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 지목 이정민)
서울 문묘 은행나무
김 재 황
마땅히 가슴 여미고 숨 고르며 들어갈 때
뒤통수를 쓰다듬는 알 수 없게 묘한 기운
두 마디 귀한 말씀이 자리 잡고 서 있다.
어짊을 꼭 간직하고 옳음으로 나아가라
사방으로 뻗은 가지 그 잎마다 푸른 글씨
이 봄에 다시 눈뜨고 젊은 혼들 일깨운다.
주: 2012년 5월 12일 사진 촬영
천연기념물 제59호
<탐방 제 11호> 서울 문묘 은행나무
0 천연기념물 제 59호
0 소재지 : 서울 종로구 명륜동 3가 53
0 지정일 : 1962. 12. 3
★ 성균관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雌雄 한 쌍의 은행나무 중 雄株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나무도 암나무여서 열매를 많이 맺었는데 은행열매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고통을 당하던 유생들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제발 열매 맺지 않는 수나무로 바꿔 주소서!” 그 이듬해부터 불임의 수나무가 되었다고 하니 이를테면 “트랜스젠더”가 된 셈이다.
★기록에 의하면 중종 14년(1519)에 大司成(儒學과 文廟관리 專擔: 正3品 堂上官) 尹倬이 심었다고 하니 수령 500여 년을 헤아릴 수 있다. 성균관 文廟는 조선개국 초기(1398)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1592)때 燒失됨으로써 그 후 재건축(1602~1606)되었는데, 이 은행나무는 戰亂의 火魔에도 용케 잘 견디어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수고 26m, 밑둥치가 여러 개로 갈라져 叢生한 흉고둘레가 12m에 달하고 동서남북으로 10~12m의 가지가 잘 뻗어 아직까지도 왕성한 수세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氣根의 변형인 乳柱가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은행나무에 관해서는 綠施가 그의 力著 <老子, 그리고 나무찾기>에서 상세히 記述해 놨기에 그 중에서 몇 마디를 引用한다.
★ 노자 도덕경 제 48장의 “取 天下 常以 無事”에서 은행나무를 연상한 綠施는, “천하를 모두 가진” 은행나무는 우선 長壽木임을 강조한다. 그 由來도 悠久해 고생대 말기인 2억5천만 년 전에 나타나 공룡들이 살던 중생대에 번성했고 신생대를 거치는 동안 수차례의 빙하기에도 의연히 견디어 현재까지도 건재하니 가위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 만하다.
★ 은행나무는 1속 1과 1 품종으로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나무여서 삶이 孤高하다. 열매를 맺기까지는 20~30년의 세월이 걸려야 하므로 손자 대에 가서야 그게 가능해 公孫樹란 별칭이 붙었다. 잎이 넓어 闊葉樹처럼 보이나 針葉樹라는 게 奇異하다.
★ 원산지는 중국 양자강 하구 天目山 부근인데, 불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傳來된 것으로 추정된다. 耐寒性과 耐火性이 강해 ‘동절기 최저기온이 섭씨 -38도까지 내려가는 만주 심양’에서도 잘 자라고, 불에 탄 나무줄기에서도 새 싹이 돋아난다. 목재의 재질이 부드럽고 치밀하고 광택이 있고 뒤틀리지 않아서 木床 바둑판 佛具 등을 만드는 데 쓰인다.(글: 자은 백승돈)
(사진 촬영: 지목 이정민)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김 재 황
조그만 공원 안에 아주 살짝 들어서서
노는 아이들 모습을 웃음 가득 지켜보는
커다란 어르신 한 분 감히 내가 만난다.
'가볍게 뛰어놀고 깊숙하게 공부하기'
도포 입고 갓도 쓰고 이르시는 그분 말씀
그늘진 정자 아래서 내가 지금 듣는다.
주: 2012년 5월 12일 사진촬영
천연기념물 제315호
<탐방 제 12호>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0 천연기념물 제 315호
0 소재지 : 인천광역시 서구 신현동 131-7
0 지정일 : 1982. 11. 4
★ 두과 낙엽교목인 회화나무는 樹形과 잎 모양이 端雅하고 보기 좋아서 예부터 書堂이나 書院에 심어 학자수로도 불린다. 병충해와 公害에도 강해 가로수나 공원수 등의 조경수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 이 나무의 수령은 500년으로 추정되며 樹高 22m 근원둘레 7.9m에 胸高둘레 5.3m이고 가지 퍼짐이 동 12.6m 서 7.6m 남 12.7m 북 11.8m로 웅장한 멋을 풍긴다.
★ 도시화가 되기 전의 농경시대에는 농민들이 이 나무의 개화 상태를 보고 그해 농사의 豊凶을 점쳤다고 한다. 즉, 7월 말에 황백색의 작은 꽃이 樹冠 위쪽부터 피기 시작하여 아래쪽으로 피어 내려오면 豊年이 들고 그 반대로 밑에서 위쪽으로 피어 올라가면 凶年이 든다고 한다.
★ 신현동 주민들은 음력 정월 대보름 자정에 堂山祭를 지낸다고 하며 그 밖에도 동네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땐 수시로 이 나무에 告祀를 드린다고 한다. 공부를 잘 하고 싶은 學徒는 이 학자수를 찾아가서 致誠을 드리면 效驗이 있다는 秘傳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글: 자은 백승돈)
[探訪別記]
☆ 제 6차 천연기념수 탐방은 신록이 우거지는 “계절의 여왕 5월” 중순에 서울 성균관 내의 <문묘 은행나무>를 만나고, 인천 방면으로 이동해 <신현동 회화나무>를 찾기로 하였다.
