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은 시조 321

줄타기/ 김 재 황

줄타기 김 재 황 안개를 꼭 껴안고 쥘부채는 펄럭이며 자리가 기다란데 바람 타고 앉았다가 높직이 몸을 날려서 하늘까지 엿본다. 가볍게 솟구쳐도 날개 없는 겨드랑이 두견새 그 울음이 핏빛으로 쏟아지면 마지막 가난한 꿈을 불꽃에다 던진다. 갈 길이 손짓하니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둠을 재우느라 팽팽해진 외줄 위로 끝까지 넋을 얹고서 춤사위를 보탠다. (2002년)

뽑은 시조 2022.02.27

맷돌/ 김 재 황

맷돌 김 재 황 어쩌다 그대 몸은 그리 많이 얽었는지 끝까지 그 삶이야 둥근 사랑 빚다가도 무겁게 가슴에 안은 날빛 한을 가는가. 원래는 깊은 땅에 펄펄 끓던 곤죽인데 그 정열 잠재우고 무언으로 머문 그대 누군가 다시 껴안고 긴 숨결을 넣었네. 가만히 귀 펼치면 천둥소리 머금은 듯 세상에 전하는 말 다시 거듭 외우건만 우리는 알지 못했지 돌고 도는 세상을. (2002년)

뽑은 시조 2022.02.26

봄비 이고 봄이 온다/ 김 재 황

봄비 이고 봄 온다 김 재 황 얼마나 기다려 온 임이 오는 걸음인가, 밟히면 타질세라 긴 남치마 살짝 들고 저 혼자 푸른 들판을 사뿐사뿐 흐른다. 입술은 조금 젖고 그 목소린 나직하며 꾸미지 않았어도 아주 예쁜 임의 자태 바람결 엷은 풋내로 들 그림을 채운다. 볼 붉은 수줍음에 옷고름을 입에 물면 눈시울 젖고 나서 반가움은 또 뜨는데 봄 가득 머리에 이고 찰랑찰랑 걷는다. (2005년)

뽑은 시조 2022.02.26

나야말로 뚱딴지/ 김 재 황

나야말로 뚱딴지 김 재 황 물드는 가을보다 나서는 봄 좋아하니 아직도 철이 없는 나야말로 뚱딴지야 날마다 꿈을 찾아서 나들이를 떠나지. 흐르는 강물보다 우뚝한 산 껴안으니 늙음을 잊고 사는 나야말로 뚱딴지야 눈뜨면 사랑 주우러 오솔길을 거닐지. 잘생긴 얼굴보다 고운 마음 따라가니 척 봐도 영락없는 나야말로 뚱딴지야 언제나 휘파람 불며 구름집을 가꾸지. (2014년)

뽑은 시조 2022.02.26

이름에 대하여/ 김 재 황

이름에 대하여 김 재 황 얼마큼 안고 자야 나와 한 몸 이루는가, 문 앞에 걸어 놔도 낯선 듯이 느껴지고 밤마다 찾는 소리가 꿈결처럼 다가온다. 목숨보다 무겁다고 늘 외치며 살았으나 비바람 막 닥칠 땐 초라하게 날린 깃발 두 어깨 축 늘어뜨린 그림자를 또 본다. 대낮에도 조심스레 착한 길을 걷는다면 뜻 바른 가슴에서 너는 눈을 밝게 뜰까, 흐린 물 딛고 오르는 연꽃 얼굴 그린다. (2005년)

뽑은 시조 2022.02.25

그림 한 폭 살아나면/ 김 재 황

그림 한 폭 살아나면 김 재 황 가난한 별 그림자 긴 길 떠난 그 강나루 날개 치듯 따라가면 물소리가 다시 웃고 저만치 거울 밖에서 그대 눈빛 반짝인다. 내디딘 곳 다르지만 가는 길은 똑같기에 그려 보던 두 가슴이 얼싸안은 두물머리 기쁘게 물결이 도니 그대 만나 어지럽다. 저 초승달 데려다가 술래잡기 벌여 볼까 내 마음 벌거벗은 그림 한 폭 다시 살면 그대는 환한 얼굴로 바람 앞에 흔들린다. (2005년)

뽑은 시조 2022.02.25

시인의 하늘/ 김 재 황

시인의 하늘 김 재 황 참 어린 마음자리 묻은 달빛 더욱 희고 비워 낸 까치 웃음 닦여져서 아주 먼데 툇마루 살짝 앉아서 시를 쓰는 임의 꿈. 딴 목숨 내려치는 칼바람이 불 리 없는, 그 가슴 내려앉는 먹구름도 낄 리 없는, 하늘은 늘 어느 때나 봄 같기만 하리라. 막걸리 한 사발에 온 세상이 다 환하던 임 얼굴 떠올리면 절로 가슴 찐해 와서 지금 막 반길 양지꽃 더운 미소 찾는다. (2001년)

뽑은 시조 2022.02.25

골동품/ 김 재 황

골동품 김 재 황 못 잊는 표정들을 긴 꿈처럼 새기려고 눈감은 삭정이에 빨간 불씨 묻어 본다, 가까이 귀를 대어도 알아듣지 못할 말. 가늘게 새긴 무늬 흐르다가 멎은 곡선 실 같은 이야기가 엷은 미소 내보이고 갈수록 넋이 이울어 마음 울린 빛이여. 못 여민 숨소리를 등불 보듯 따라가면 물빛 돈 알몸들이 안겼는데 깊은 하늘 이제야 이름 앞에서 왠지 자꾸 서럽다. (1991년)

뽑은 시조 2022.02.24

내 믿음은 중심뿐/ 김 재 황

내 믿음은 중심뿐 김 재 황 해변에서 돌을 쌓는 어느 사람 보았느니 모서리와 모서리를 균형 잡고 맞댄 솜씨 날아온 괭이갈매기 그 중심에 앉아 있다. 우리나라 민족 씨름 그게 관건 아니겠나, 한순간에 그 중심을 빼앗기면 지게 된다, 어쨌든 이를 악물고 쓰러지지 말아야 해. 다만 내가 믿을 것은 중심밖에 없다는데 사람들도 산다는 게 쌓는 일이 아니던가, 아무렴 세상만사가 서 있어야 하는 것을. (2009년)

뽑은 시조 2022.02.24

절 한 채/ 김 재 황

절 한 채 김 재 황 바라본 하늘 높이 검은 구름 가득 끼고 내디딘 내 걸음이 백 근인 듯 무거우니 이참에 그냥 그대로 절 한 채를 짓는다. 수없이 달이 져도 어두울 일 전혀 없고 비바람 마구 쳐도 무너질 일 있지 않은 숲속을 홀로 지키며 흘러가는 절 한 채. 아침에 눈을 뜨면 샘물 떠서 얼굴 씻고 반기는 새 소리에 두 손 모아 답하듯이 절 한 채 바로 그것이 꽃자리가 되리라. (2018년)

뽑은 시조 2022.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