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은 시조 321

별꽃 앞에서/ 김 재 황

별꽃 앞에서 김 재 황 밤이면 저 하늘에 뜨는 별을 바라보듯 이 땅에 반짝반짝 피는 꽃을 마주하니 어쩐지 내 눈시울을 적실 것만 같구나. 너무나 보고 보니 때가 묻지 않았을까 다가가 안아 보면 눈부시게 하얀 불꽃 가슴에 짙은 어둠을 밝힐 만도 하구나. 샛별이 사라지고 새 아침이 밝아 오듯 꽃마저 지고 나서 여름날을 맞는 것을 꿈결에 내 발걸음을 못 옮기고 섰구나. (2020년)

뽑은 시조 2022.03.12

무당벌레/ 김 재 황

무당벌레 김 재 황 못 잊은 일이지만 문득문득 밝는 기억 뜨겁게 앓고 계신 할머니를 눕혀 놓고 무녀가 붉은 고깔에 검은 춤을 열었네. 휜 길을 걸으시며 어떤 생각 펴셨을까, 떠나면 못 오시는 그 걸음을 아셨을까, 굿거리 낮은 장단에 마른 귀를 적셨네. 동그란 딱지날개 붉은 바탕 검은 무늬 척 보면 잡아먹는 진딧물은 죽음 언덕 눈앞에 벌레 한 마리 날아와서 앉았네. (2020년)

뽑은 시조 2022.03.12

막걸리/ 김 재 황

막걸리 김 재 황 대학에 다니던 때 떨어져선 못 살았지 무참히 흐린 하늘 바라보며 따른 탁주 용돈이 생기게 되면 벗과 함께 들었지. 밭에서 일할 적엔 곁두리로 안 빠졌지 진땀을 흘릴수록 잔 넘치게 채운 농주 시원히 마시고 나면 힘든 줄도 몰랐지. 지금은 늙었으니 세 모금을 꼭 지키지 더하여 약재 넣고 정성스레 빚은 모주 아내가 옆에 있으니 기분 좋게 즐기지. (2020년)

뽑은 시조 2022.03.11

수크령/ 김 재 황

수크령 김 재 황 불어온 갈바람이 머리 위를 쓸고 가면 길가에 모여 서서 살랑살랑 긴 고갯짓 손님을 맞고 보내는 그 마음이 살갑다. 한눈에 들어오는 어렸을 적 익은 눈짓 일어선 아우성은 옛 이름을 막 외치고 즐겁게 선뜻 나서면 멀지 않은 강나루. 오래된 이야기가 묻어 있는 이삭 얼룩 신바람 끌며 가니 내 눈에서 닦여지고 가을이 고향 하늘로 저린 다리 얹는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11

보랏빛 향유/ 김 재 황

보랏빛 향유 김 재 황 솔바람 살살 부니 옛 마을엔 저녁 안개 꽤 높게 그리움이 흰 구름을 쓸며 가고 엄마가 날 찾는 손짓 또 간지럼 지닌다. 아프게 붉은 노을 짙게 안는 가을 자락 못 잊는 긴 숲길엔 물든 잎만 누웠는데 이제는 쉬어야 할 때 지친 걸음 디딘다. 네모진 그 마음도 다시 보면 언덕 사랑 남보다 좋은 향기 지닐 수가 있는 것을 저 비탈 훌쩍 올라서 고향 꿈을 그린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11

겨우살이/ 김 재 황

겨우살이 김 재 황 빛보다 더 좋은 걸 어디에서 또 얻겠나, 더욱이 나무라면 두 손 들고 바라는 것 마침내 꾀 중의 꾀로 가지 위를 골랐네. 높직이 앉아 보면 너무 자주 바람 불고 밤마다 찬 이슬로 지닌 잎이 꽤 아려도 겨울에 바다 마음은 날 보란 듯 챙기네. 아픔을 참고 나야 속 꽉 차게 여무는데 남에게 기댄 후에 누른 꿈은 어찌 꿀까 오로지 달빛만으로 뜨고 있는 옷 한 벌. (2019년)

뽑은 시조 2022.03.10

기러기 날다/ 김 재 황

기러기 날다 김 재 황 하늘은 높아지고 부는 바람 조금 찬데 먼 산이 구름 걷고 그림처럼 다가서니 떠날 길 바쁜 마음이 날개깃을 펼친다. 아무리 넓더라도 길게 찍힌 온갖 손짓 푸른 물 헤쳐 가듯 화살표를 그리는데 목울음 크게 뽑으니 물든 숲이 떨린다. 그리운 사람들이 깊은 가을 더 파랗고 서두는 설렘이야 하얀 달밤 또 환해도 가볍게 나는 모습에 고향 꿈을 얹는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10

잔치국수/ 김 재 황

잔치국수 김 재 황 좋은 일 맞았으니 함께 기쁨 나눠야지 살면서 사귄 이들 빠짐없이 불러 놓고 넉넉히 이것 하나는 맘껏 먹게 해야지. 누구나 바라는 것 오래 살기 으뜸이지 그 뜻이 이 음식에 가득하게 담겼으니 거뜬히 서너 그릇쯤 먹는 이가 보이지. 차리기 아주 쉽고 배부른 것 무엇인가, 틀니를 지닌 이도 후룩후룩 잘 먹는데 푹 익게 담근 김치를 곁들이면 끝내지. (2019년)

뽑은 시조 2022.03.10

고래 죽다/ 김 재 황

고래 죽다 김 재 황 그 몸이 그리 크니 먹는 것은 어떠할까, 큰 입을 크게 열고 물과 함께 마시는데 즐기는 바로 그 먹인 작고 작은 새우뿐. 저 바다 그 어디든 플라스틱 작은 조각 숨쉬기 힘들 만큼 뿌옇게 뜬 어둠 물결 밝은 빛 들지 못하니 어찌하지 이 일을. 썩지도 않는 것을 먹이 따라 또 먹는데 소화될 리 있겠나 꽉 창자가 막히겠지 너와 나 원망하는 듯 눈을 뜨고 죽었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9

두물머리 느티나무/ 김 재 황

두물머리 느티나무 김 재 황 언제나 물소리가 가슴 안에 고이는 곳 쪽배가 깊은 밤에 하늘에서 내린 자리 세월을 가슴에 감고 또 하루를 버틴다. 얼마나 숨이 차게 바삐 달린 물길인지 만나는 반가움에 두 마음이 하나 되고 넉넉히 푸른 눈길이 여름 낮을 눕힌다. 잎들이 떨어지고 빈 가지를 보일 무렵 첫눈이 내릴 때면 꿈길에서 들린 불빛 다가올 추운 날들을 걱정 없게 챙긴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