3人은 예의 제기동 驛頭에서 만나 역시 枝木의 차로 명륜동 성대 캠퍼스로 향했다,
☆ 대학 정문 초입에서 우측으로 접어들어 높다란 돌계단을 올라 널찍한 문묘 뜰에 들어서니 동서로 두 그루의 우람한 노거수가 시야에 가득 펼쳐진다. 園庭 주위에는 孔子 및 亞聖, 名賢의 位牌를 모신 대성전과 유학을 강론하던 명륜당 등 웅장하고 古色이 蒼然한 古建築物이 세워져 있고 그 주변에도 문묘 관리사 및 부속건축물 들이 빙 둘러서 있다.
☆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왕조시대에 내려앉은 기분이 든다. 서울에서 수십 년씩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咫尺거리에 그러한 別世界가 있다는 걸 모르고 지내다가 오늘 비로소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천연기념 노거수 탐방에 附隨되는 또 다른 意味와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여겨진다.
☆ 문묘는 공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데 그 유래를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중국 漢代에 儒學을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공자에 대한 거국적 제사를 시행하기 시작했고 唐朝에서는 공자를 文宣王으로 追封하여 공자 사당을 문선왕묘라 했으며 元代부터는 약칭하여 <文廟>라 부르게 되었다.
☆ 우리나라에서의 공자사당 유래는 통일신라 성덕왕13년(서기 714년)에 金守忠이 唐나라로부터 공자와 10哲 그리고 72제자의 畵像을 가져와서 國學에 모심으로써 비롯되었다. 고려조와 조선왕조에서는 문묘에 名賢을 從祀하여 儒林의 龜鑑을 삼고자 했는데 그 18名賢은 설총 최치원 안향과 정몽주를 비롯하여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김인후 이황 이이 성혼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 문묘탐방을 마치고 경인고속도로를 경유 인천으로 향해 신현동 회화나무를 찾아갔다. 현재 그 일대가 주택지로 난개발이 되어 연립주택이 무질서하게 들어섰고 前次 탐방 시에 신림동 굴참나무에서 본 바와 마찬가지로 노거수 보호 방책 주변에 차량들이 어지럽게 주차되어 있어 보기에 민망하였으며, 또한 노거수의 立地도 갑갑하게 느껴질 만큼 狹小해 보인다. 그러나 노거수는 處變不驚의 志士다운 風貌를 갖추고 주위를 壓倒하고 있는 毅然한 모습이어서 보기에 壯하다.
☆ 이번 인천지역 탐방에서는 “안암 언덕”에서 同門修學한 동기동창들을 만나 보기로 하였다. 우리가 다닌 학교의 性向이 大槪 그러하지만 우리 學科에도 지방출신들이 많아서 전국 어디를 가나 동문들이 거주하고 있기에 인천지역에도 서너 명의 동문이 살고 있다. 먼저 중고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耘德 李文一 동문이 우리가 신현동 회화나무를 탐방하고 있는 현장에 나타났고, 뒤이어 사업가 출신 潮波 陳永浩 동문이 합류하였다.
☆ 인천출신 동문들이 추천하는 또 다른 老巨樹가 있다고 하여 모두 함께 동행해 그곳을 찾아갔다. 인천대공원 부근의 <長壽洞 은행나무>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老巨樹다. 樹高 30m에 胸高둘레 8.6m로, 5枝가 균형 있게 分枝해 위로 뻗어 雄壯하고 美麗한 모습이다. 예전에는 음력 7월과 10월에 豊年農事와 無事安寧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樹齡이 무려 800년이라는데 아직도 老益壯을 과시하고 있다. 그래서 지방 기념물이 아닌 ‘국가단위 천연기념물’로 昇格시킴이 타당하다고 우리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 耘德은 교직 停年 후 1,500여평 규모의 아담한 과수 농원을 차려 老年을 활기 있게 지내고 있어서 그의 農園을 방문하였다. 배나무,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모과나무 등 과수가 싱그럽게 자라고 있는 綠園에서 우리들은 취토록 마시며 情談을 나눴다. 그의 雅號 耘德銘이 정다워 여기에 소개한다.
含露開梨花 汝情留耘德
今日遺所名 深永德銘憶
☆ 뒤늦게 인천 연안島嶼 이작도에 거주하는 서포 姜甲秉 동문이 합류했다. 우리를 만나러 하루 1回뿐인 여객선을 타고 섬에서 뭍으로 건너왔다. <해병 전우회>, <어느 지방 향우회>와 더불어 우리사회의 3대 끈끈이 집단으로 定評이 나 있는 <우리大 동문들>인 지라 그것이 가능했으리라고 여겨진다. 西圃 역시 교직에 봉직하여 교장으로 停年退任하고, 인천에 집이 있으나 고향인 이작도에 주로 隱居하고 있다. 이작도는 예전에는 서해 海賊들의 본거지로 惡名이 있었으나 風光이 좋아서 최근 西海 島嶼 관광지로 急浮上하고 있는 섬이다.
☆ 潮波와 西圃는 好酒家들이라 오랜만에 만나는 옛 벗들과 懷抱를 푸는 데는 술이 빠질 수 없어 자리를 옮겨 거듭 취하도록 痛飮하였다. 차를 운전해야 하는 枝木은 거듭되는 酒席에서도 禁酒를 굳게 지킴으로써 마음껏 마셔대는 酒黨들은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고, 밤이 깊어 차를 몰고 入京해서도 만취한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그에게 감사를 드릴 뿐이다.(글: 자은 백승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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