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박새/ 김 재 황 동박새 김 재 황 골마다 고운 그늘 작은 몸을 깃들인 숲 부리를 닦고 나서 햇살 모아 둥지 틀면 울다가 지친 바다가 꽁지깃에 다가온다. 함박눈 내린 날은 동백 잎에 꿈을 얹고 깊숙이 홀로 앉아 흰 사슴을 그려 보면 하늘가 파란 음성이 꽃잎처럼 떨어진다. 바람이 노는 소리 깊은 어둠 깨우는 날 웅크린 그 목숨은 고개 넘어 숨결 젖고 기도로 열린 가슴엔 바위섬도 흘러간다. (1991년) 뽑은 시조 2022.02.20
빨래/ 김 재 황 빨래 김 재 황 어차피 사는 일이 때가 끼는 것이라면 이따금 비눗물에 흠뻑 젖어 매를 맞고 오로지 줄에 매달려 춤을 열며 살겠다. (2021년) 뽑은 시조 2022.02.20
해돋이/ 김 재 황 해돋이 김 재 황 산에서 뜨는 해는 봉우리를 딛고 오니 즐거운 숲 마음에 안개구름 반기는 듯 이 세상 어진 사람이 산자락에 머문다. 바다에 뜨는 해는 수평선을 타고 오니 다시마 풀린 춤에 재갈매기 멋진 노래 이 세상 아는 사람이 바닷가를 고른다. 날마다 해가 뜨니 그 얼마나 고마운가, 세상이 새로 밝고 들녘에는 곡식 익고 스스로 태우는 베풂 곱게 안고 살겠다. (2021년) 뽑은 시조 2022.02.19
좋은 길/ 김 재 황 좋은 길 김 재 황 길손이 아닌 사람 이 세상에 있다든가 바쁘게 걷노라면 끝나는 게 삶인 것을 이어진 이승과 저승 좁은 길도 좋구나. (2021년) 뽑은 시조 2022.02.19
메아리/ 김 재 황 메아리 김 재 황 든 산이 깊을수록 더욱 크게 소리쳐라, 살자니 구름 끼듯 서러움이 담긴 가슴 비원 낸 목소리만큼 맑은 답을 얻는다. (2021년) 뽑은 시조 2022.02.19
주먹/ 김 재 황 주먹 김 재 황 가위엔 이기지만 보자기엔 지는 그것 구태여 왜 이름을 바위라고 하였을까, 유심히 바라다보면 깊은 뜻이 담긴다. 스스로 다잡고자 남모르게 불끈 쥐고 법보다 재빠르게 내밀 때도 있잖은가, 어떻게 놀리느냐에 가는 길이 갈린다. 눈앞에 내보이며 뭐가 있나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비었으니 없다고 해? 저마다 마음먹기니 내가 나를 잊는다. (2020년) 뽑은 시조 2022.02.18
아까시나무/ 김 재 황 아까시나무 김 재 황 중학교 다닐 적에 벗은 산이 많았는데 나서서 한 사람이 외친 말이 있었다네, 바로 이 갈잎나무를 꼭 심어야 한다고. 빠르게 자라는 것 따를 나무 없다는데 늦봄에 피는 꽃은 짙은 향기 풍긴다네, 꿀 따고 그늘 얻으니 망설이지 말라고. 가시를 뽑아 들고 손을 대지 말라는데 멀리서 온 걸음이 헛된 일은 아니라네, 깃 닮은 겹잎들마저 지닌 뜻이 곱다고. (2020년) 뽑은 시조 2022.02.18
빨랫줄/ 김 재 황 빨랫줄 김 재 황 햇볕이 쬐는 곳에 가로 높이 매였는데 있어야 할 자리를 꼭꼭 짚는 바지랑대 바람도 조금씩 부니 날개 펴기 알맞다. 팽팽히 당겼을 때 퉁겨 보면 어떠할까, 아리랑 한 곡조가 구슬프게 목을 맬까 소매를 반쯤 걷으면 한숨 소리 걸린다. 얼마나 힘이 들까 두 손으로 빨았으니 축축한 옷가지가 큰 무게를 지니는 날 받아서 말리는 일을 목숨 줄로 삼았다. (2020년) 뽑은 시조 2022.02.18
싸우는 법/ 김 재 황 싸우는 법 김 재 황 싸우지 아니하고 이기는 게 좋겠지만 깊숙이 숨는다면 어떤 일을 당하겠나, 차라리 죽기 살기로 덤벼들면 어떨까. 싸움이 일어나면 꼭 눌러야 하겠지만 맞서서 약하다면 질 수밖에 없잖은가, 날마다 힘을 길러야 쓰러지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이가 코로나와 싸우지만 상대를 속속들이 모른다면 어찌 되나, 빠르게 변하더라도 그 허점을 살펴라. (2020년) 뽑은 시조 2022.02.17
화석/ 김 재 황 화석 김 재 황 그렇듯 숨었다가 왜 이제야 나왔는가, 얼마나 가렵기에 그 얼굴을 내미는가, 구태여 나에게 와서 알리려고 하는가. 어설픈 눈짓으론 너무 멀고 감감하다, 나른한 몸짓이야 삭았으니 더 어둡다, 입술을 달싹여 봐도 알아듣지 못한다. 숨결이 되살아서 드러내는 옛날 일들 환하게 보름달이 떠올라서 집히는 뜻 둘이서 손을 잡으면 깊디깊은 겨울밤. (2020년) 뽑은 시조 2022.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