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쿠러, 콩쯔

13. 백성이 흘러내리듯 하는 힘은 맞지 못한다(글: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4. 3. 07:33

13. 백성이 흘러내리듯 하는 힘은 막지 못한다



 기원전 319년, 위(魏) 나라 혜왕(惠王)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맹자가 54살 때의 일이었지요. 맹자가 혜왕의 아들인 ‘양양왕’(梁襄王, 이름은 赫)을 만나고 나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멀리서 바라보아도 임금 같지 않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도 두려워할 만한 데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졸연히 ‘천하가 장차 어떻게 될까요?’라고 묻기에 내가 ‘하나로 정해지겠습니다.’(定于一 정우일)라고 하였다. ‘누가 통일할까요?’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통일할 겁니다.’라고 하였다. ‘누가 그의 편을 들까요?’ 묻기에 내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하에 그의 편을 들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저 밭의 싹을 아십니까? 칠팔월(周나라 달력으로 칠팔월은 지금의 육칠월에 해당된다고 함)에 날이 가물면 싹이 마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뭉게뭉게 구름이 일어나서 소나기를 쏴 하고 퍼붓게 되면 싹들이 불끈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천하의 임금들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만약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임금이 나타난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고개를 빼고서 그를 바라볼 겁니다. 참으로 그렇게만 된다면 그런 임금에게로 가는 백성들이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할 테니, 그렇게 몰려드는 힘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孟子見梁襄王, 出語人曰 ‘望之不似人君 就之而不見所畏焉. 卒然問曰 <天下 惡乎定?> 吾對曰 <定于一> <孰能一之?> 對曰 <不嗜殺人者能一之> <孰能與之?> 對曰 <天下莫不與也. 王知夫苗乎? 七八月之間, 旱則苗槁矣. 天油然作雲, 沛然下雨, 則苗浡然興之矣. 其如是, 孰能禦之? 今夫天下之人牧 未有不嗜殺人者也. 如有不嗜殺人者, 則天下之民, 皆引領而望之矣. 誠如是也, 民歸之, 由水之就下, 沛然誰能禦之?>’(맹자견양양왕, 출어인왈 ‘망지불사인군, 취지이불견소외언. 졸연문왈 <천하 오호정?> 오대왈 <정우일> <숙능일지?> 대왈 <불기살인자능일지.> <숙능여지?> 대왈 <천하막불여야. 왕지부묘호? 칠팔월지간, 한즉묘고의. 천유연작운, 패연하우, 즉묘발연흥지의. 기여시, 숙능어지? 금부천하지인목 미유불기살인자야. 여유불기살인자, 즉천하지민, 개인령이망지의. 성여시야, 민귀지, 유수지취하, 패연수능어지?>’) 1-6]

 앞의 ‘금부천하지인목’(今夫天下之人牧)에서 ‘인목’은 ‘임금’을 이릅니다. 목동이 가축을 돌보는 것처럼 임금이 백성을 돌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유불기살인자’(未有不嗜殺人者)는 이중부정으로 ‘모두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자뿐’이라는 뜻이지요. 이는, 한 마디로 ‘전쟁을 좋아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맹자는 정말로 전쟁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군대의 진을 잘 펴고 전쟁을 잘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큰 죄인이다. 임금이 어진 정치를 좋아하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게 된다. 옛날에 탕왕이 남쪽으로 가서 정벌하면 북쪽 오랑캐들이 ‘왜 우리를 뒤로 돌리느냐?’라고 원망했고, 또 동쪽으로 가서 정벌하면 서쪽 오랑캐들이 ‘왜 우리를 뒤로 돌리느냐’라고 원망했다. 무왕이 은나라 주 임금을 칠 때에는 가죽 전차가 3백 대에다 용사가 3천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무왕이 ‘무서워 마라. 나는 너희를 평안케 해주러 왔다. 그러니까 백성을 적으로 삼지 않는다.’라고 말하자, 마치 산이라도 무너지듯 은나라 백성이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렸다. ‘정벌’이란 말은 ‘바로잡는다.’라는 뜻이다. 각각 자기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니, 어찌 싸움을 하겠느냐?”

