) 14년까지 12공(公)의 시대를 포괄하였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주나라를 종주로 하였으며, 은나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하(夏)와 상(商)과 주(周) 3대의 법률을 계승하고 있다. 그 문사(文辭)는 간략하나 제시하고자 하는 뜻은 넓다. 그래서 오나라와 초나라의 군주가 왕을 자칭하였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낮추어서 본래의 작위(爵位)인 자작(子爵)으로 칭하였다. 천토(踐土)의 회맹(會盟)을 실제로는 제후가 주나라의 천자를 부른 것이지만 ‘춘추’에서는 그 사실을 피해서 ‘천자가 하양(河陽)으로 수렵을 나갔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사안들을 들어서 당세(當世)의 법통을 바로잡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제후들에 대한 폄손(貶損)의 뜻은 후에 군주가 될 사람들이 이를 참고하여 실행하게 하는 데 있다. ‘춘추’의 대의가 행하여지게 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게 된다.
공자는 지난날의 소송안건을 심리하였을 때도 문사상(文辭上)의 다른 사람과 의논해야 할 때는 결코 자기 혼자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를 지을 때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였으므로 자하(子夏)와 같은 제자들도 한마디 거들 수가 없었다. 제자들이 ‘춘추’의 뜻을 받고 난 뒤에 공자가 말하였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일 터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춘추’ 때문일 터이다.”』

