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은 시조 321

빅토리아 수련/ 김 재 황

빅토리아 수련 김 재 황 널찍한 그 가슴에 느긋함을 가득 안고 저 하늘 높아져서 가을걷이 닮는 오늘 아련히 먼 고향 꿈이 물거울에 비친다. 센 바람 불어와도 끄떡없을 동그란 잎 쟁반을 따랐는데 가시가 왜 그리 많지 어디나 산다는 일이 쉬울 수가 있을까. 처음에 희던 꽃이 끝내 놀로 물드는데 뭐든지 떠난 후에 그리움이 남기 마련 왕관은 벗어 던지고 물에 떠서 놀리라.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9

지혜의 숲에서/ 김 재 황

지혜의 숲에서 김 재 황 새벽에 일찌감치 전철 버스 옮겨 타고 바쁘게 달려오면 일곱 시를 지킨 아침 느긋이 꽂힌 책들이 내 걸음을 맞는다. 반갑게 인사하고 펼친 쪽을 모두 읽고 지그시 눈 감으면 불어오는 골짝 바람 날아온 산새 소리도 내 귓전에 앉는다. 말없이 창 너머로 고향 하늘 바라보면 알맞게 흰 구름은 선산 앞을 지나가고 내 마음 출렁거리니 노래 배가 닿는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8

만남에 대하여/ 김 재 황

만남에 대하여 김 재 황 즐거운 기다림이 무릎 앞을 지키지만 쫓기는 마음이야 언제든지 살아 있고 가슴에 똑딱 소리가 오동잎을 때린다. 그리면 동그랗게 떠오르는 찰떡 얼굴 밤중에 하늘에서 반달처럼 밝아 오고 구름이 가릴 때마다 머리맡은 어둡다. 마주한 기쁨이야 마냥 크게 부풀어도 반드시 헤어짐이 따르는 걸 어찌할까, 그때가 아직 아니니 명주실로 묶으리.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8

세미원 연꽃/ 김 재 황

세미원 연꽃 김 재 황 두 강이 흘러와서 아름답게 만나는 곳 더위도 한 발 멀리 물러나서 즐기는데 못물에 비친 제 얼굴 살펴보는 눈빛들. 바닥은 수렁이니 하얀 뿌리 깊이 묻고 펼쳐서 둥근 잎이 먼 하늘과 마주하면 이 세상 깨우는 말씀 지녔음을 아느니. 가슴에 뜨는 달은 닦고 나야 눈부시듯 수줍게 붉힌 볼도 씻어야만 곱살한 것 바람을 가슴에 안고 임 그리움 달군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8

동파육/ 김 재 황

동파육 김 재 황 서해를 건너뛰면 항주라는 땅이 있지 빙그레 손님들을 맞이하는 인공 호수 거기서 뱃놀이하고 이 음식을 먹었지. 늙은이 먹기에는 아주 좋은 돼지고기 씹지만 부드럽게 시인 마음 떠올렸지 꿈에나 찾곤 했는데 동네에서 보았지. 가까운 벗들에게 당장 오라 전화했지 변두리 여기에도 멋진 맛집 생겼다고 넉넉히 시켜 놓고서 고량주를 들었지.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7

정자 짓다/ 김 재 황

정자 짓다 김 재 황 어디든 앉고 나면 마음 가는 놀이마당 강물이 뵈는 곳에 영류정을 지어 놓고 물소리 가득히 찰 때 풀피리를 불리라. 더위가 오고 나선 무엇보다 바로 숲속 솔들이 사는 곳에 친송정을 세워 놓고 산바람 살살 다닐 때 어깨춤을 열리라. 하얗게 눈이 오면 찾고 싶은 언덕바지 아무도 없는 곳에 묵언정을 그려 놓고 털구름 가늘게 뜰 때 연시조를 쓰리라.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7

괜찮아/ 김 재 황

괜찮아 김 재 황 걸어도 어릴 때는 넘어질까 늘 염려지 대낮에 잘 뛰다가 푹 앞으로 엎어졌지 할머닌 먼지 터시며 안 다쳐서 괜찮아. 아마도 초등학교 다닐 적인 것 같은데 서두른 월말시험 망친 일이 있긴 있지 어머닌 어깨 치시며 잘 새기면 괜찮아. 첫딸을 얻고 나서 출판사에 다닐 때지 승급이 올 차롄데 놓치고서 집에 갔지 아내는 빙긋 웃으며 큰일 아냐 괜찮아.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7

고양이 마음/ 김 재 황

고양이 마음 김 재 황 창턱에 목을 괴면 솔솔 부는 산들바람 가벼운 차림새로 즐겨 찾는 고향 꿈길 아무도 흉내 못 내는 외로움을 기른다. 작은 꽃 흔들려도 어디인가 귀가 쫑긋 나비가 날아오니 저게 뭐야 눈이 반짝 쪼르르 그 가슴 온통 궁금함을 따른다. 손짓이 부른다고 푹 엎딘 몸 일으킬까 스스로 높이려면 높은 데를 차지할 것 남들이 모두 잠들 때 언덕길을 오른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6

근심하는 숲/ 김 재 황

근심하는 숲 김 재 황 추위가 온 후부터 몇 날이나 가물었나, 작은 잎 떨어져서 바람 안고 마르는데 빈 가지 부대끼다가 불꽃 필까 겁난다. 가난한 품 안에는 열매 그것 모자라고 배고픈 그 새마저 먹이 찾아 떠났는가, 어둠만 깊은 둥지에 잔 별빛이 담긴다. 산비탈 탄 고라니 힘든 걸음 집히는데 저 어린 발자국은 어찌 저리 가벼울까. 어미야 그저 제 아이 튼튼하길 바란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6

팔랑개비의 노래/ 김 재 황

팔랑개비의 노래 김 재 황 바람이 불어와야 잦은 하품 못 깨물지 들길은 길어져서 굽은 강을 멀리 돌고 바다로 홀로 떠나듯 빈 날갯짓 열리네. 바람이 불어오니 어깨 절로 춤을 얻고 산길은 빨라져서 고추 먹고 맴을 돈다, 바다가 부르는 곳에 날아드는 꽃 편지. 바람이 불더라도 너무 세게 안 불기를 하늘은 갈라져서 돌아간 길 다시 도니 바다에 안길 그만큼 임의 숨결 바라네. (2019년)

뽑은 시조 2022.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