 [孟子曰 ‘有人曰 <我善爲陣, 我善爲戰> 大罪也. 國君好仁, 天下無敵焉. 南面而征北狄怨, 東面而征西夷怨, 曰 <奚爲後我?> 武王之伐殷也, 革車三百兩, 虎賁三千人. 王曰 <無畏, 寧爾也, 非敵百姓也.> 若崩厥角稽首. 征之爲言正也, 各欲正己也, 焉用戰?’(맹자왈 ‘유인왈 <아선위진, 아선위전> 대죄야. 국군호인, 천하무적언. 남면이정북적원, 동면이정서이원, 왈 <해위후아?> 무왕지벌은야, 혁거삼백량, 호분삼천인. 왕왈 <무외, 영이야, 비적백성야.> 약붕궐각계수. 정지위언정야, 각욕정기야, 언용전?’) 14-4]

 앞의 ‘남면이정북적원’(南面而征北狄怨)에서 ‘남면이정’은 ‘탕(湯)임금이 정벌에 나섰을 때의 이야기’이랍니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등문공 장구 하5) ‘탕임금이 처음 갈(葛) 나라부터 정벌하기 시작하여(갈백’葛伯‘이 수수와 밥을 나르는 아이를 죽이고 그 음식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열 한 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천하에 대적할 나라가 없었다.’라고요. 그리고 ‘혁거삼백량’(革車三百兩)에서 ‘혁거’는 ‘바퀴와 채(수레의 앞쪽에서 양옆으로 길게 댄 나무)를 가죽으로 싼, 전쟁에 쓰는 수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량’(兩)은 량(輛)과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는, 수레를 세는 단위입니다. 또, ‘약붕궐각계수’(若崩厥角稽首)에서 ‘붕’은 ‘사람의 모임이 끼리끼리 갈라진다.’라는 형상의 글자인데 ‘짐승의 뿔이 아래로 찌르는 것 같이 머리를 조아려서 절을 하는 것’을 이른답니다.
 위(魏) 나라의 양왕(襄王)에게 실망한 맹자는 다시 제(齊) 나라로 갔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제(齊) 나라에서는 위왕(威王)이 죽고 선왕(宣王, 재위 기원전 319년 ~ 기원전 301년)이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 좋은 다스림을 펼치려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었지요. 아마도 맹자는 그러한 선왕이 마음에 들었던 듯싶습니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덕이 어떠해야 ‘왕의 길’을 갈 수 있습니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며 ‘왕 노릇’을 하면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과인 같은 사람도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제가 ‘호흘’(胡齕, 선왕의 측근에서 시종하던 신하의 이름)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왕께서 당 위에 앉아 계시다가 소를 끌고 당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소는 어디로 끌고 가는 거냐?’라고 하시니, 대답하기를 ‘종(鍾)에다가 피를 바르려고 합니다.’라고 하여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놓아주어라. 나는 그 소가 벌벌 떨며 죄 없이 죽을 자리로 나가는 것 같아서 차마 못 보겠다.’라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그러시면 종에다 피 바르는 일을 그만두라는 말씀이십니까?’라고 하니, 말씀하시기를 ‘어찌 그만둘 수야 있겠느냐? 양으로 바꿔서 하라.’라고 하셨다는데, 모르긴 합니다마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臣問之胡齕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 曰 <牛何之?> 對曰 <將以釁鍾>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觫, 若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廢釁鍾與?> 曰 <何可廢也? 以羊易之>’ 不識有諸.”(“신문지호흘왈 ‘왕좌어당상, 유견우이과당하자, 왕견지, 왈 <우하지?> 대왈 <장이흔종> 왕왈 <사지, 오불인기곡속, 약무죄이취사지> 대왈 <연즉폐흔종여?> 왈 <하가폐야? 이양역지>’ 불식유저.”) 1-7]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면 족히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왕께서 소를 아껴서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정말 왕께서 차마 보실 수가 없으셔서 그러신 줄 압니다.”

 [是心足以王矣. 百姓皆以王爲愛也. 臣固知王之不忍也(시심족이왕의. 백성개이왕위애야. 신고지왕지불인야) 1-7]

 “그렇습니다. 정말 그런 말을 하는 백성이 있었습니다. 제 나라가 비록 작으나 내 어찌 한 마리의 소를 아끼겠습니까? 그 소가 무서워 떨면서 죄 없이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양으로 바꾸라고 했습니다.”
 “왕께서는 백성들이 ‘왕께서 소를 아끼신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양을 가지고 큰 소와 바꾸어라.’라고 하셨으니 저들이야 그런 사실만 알 뿐이지 어떻게 왕의 참뜻을 알겠습니까? 왕께서 만약 죄 없이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나 어찌 구별이 있겠습니까?”

 [王無異於百姓之以王爲愛也. 以小易大, 彼惡知之? 王若隱其無罪而就死地, 則牛羊何擇焉?(왕무이어백성지이왕위애야. 이소역대, 피오지지? 왕약은기무죄이취사지, 즉우양하택언?) 1-7]

 그 말에 왕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대체 무슨 마음에서였을까요? 나는 재물을 아끼려고 한 것은 아니나, 그것을 양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나더러 재물을 아꼈다고 말하는 것도 마땅하겠군요.”
 “걱정하실 것은 없으십니다. 그게 바로 인(仁)을 베푸는 방법입니다. 소가 끌려가는 것은 보시고 양이 끌려가는 것은 보시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새나 짐승을 대할 때에 그것들이 살아있는 것만을 보고 죽은 것은 차마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들은 푸줏간을 멀리 합니다.”