 그런데 바로 이 해에 또다시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모든 제자 중에서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안연’이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안연이 죽자, 공자는 말하였다. “하늘이 날 망치는구나.”』라고, 아주 짤막한 언급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글은 ‘논어’에도 씌어 있습니다. ‘하늘이 날 망치는구나.’의 원문은 ‘천상여’(天喪予)입니다. 여기에서 ‘천’은 ‘하늘’ ‘하느님’ ‘운명’ ‘세상’ ‘ 경우’ ‘자연’ 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상’은 ‘망’(亡)의 뜻으로 ‘나를 망쳤다.’라는 의미이지요. 얼마나 애통했으면 ‘하늘이 날 망쳤다.’라고 말했겠습니까? ‘논어’에는 ‘안연’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더 나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안연이 죽으니, 공자는 매우 애통해하였습니다. 이에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그를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또, 안연이 죽으니, 공자의 제자들이 후하게 장사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옳지 않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들이 안연을 후하게 장사 지내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회(回)는 나를 아버지처럼 대하였는데, 나는 회를 자식같이 대하지 못했다. 이는, 내 잘못이 아니라, 저 제자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연이 죽었을 때였지요. 그의 아버지 안로(顔路)가 공자에게 ‘수레(공자가 타는 것)를 팔아서 안연의 곽(槨)을 마련하면 어떨까요?’라고 청했습니다. ‘안로’ 역시 공자의 제자입니다. ‘곽’은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지요? 그러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재주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각각 자식을 사랑하게 마련이오. 리(鯉)가 죽었을 때도 관은 있었으나 곽은 없었소. 내가 수레를 팔아서 곽을 마련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대부의 끝자리에 있었기에 걸어 다니는 게 옳지 않기 때문이었소.”
 ‘각각 자식을 사랑한다.’의 원문은 ‘각언기자야’(各言其子也)이고, ‘내가 대부의 끝자리에 있었다.’의 원문은 ‘종대부지후’(從大夫之後)입니다. 
 어쨌든 ‘안회’는 애공 14년인 기원전 48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자의 나이 71세 때였습니다.
 여러 문헌에서 안회는 공자보다 30살이 아래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회가 세상을 떠난 것은, 공자의 나이 71세 때였음도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하니 안회는 41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만약에 ‘안회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공자보다 명을 달리했다.’라는 말이 옳다면, 안회는 공자가 61살 때에 타계한 것이 됩니다. 공자는 68세 때에 노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공자가 61세 때에는 유랑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그해 여름에 공자는 3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던 진(陳)나라에서 채(蔡)나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러니 앞의 이야기와 모든 상황이 맞지 않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안회는 기원전 521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71세인 기원전 481년에 타계하였다면 41세가 됩니다.
 그런데도 ‘공자가어’의 ‘제자해’를 살펴보면 ‘안회의 나이 스물아홉이 되어 이미 백발이 되었다. 31세로 요절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회는 공자보다 40살이 아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자는 56세부터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고 안회도 함께 고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안회 나이는 고작 16세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어쩌면 안회가 어린 시절부터 공자의 사랑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공자 어머니의 성이 ‘안씨’(顔氏)이니 외가의 친척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공자 가까이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으며 일찍이 공자의 제자가 되었을 법도 합니다.
 또, 안회가 단명하였음은 믿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가난하였기에 영양실조로 오래 견디기 어려웠겠지요. 그런 상태에서 너무 학문에 몰두한 일도 단명을 재촉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성싶습니다. 그리고 이 해에 공자의 제자인 ‘사마우’도 타계하였다고 전합니다. 공자는 안회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일러 주어 받들기에 게으르지 않은 사람은 회(回) 한 사람뿐이었다.”
 또, 공자는 말했습니다.
 “애석하다! 나는 그가 앞으로 나가는 것만 보았지, 그가 멈추어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한 번은 애공(哀公)이 물었습니다.
 “제자 가운데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안회라는 사람이 배움을 좋아하고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명하여 죽고 없으니, 아직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 공자의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렇듯 아들 ‘백어’를 먼저 보내고 가장 사랑하는 제자 ‘안회’까지 잃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이 스트레스로 인하여 공자는 이미 마음의 병을 얻었을 게 분명합니다.
 공자가 72세가 되었습니다. 때는 기원전 480년이었지요. 그런데 또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말입니까. 공자의 든든한 ‘보디가드’였던 ‘자로’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그다음 해로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죽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기록에 ‘자로’는 기원전 480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애공 15년입니다.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습니다. 요약해 보겠습니다.
 ‘자로’와 함께 ‘자고’(子羔)는 위나라 영공(靈公)의 큰딸 아들인 공회(孔悝) 아래에서 가신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회’가 ‘괴외’(蒯聵)에게 붙잡히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괴외’는 ‘영공’과 ‘남자’(南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지요. 그런데 ‘남자’의 횡포를 보다 못해, 그는 어머니인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전에 이 계획이 발각되어 그는 송(宋)나라로 도망갔다가 뒤에 다시 진(晉)나라로 피했습니다. 나중에 그가 출공(出公)을 추방하고 영공의 뒤를 이으려는 계략을 꾸미면서 공회를 사로잡는 사건이 벌어졌지요. 그런데 ‘출공’은 ‘괴외’ 자기 아들입니다. 이때, ‘자고’는 이미 글렀다고 여기며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성문 밖에 이르러서, 그 소식을 듣고 ‘출공’을 도우려고 달려오던 ‘자로’와 우연히 만났습니다. ‘자고’가 말했습니다.
 “출공은 달아났고 성문은 벌써 닫혔네. 그러니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네. 공연히 들어가서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네.”
자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 따랐을 리가 없지요. 그가 말했습니다.
 “임금의 녹을 받아먹는 자로서 임금이 어려움에 부닥친 것을 보고 어떻게 몸을 피하겠는가?” 
 이 당시에 자로는 ‘공회’의 관하에 있는 조그만 고을의 지방관으로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자고’는 성 밖으로 달아났고, ‘자로’는 괴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하게 누대로 올라가고 있는 괴외를 향하여 호통을 쳤습니다.
“공회를 이용하려는 것은 잘못이오. 그를 가두어 두어도 공격하는 군사는 오고야 말 것이오.”
 그러나 괴외는 자로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격분한 자로가 누대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괴외는 부하들에게 자로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명에 의하여, 석걸(石乞)과 우염(盂黶)이라는 이름의 날랜 검객 두 명이 달려와서 칼을 휘둘렀습니다. 자로의 관의 끈이 끊어지고 얼굴에서는 피가 흘렀습니다. 자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관의 끈을 단정히 여미며 말했습니다.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지 않는다.”
 이는, 원문으로 ‘군자사 관불면’(君子死 冠不免)입니다. 그리고 자로는 자객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자로의 묘는 하북성 개현(開縣)에 있다고 합니다. 그의 시신은 찢겨서 동문 앞에 효시가 되었다고도 하며, 젓갈로 담가졌다고도 합니다. ‘예기’의 ‘단궁’ 편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공자가 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중정(中庭)에서 곡하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조문하였다. 공자가 그에게 예를 표하였다. 그 조문객이 곡하기를 마치자, 공자가 그에게 어찌 자로가 죽었느냐고 물었다. 조문객이 ‘젓갈로 담가졌습니다.’라고 말하니, 공자는 집안의 젓갈 독을 엎어 버리게 하였다.』

