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악기론

제16절, '언론에 질서가 있는 것'에 근심이 없는 게(역: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16. 13:31

제16절 ‘언론에 질서가 있는 것’에 근심이 없는 게

 論倫無患樂之情也 欣喜歡愛樂之官也 中正無邪 禮之質也 莊敬恭順 禮之制也 若夫禮樂之施於金石 越於聲音 用於宗廟社稷 事乎山川鬼神 則此所與民同也(논륜무환락지정야 흔희환애악지관야 중정무사 예지질야 장경공순 례지제야 약부례락지시어금석 월어성음 용어종묘사직 사호산천귀신 즉차소여민동야).

 ‘언론에 질서가 있는 것’(논륜)에 근심이 없는 게 ‘악’(음악)의 ‘정’(인정)이다. 너무 좋아서(흔희) 기쁜 마음으로 아낌(환애)은 ‘악’(음악)의 ‘직분’(官: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다. 바르고 뜻에 맞아서 어긋남이 없음은 ‘예’(예절)의 근본(質)이다. 장엄하고 삼가며 공손하고 고분고분함은 ‘예’(예절)의 ‘법도’(制)이다. 그런 뒤에 무릇 ‘예’와 ‘악’을 ‘금석의 악기’에 베풀고 ‘성음’(목소리)에 올려서 ‘종묘사직’에 쓰고 ‘산천’과 ‘귀신’을 섬기니 곧 이는 백성과 더불어 ‘같은 것’(성인이나 명왕과 일반 백성이 같은 입장에 서는 것)이다. (녹시 역)

 ‘시조’의 경우- <‘언론에 질서가 있는 것’(논륜)에 근심이 없는 게 ‘시조 내용’의 ‘정’(인정)이다. 너무 좋아서(흔희) 기쁜 마음으로 아낌(환애)은 ‘’시조 내용’의 ‘직분’(官: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다. 바르고 뜻에 맞아서 어긋남이 없음은 ‘시조 형식’의 근본(質)이다. 장엄하고 삼가며 공손하고 고분고분함은 ‘시조 형식’의 ‘법도’(制)이다. 그런 뒤에 무릇 ‘시조 형식’과 ‘시조 내용’을 ‘유곡절해’에 베풀고 ‘내재율’의 음률’에 올려서 ‘민족시’에 쓰고 ‘산천’과 ‘주재자’를 섬기니 곧 이는 백성과 더불어 ‘같은 것’(시조를 짓는 이나 일반 사람이 같은 입장에 서는 것)이다.>

[녹시 생각]
 ‘시조’는 작가나 일반 사람이나 모두 같은 입장으로 서야 한다. 아니, 설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시조’가 들어와서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사용하고 있는 속담이 모두 ‘시조 가락’인 것이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시조’로서 완벽한 모습을 갖출 수가 있다. 게다가 ‘속담’은 ‘형상화’의 보고이다. 이 형상화를 거치지 않고는 ‘좋은 시조’를 짓기 어렵다. 그런데 시골의 아낙네들이 무심코 툭 던지는 말 중에 이런 형상화의 문구를 많이 만날 수 있으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란 말인가?

 여기에서 다시 한번, 시조 형식상의 ‘유곡절해’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농촌에서 도리깨질할 때, 도리깨를 힘주어 잡는 게 바로 ‘흐름’이고, 그 도리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게 ‘굽이’이며, 들어 올린 도리깨 끝의 회초리를 공중에서 돌리는 게 ‘마디’이고, 그 돌린 회초리를 냅다 아래로 내려치는 게 ‘풀림’이다. 이 때 3장에서 ‘흐름’은 ‘초장’을 이루고 ‘굽이’는 중장을 이루며, ‘마디’는 종장의 앞 구(句)를 이루고 ‘풀림’은 종장의 마지막 구(句)를 이룬다. 
 적어도 지식인이라면, 아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시조 한 수쯤은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면 시조 짓기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겠지만,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우리의 생활과 풍습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시조를 아주 쉽게 익힐 수 있다. 왜냐하면, 시조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일상에서 ‘깎고 갈고 다듬고 간추려 온 틀’이요 숨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절로 발걸음이 자기 집으로 옮겨지듯이 시조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