 [無傷也. 是乃仁術也. 見牛未見羊也. 君子之於禽獸也. 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 是以君子遠庖廚也(무상야. 시내인술야. 견우미견양야. 군자지어금수야. 견기생불인견기사, 문기성불인식기육. 시이군자원포주야) 1-7]

 “그런데 이런 마음이 ’왕 노릇‘을 하는 데 적합하다는 까닭은 어째서입니까?”
 “어떤 사람이 왕께 아뢰기를 ‘제 힘은 삼천 근을 들 수 있으나, 새의 깃 하나를 들 수는 없습니다. 시력이 가을철에 가늘어진 짐승의 털끝을 살필 수 있지만, 한 수레의 땔나무는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有復於王者曰 吾力足以擧百鈞, 而不足以擧一羽. 明足以察秋毫之末, 而不見輿薪. 則王許之乎? 유복어왕자왈 오역족이거백균, 이부족이거일우. 명족이찰추호지말, 이불견여신. 즉왕허지호? 1-7 *백균‘百鈞’에서 1균‘鈞’은 30근‘斤’. 1근‘斤’은 16냥‘兩’. 1냥‘兩‘은 24수’銖‘. 1수’銖‘는 6두’豆‘. 1두’豆‘는 16서’黍‘. 서’黍‘는 ’기장‘을 말함]

 “안 될 말입니다.”
 “이제 은혜가 족히 짐승에게까지 미치면서 공덕이 백성에게 이르지 못하는 까닭이 어째서입니까? 그러니 새털 하나가 들리지 않는 것은 힘을 쓰지 않기 때문이요, 수레에 실은 땔나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시력을 쓰지 않기 때문이요, 백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왕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今恩足以及禽獸, 而功不至於百姓者, 獨何與? 然則一羽之不擧, 爲不用力焉, 輿薪之不見, 爲不用明焉, 百姓之不見保, 爲不用恩焉. 故王之不王, 不爲也, 非不能也.(금은족이급금수, 이공부지어백성자, 독하여? 연즉일우지불거, 위불용역언, 여신지불견, 위불용명언, 백성지불견보, 위불용은언. 고왕지불왕, 불위야, 비불능야.) 1-7]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건너뛰는 것을 남에게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참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을 위해 팔다리 주물러 드리는 것을 남에게 ‘나는 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이는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왕 노릇’하지 않는 것은 태산을 옆에 끼고서 북해를 건너뛰는 따위가 아닙니다. 왕께서 ‘왕 노릇’하지 않는 것은 어른에게 팔다리 주물러 드리는 따위의 일입니다. 내 집 노인을 위하는 마음으로 남의 집 노인을 위하고, 내 집 어린이를 귀여워하는 마음으로 남의 집 어린이를 귀여워한다면 천하를 손바닥 위에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저울로 달아 본 뒤에라야 가볍고 무거움을 알 수 있고, 자로 재어 본 뒤에라야 길고 짧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이 모두 그렇지만, 마음이 더욱 심합니다. 왕께서 부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왕께선 군대를 일으켜서 병사와 신하를 위태롭게 하고, 제후들에게 원한을 맺은 뒤에라야 마음이 유쾌하시겠습니까?”

 [挾太山以超北海 語人曰我不能 是誠不能也 爲長者折枝 語人曰我不能 是不爲也 非不能也 故王之不王, 非挾太山以超北海之類也. 王之不王, 是折枝之類也. 老吾老, 以及人之老, 幼吾幼, 以及人之幼, 天下可運於掌. 權然後 知輕重, 度然後 知長短. 物皆然 心爲甚. 王請度之. 抑王興甲兵, 危士臣, 構怨於諸侯, 然後快於心與?(협태산이초북해 어인왈아불능 시성불능야 위장자절지 어인왈아불능 시불위야 비불능야 고왕지불왕, 비협태산이초북해지류야. 왕지불왕, 시절지지류야. 노오로, 이급인지로, 유오유, 이급인지유, 천하가운어장. 권연후 지경중, 탁연후 지장단. 물개연 심위심. 왕청탁지. 억왕흥갑병, 위사신, 구원어제후, 연후쾌어심여?) 1-7]

 “아닙니다. 내가 어찌 그런 일을 즐거워하겠습니까? 다만 크게 바리는 바가 있어서 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왕께서 크게 바라는 바를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왕이 어색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웃기만 하자, 맹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이 입에 부족하십니까? 가볍고 따뜻한 옷이 몸에 부족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운 여자가 눈에 차지 않으십니까? 춤과 노래가 보고 듣기에 즐겁지 않으십니까? 가까이 두고 마음을 주는 신하들이 부리기에 불편하십니까? 그런 것들은 왕의 신하들이 모두 잘 해드릴 터인데, 어찌 이런 것들 때문이라고 하겠습니까?”