 자로가 ‘관’을 고쳐 쓰고 죽음을 맞는 장면에 눈물이 납니다. ‘관’이란 바로 ‘선비’의 상징이지요. 그렇기에 ‘관’은 화려하기보다 검소하기를 따라야 합니다. 이 관에 대한 공자의 말이 ‘논어’에 담겨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삼으로 만든 관을 쓰는 것이 옛날의 ‘예’지만, 지금은 실로 짠 것을 쓰니 검소하다고 하겠다. 나도 여러 사람이 행하는 ‘예’를 따르겠다.”
 여기에서 ‘삼으로 만든 것을 쓰는 것이 옛날의 예’라는 말의 원문은 ‘마면예야’(麻冕禮也)입니다. ‘마면’은 ‘마포에다 적흑색 물을 들여서 만든 관’을 말합니다. 삼실에는 규격이 있어서, 2천 4본의 가는 삼실로 짰다고 합니다. 세밀하게 만들어야 하므로 아무나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 했지요. 그리고 ‘지금은 실로 짠 것을 쓰니 검소하다고 하겠다.’라는, 그 원문이 바로 ‘금야순 검’(今也純 儉)입니다. ‘순’(純)은 ‘굵은 실’을 말하고, ‘검’(儉)은 ‘손이 덜 가서 만들기 쉬움’을 이릅니다. 
 죽으면서까지 ‘관’을 바르게 쓴 ‘자로’의 이야기를 듣는 공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프게 찢어졌겠지요. 아들이 죽고, 그처럼 끔찍이도 사랑한 ‘안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것마저 모자라서 ‘자로’까지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강철 같은 공자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일시에 몰려드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웠겠지요.
 ‘사마천’의 ‘공자세가’에는 이런 내용이 씌어 있습니다. 

『공자가 병이 났다. 그러자 자공이 뵙기를 청했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문 앞을 거닐고 있다가 덥석 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賜)야,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말을 마치고, 공자는 탄식하며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진다는 말인가! 기둥이 부러진다는 말인가! 철인(哲人)이 죽어 간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눈물을 흘렸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장사를 치를 때에 하나라 사람들은 유해를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으며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서 사람들의 제사 받는 꿈을 꾸었다.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는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논어’에도 실려 있습니다.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봉황새도 날아들지 않고 황하에서는 그림도 나오지 않으니 내 일생도 아마 끝장난 모양이다.”(자왈 봉조부지 하불출도 오이의부.: 子曰 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논어 9-8】

 여기에서 말하는, ‘봉조’(鳳鳥)는 ‘봉황새’를 이르는데, ‘아름다운 날개를 지닌 조류의 왕’입니다. 어진 임금이 세상에 나오면 춤춘다는 상서로운 새입니다. 그리고 ‘하도’(河圖)에서 ‘하’는 ‘황하’를 가리키며, ‘도’는 ‘팔괘(八卦)의 근본이 된 그림’을 나타냅니다. 복희(伏羲) 때에 황하에서 용마가 이 그림을 등에 업고 나왔다고 하여, 성인이 나타날 징조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즉, 하수 가운데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그림을 지고 나타나서 ‘복희씨’(伏羲氏)가 그것을 보고 팔괘의 그림을 그렸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입니다. 또 ‘이의부’(已矣夫)는 ‘이제는 끝이구나.’라고 하는 절망의 말입니다.
 이번에는 ‘공자가어’에 나타난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손으로 지팡이를 끌며 문간에서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지려느냐? 대들보가 내려앉으려느냐? 착한 사람이 자빠지려느냐?”
공자는 노래를 마치고 문간에 잠시 앉아 있었다. 자공이 그 노랫소리를 듣고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태산이 무너진다면 저는 장차 무엇을 우러러본다는 말입니까? 대들보가 내려앉는다면 저는 장차 어디에 기댄다는 말입니까? 착한 사람이 자빠진다면 저는 장차 누구를 본받고 산단 말입니까? 선생님께서는 장차 병환이 생기신다는 말씀입니까?”
공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야, 너는 어찌 그리 더디게 오느냐?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니 두 기둥 사이에 제사 음식을 갖추어 놓고 앉아 있었다. 옛날에 하후씨는 동쪽 뜰에 빈소를 마련했고 은나라 사람은 두 기둥 사이에 빈소를 마련했으며, 또 주나라 사람은 서쪽 뜰에 빈소를 마련했다. 이 빈소라는 것은 죽은 사람을 손님과 같이 대접한다는 의미에 따라서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은나라 사람의 행세를 한 셈이다. 천하에 밝은 임금이 없으니 그 누가 나를 알아주겠느냐? 나는 아마도 머지않아서 죽게 될 것이다.”』

