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황
피는 신성하다.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피를 지니고 있다. 풀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풀들은 그 잎과 줄기에 우리의 피에 해당하는 투명한 액체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우리처럼 그 피의 색깔이 한 가지로 일정한 게 아니라, 희거나 붉거나 노란 빛깔의 피를 지닌 풀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씀바귀의 줄기를 자르면 흰 피가 흘러나온다. 너무나 그 빛깔이 희기 때문에, 불현듯 ‘이차돈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가 순교할 때에 그의 목에서는 흰 피가 뿜어져 나왔다고 하지 않는가. ‘씀바귀’를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곤 한다.
씀바귀의 그 피는 쓰다. 그런데 토끼는 그 쓴 풀을 잘도 먹는다. 쓰다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생약명으로도 ‘고채’(苦菜)라고 부른다. 씀바귀는 뿌리를 포함한 모든 부분을 약재로 쓰는데, 해열․건위․조혈․소종 등의 효능이 있다. 적용되는 질환은 소화불량, 폐렴, 간염, 음낭습진, 타박상, 외이염, 종기 등이다.
5월에서 7월에 걸쳐서 작은 가지에 피는 노란꽃이 아름답고, 봄에는 뿌리와 줄기 및 어린잎을 나물로 먹기도 한다. 씀바귀 외에도 민들레나 고들빼기 등이 모두 흰 피를 지닌다.
그런가 하면, ‘피나물’과 ‘매미꽃’은 우리처럼 붉은 빛깔의 피를 가지고 있다. 사실, 나는 피나물과 매미꽃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쯤, 나는 식물생태를 조사하기 위해 건봉산을 간 적이 있다. 그 때가 4월 말 경이었는데, 우리는 건봉사 인근의 개울가에서 황금빛 꽃을 피우고 있는 꽃들을 만났다. 나는 그 꽃을 ‘매미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문헌을 찾아보니, ‘피나물’과 ‘매미꽃’은 비슷하게 생겼으나 차이가 있었다. 즉, ‘피나물’은 주로 경기도 이북의 숲 속에 자생하고, ‘매미꽃’은 지리산 및 한라산 등에 자생한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풀들이 흘리는 피도, 피나물은 황적색(黃赤色)인 반면에, 매미꽃은 적색(赤色)이다. 그리고 개화기도 다르다. 피나물은 4월에서 5월까지인 데 비해, 매미꽃은 6월에서 7월에 걸쳐서 핀다. 그렇다면, 내가 건봉사 주위에서 만난 풀은 ‘피나물’이 분명하다.
피나물은 뿌리를 약재로 쓴다. 그렇기에 생약명으로 ‘하청화근’(荷靑花根)이라고 부른다. 진통․거풍․활혈․소종 등의 효능이 있다. 풍습으로 인한 관절염, 신경통, 몸이 피곤한 증세, 타박상, 습진 종기 등의 약재로 사용한다.
더욱 희한한 풀은 ‘애기똥풀’이다. 이 풀은 누른 빛깔의 피를 지니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주황(朱黃)빛이다. 학자들의 눈에는 그 빛깔이 ‘애기의 똥’ 빛깔처럼 보였던지, 이름을 그렇게 지어 놓았다. 두해살이풀이다. 키는 40cm 안팎이다. 잎은 무의 것과 닮았는데, 뒤집으면 분처럼 흰 빛깔을 내보인다. 봄철에 노란 꽃을 산형 꽃차례로 피운다. 4매의 꽃잎과 많은 수술을 지니고 있다. 열매는 삭과(蒴果)이다. 생약명으로는 ‘백굴채’(白屈菜)라고 부른다. 꽃을 포함한 줄기와 잎을 모두 약재로 쓴다. 성분으로는 진통작용을 하는 켈리도닌(Chelidonine)을 비롯하여 켈레리스린(Chelerythrine), 프로토핀(Protopine), 말릭산(Malic acid), 산구이나린(sanguinarine) 등을 함유한다. 진통, 진해, 이뇨, 해독 등의 효능이 있다. 기침, 백일해, 기관지염, 위장통증, 간염, 황달 위궤양 등에 약재로 사용한다.
어릴 때, 동네친구와 어쩌다가 싸움을 하게 되면, 코피가 먼저 터지는 쪽이 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피를 보면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하니, 풀도 피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함부로 대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