 [爲肥甘不足於口與? 輕煖不足於體與? 抑爲采色不足視於目與? 聲音不足聽於耳與? 便嬖不足使令於前與? 王之諸臣, 皆足以供之, 而王豈爲是哉? 위비감부족어구여? 경난부족어체여? 억위채색부족시어목여? 성음부족청어이여? 편폐부족사령어전여? 왕지제신, 개족이공지, 이왕기위시재? 1-7]

 “아닙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은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크게 원하시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땅을 넓히고 진 나라와 초 나라를 엎드려 절하게 하며, 중국에 큰 힘으로 서서 사방의 오랑캐들을 다스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일을 하면서 그런 바람을 가지신다면, 이는 마치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然則王之所大欲, 可知已. 欲辟土地, 朝秦楚, 莅中國, 而撫四夷也. 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 연즉왕지소대욕, 가지이. 욕벽토지, 조진초, 이중국, 이무사이야. 이약소위, 구약소욕, 유연목이구어야 1-7]

 “그토록 심하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그보다 더욱 심할 겁니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은, 비록 물고기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뒤따르는 후환은 없습니다. 그러나 왕이 전쟁을 일으켜서 그러한 소망을 이루려고 한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서 하여도 뒤에 반드시 재앙이 따릅니다.”

 [殆有甚焉. 緣木求魚, 雖不得魚, 無後災, 以若所爲, 求若所欲, 盡心力而爲之, 後必有災 태유심언. 연목구어, 수부득어, 무후재, 이약소위, 구약소욕, 진심력이위지, 후필유재 1-7]

 “그 말씀을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추(鄒) 나라와 초(楚) 나라가 싸운다면, 왕께선 누가 이긴다고 생각하십니까?”
 “초 나라가 이기겠지요.”
 “사해 안의 땅에 사방 천리의 땅을 가진 나라가 아홉인데, 제나라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제 제나라 혼자서 다른 여덟 나라를 굴복시키려고 하는 것이 추 나라가 초 나라를 대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 근본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지금 왕께서 어진 다스림을 베푸시어 천하의 벼슬 사는 사람에게 모두 왕의 조정에 서기를 바라게 하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누가 대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海內之地, 方千里者九, 齊集有其一, 以一服八, 何以異於鄒敵楚哉? 蓋亦反其本矣. 今王發政施仁, 使天下仕者, 皆欲立於王之朝. 其如是, 孰能禦之?.(해내지지, 방천리자구, 제집유기일, 이일복팔, 하이이어추적초재? 개역반기본의.금왕발정시인, 사천하사자, 개욕립어왕지조. 기여시, 숙능어지?) 1-7]
 
 “내가 어리석어서 그런 경지에까지 이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바라건대, 선생께서 내 뜻을 도와서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비록 불민하나, 그런 다스림을 한 번 펴보겠습니다.”

 이어서 맹자는 선왕에게 ‘무엇보다 먼저 백성들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라고 역설하고, 그 바탕 위에 ‘학교 교육을 근엄히 하고 아울러서 효도와 우애의 바른길을 가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不爲者 與不能者之形 何以異? 불위자 여불능자지형 하이이?)라고 묻는, 제 나라 선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습니다. 그렇지요.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확실히 다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이 미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나이를 많이 먹고 보니, 어지간한 일에는 뒤로 물러앉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서기 좋아하니 꽃을 못 피우는 걸까
 오히려 숨었기에 저리 환한 제주한란
 그 모습 닮아 보려고 내 마음에 발을 친다.

 햇빛도 더욱 맑게 조금씩 걸러 담으면
 일어서는 송림 사이 산바람은 다시 불고
 물소리 안고 잠드는 원시 숲이 열린다.

 반그늘 딛고 사니 모든 일이 편한 것을
 이리 눈감고 앉으면 찾아오는 휘파람새
 먼 이름 가깝게 불러 꽃과 향기 빚어 본다.
             -졸시 ‘내 마음에 발을 치고’ 

 나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작은 농장을 가꾸면서 제주한란과 자주 만나곤 했습니다. 그 기품으로 친다면 어느 꽃이 제주한란을 따라오겠습니까? 그러나 제주한란은 앞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서 바람과 벗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그야말로 ‘군자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문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 들고 나서는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게 사니까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제 나는, 남에게 져 줄 수 있는 용기를 지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뻣뻣해진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젊게 살려면 나긋나긋하게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바람이 불면 일제히 머리를 숙이는 풀들처럼, 그렇게 유연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러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글: 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