 다시 ‘사마천’의 ‘공자세가’로 돌아가면, 그다음에 일이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그 후 7일이 지나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73세로, 그것은 노나라 애공 16년 4월 기축일(己丑日)의 일이었다.』

 그런데 일설에는, 4월에는 ‘기축일’이 없으므로 이는 ‘을축일’(乙丑日)의 오기라고 말합니다. ‘을축일’은 18일입니다. 그러니까, 4월 18일이 됩니다. 공자가 눈을 감으니, 애공이 애도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이 뇌문(誄文)에는 이런 내용의 글귀가 있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여 이 한 노인마저 남기어 놓지 않고 데려가고 나 한 사람만 여기다가 버리어 두어서 외로움으로 울게 하는구나! 아, 슬프다, 이부(尼父)여! 내가 다시는 스스로에 얽매이지 않으리라.’
 여기에서 ‘이부’(尼父)는 ‘공자를 아버지처럼 높여서 부르는 말’이지요. 이에 대한 자공의 말은 ‘공자세가’와 ‘공자가어’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세가’의 내용은, 너무 과격할 뿐만 아니라, 언변이 좋은 자공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기에 ‘공자가어’의 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자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애공)께서는 노나라에서 세상을 마치지 않으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를 잃어버리면 세상이 어두워지고 명분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참담해지며, 또는 올바른 뜻을 잃어버리면 어두워지고 정당한 처소를 잃어버리면 참담해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임금(애공)께서는 선생님이 살아 있으실 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신 뒤에야 슬퍼하시니 이것은 올바른 예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나 같은 못난 사람’이라고 자칭하시는 말씀도 대체 천자가 아니고는 ‘나 한 사람’이란 말은 함부로 쓰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말씀은 임금(애공)께서 두 가지 모두를 예에 어긋나게 하신 겁니다.”』


 그 후의 일은,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는 노나라 도성 북쪽의 사수(泗水) 부근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슬픔으로 3년 상을 다 마치고서 서로 이별을 고하고 헤어졌다. 헤어질 때 한바탕 통곡하고 각자 다시금 애도를 다 하였으며, 어떤 제자는 다시 머무르기도 하였다. 오직 자공만이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6년을 지키다가 떠나갔다. 후에 공자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무덤가에 와서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숫자가 100여 가구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이곳을 ‘공자 마을’이라고 불렀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새해를 맞을 때마다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고, 많은 유생도 이곳에 모여서 예의를 논하고 향음례(鄕飮禮)를 행하며 활쏘기를 열었다. 공자의 무덤은 크기가 1경(頃, 약 100a로, 1만 ㎡)이나 되었다. 공자가 살던 집과 제자들이 쓰던 내실이 훗날에 공자의 묘(廟)로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공자가 사용하던 거문고나 수레나 서적 등도 그곳에 소장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한(漢)나라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다. 고황제(高皇帝, ‘유방’임)가 노나라를 지나게 되었을 때, 태뢰(太牢, 고대에 황제가 제사 지낼 때 소와 양과 돼지의 희생제물을 모두 준비한 경우)로써 공자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부터 제후나 경대부나 재상이 부임하면 항상 먼저 공자의 묘를 참배한 연후에 정사에 임하였다.』

