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은 시조 321

가야금 산조/ 김 재 황

가야금 산조 김 재 황 바다가 날카롭게 높은 물결 거센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이 귀를 열고 모이도록 누군가 여린 손으로 열두 줄을 울리네. 잎 넓은 오동나무 선뜻 내준 가슴이여 골과 골 타고 내린 물소리만 가득한데 그 가락 점점 빠르게 언덕으로 오르네. 긴 길을 부리나케 앞만 보고 달려와서 푸르게 카랑카랑 저 바람은 말을 거네, 웃으며 얼굴 들어도 젖고 마는 눈시울.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2

솟대 세우다/ 김 재 황

솟대 세우다 김 재 황 하늘이 안 보이게 날아드는 가루 먼지 그분은 언제까지 그냥 이리 두실 건가, 잘 마른 나뭇가지를 곧고 높게 세우네. 마음이 따뜻하면 조금 적게 덮일 건지 이웃을 곱게 보면 얼마쯤은 씻길 건지 말 아닌 마음 소리로 여쭈려고 한다네. 이토록 흐려서는 어떤 뜻도 못 닿을까, 그분은 이미 벌써 다 아시고 슬프실까, 팔 벌린 산마루에서 저지른 죄 밝히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2

오늘은 나무늘보/ 김 재 황

오늘은 나무늘보 김 재 황 그동안 뭐가 바빠 그리 줄곧 뛰었을까, 내 마음 빨리빨리 끄는 대로 따랐지만 오늘은 아주 느리게 걸어 보고 싶구나. 가는지 안 가는지 느릿느릿 이끼 피게 보는 이 답답해서 앞가슴을 마구 치게 나 또한 나무늘보가 되어 보고 싶구나. 이 땅이 날아가랴 저 하늘이 무너지랴, 보채는 그 바람을 대숲에다 묶어 두고 이따금 엉뚱한 길로 빠져 보고 싶구나.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1

내 곁에 그대/ 김 재 황

내 곁에 그대 김 재 황 그대는 맑은 날에 나에게로 다가왔어, 보기에 꿈이었지 반짝반짝 모두 거듭 조금씩 깊게 빠지는 수렁과도 같았어. 나에게 보내는 말 한결같게 그대로지 무게가 있으니까 손짓까지 믿는 거야 우리는 바늘과 실이 시나브로 되었지. 끝까지 내 곁에서 언덕으로 머물기를 날마다 바람같이 달려가서 비빌 거기 그대여 눈꽃을 보며 이야기나 나누세.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1

수국의 자리/ 김 재 황

수국의 자리 김 재 황 물기가 있나 없나 울 어머닌 짚으셨고 강물이 뵈는 앞엔 살지 말라 이르셨네, 언제나 머물 자리를 다시 보라 하셨네. 똑같은 목숨인데 나와 풀이 뭐 다를까 어디에 사느냐가 울고 웃게 만들 테니 바람을 골라 타야만 좋은 삶도 꿰차지. 수국이 피운 꽃을 눈여겨서 잘 살펴라, 붉은지 시퍼런지 디딘 곳을 꼭 따져라, 자기가 묶은 일이지 남의 탓이 아니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1

돌단풍 웃다/ 김 재 황

돌단풍 웃다 김 재 황 높직이 포개 놓은 이게 무슨 집이냐고 휑하니 지난 후에 그 뒷길로 들어서니 도랑 돌 쌓은 틈새에 닮은꼴이 보인다. 따라도 엉뚱하게 가을 나무 물드는 것 이왕에 가질 바엔 넓은 풀잎 고른다네, 뽐낼 건 다만 하나야 손바닥을 펼친다. 집이나 또 잎이나 사는 일이 크디큰데 어떻게 서 있든지 마음 가면 그만이지 저 하늘 살짝 살피고 겸연쩍게 웃는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2.28

손님 오다/ 김 재 황

손님 오다 김 재 황 봄바람 불어오니 먼 곳에서 이른 제비 무슨 말 하고 있나 지지배배 종알종알 꽃피는 좋은 계절이 좀 있으면 온다고? 집이야 참 많은데 하필이면 여기 와서 가난한 처마 밑에 작은 둥지 지었구나, 사납게 비바람 칠 때 어쩌려고 그랬니? 나른히 풀리는지 긴 하품을 물던 철새 날 보자 입을 열고 지지배배 재잘재잘 꽃피니 기쁜 소식도 꼭 다다를 거라고? (2019년)

뽑은 시조 2022.02.28

날 깨우는 카나리아/ 김 재 황

날 깨우는 카나리아 김 재 황 언제나 내 옆에서 쉬지 않고 종알종알 두 귀가 따가우나 하늘만은 열려 있네, 파랗게 깨어 살도록 점 구름을 지우고. 지난날 떠올리면 그 허리가 좀 누른빛 못 참게 간지러운 일도 여민 겨드랑이 가까이 다시 살피니 반짝반짝 날 본다. 두 날개 있으니까 나와 함께 팔랑팔랑 멀리는 날지 말고 네 이야기 들려다오, 봄이야 날마다 오지 꽃이 피는 소리로. (2018년)

뽑은 시조 2022.02.28

억새 동산/ 김 재 황

억새 동산 김 재 황 얽히는 마음이라 풀고 나면 높아지고 푸름을 따라가서 비질하는 가을 언덕 쓸고서 다시 닦으면 하룻날이 열린다. 배고픈 새들이야 쪼았으나 아침 자락 몸으로 비비다가 해를 멀리 밀었는지 웃으며 이야기해도 흰 머리가 날린다. 물빛은 일찌감치 들 밖으로 떠났는데 잎들이 꼿꼿하게 일어서서 찌른 거기 놀라니 구름 살결이 서산으로 쏠린다. (2018년)

뽑은 시조 2022.02.27

벌초 이야기/ 김 재 황

벌초 이야기 김 재 황 그 잦은 가위질이 얇은 귓전 다가오니 고향 녘 저물면서 푸른 물결 살아나고 한여름 밀친 무덤가 긴 그림자 젖는다. 바람 일 다녀와서 마음 조금 풀린다는, 잽싸게 머리 깎듯 자식 강물 건넜다는 이발사 깊은 목소리 온 정수리 감싼다. 또 보면 냇버들이 높아지는 산 너머로 흰 달빛 쏟아져서 익는 들판 넘치는데 머리칼 다듬고 나니 봉분 낮게 떠온다. (2014년)

뽑은 시조 2022.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