 또한, ‘공자가어’에는 당시에 공자의 장례에 대한 처음부터 끝까지의 절차를 공자의 제자인 ‘공서적’이 맡아보게 되었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반함(飯含)에는 쌀 세 숟가락을 썼고 감습(歛襲)에는 옷을 열한 가지 썼는데, 그 뒤에 조복 한 벌을 더 썼다. ‘관’(冠)은 장보관을 썼고 패물은 다섯 가지로 된 상환(象環, 코끼리 뼈로 만든 구슬)에다가 인장 끈을 매었다. 관(棺)과 곽(槨)은 두께가 4치로 된 오동나무 널을 썼고 그 위에 두께 5치의 잣나무를 겹으로 썼으나 양쪽 곁으로는 삽(翣, 큰 부채 모양으로 된 것을 관의 좌우에 장식하는 것)을 두었다. 원래 상여(喪轝)에 있어서 피(披)로 꾸민 것은 주나라 식이고 숭(崇)으로 꾸민 것은 은나라 식이며 조(旐)로 꾸민 것은 하나라의 식이다. 그러나 공자의 초상에는 이 삼왕(三王, 하 ․ 은 ․ 주)의 예를 겸해서 썼다. 이것은 오로지 선생님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 것이며, 또 옛날의 예법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었다. 장지(葬地)는 노나라 북쪽 사수(泗水) 위로 결정했다. 광중(壙中, 무덤 속)의 깊이는 샘물이 솟아 나오지 않을 만큼 했고, 봉분(封墳, 흙을 올려 덮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은 도끼 형상으로 높이 넉 자를 쌓았다. 묘 주위에는 잣나무를 심어서 표를 했다. 장례를 마치자, 제자들은 묘 곁에 집을 짓고 심상(心喪, 마음으로 상을 입는 것)으로 선생님의 복을 입는 예법을 행했다.』

 아, 이로써 나 또한 공자와 일단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네 걸음은 구름처럼 가벼웠다.
길이 멀고 험할수록
너는 나보다 한 발짝 앞에서
이 땅의 시린 가슴 조심스레 두드려 가며
산을 만나면 산을 넘고
강과 마주치면 강을 건넜다.
그래도 내 젊음이란 천방지축이어서
내민 네 손길 뿌리치고
저만치 홀로 달려가 보기도 했지만,
결국 작은 바람에도 내 몸이 흔들렸고
생각보다 빠르게 천파만파 세월은 
주름진 늙음 속으로 나를 몰아갔다.
이제 내 발걸음이 무거우니 어찌하겠는가.
손을 내밀면 닿을 자리에
늘 너는 있었는데, 그 믿음이 있었는데
미처 앞선 중심에 눈뜨지 못했으니.
- 졸시 ‘믿음의 지팡이’ 전문


 문득,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손으로 지팡이를 끌며 그의 집 문간에 서 있는’ 공자의 병든 모습이 떠오릅니다. 참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한꺼번에 그리 타계하지만 않았다면 절대로 건강이 그처럼 나빠질 공자가 아니었지요. 
 더욱이 ‘태산이 무너진다면 저는 장차 무엇을 우러러본다는 말입니까? 대들보가 내려앉는다면 저는 장차 어디에 기댄다는 말입니까? 착한 사람이 자빠진다면 저는 장차 누구를 본받고 산단 말입니까?’라는, 자공의 절규가 또 한 번 내 가슴을 적십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지팡이를, 사람들은 늙고 병들면 의지하게 됩니다. 나는, 그 지팡이가 ‘믿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는 ‘믿음’이란, ‘하늘에 대한 믿음’을 말하지요. 즉, ‘천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모두 하늘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이 시키는 일’을 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노년이 되어서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인생에서 ‘믿음’이 목적으로 될 수는 없습니다. 마치 길을 걸어갈 때 ‘지팡이’가 목적이 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해가 잘 안됩니까? 다시 말하면, 길을 걸어갈 때 ‘지팡이’는 걷는 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걷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가다가 보면 목적지에는 저절로 닿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믿음’은 삶에 도움을 줄 뿐이고, ‘아름다운 삶’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