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문학과 나
김 재 황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외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벗들과의 만남이 아닐까 한다. 어떤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느냐에 따라 그 삶이 긍정적으로 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되기도 한다. 그런 면으로 볼 때, 나는 매우 큰 행운을 얻었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상황문학을 통하여 좋은 벗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003년 2월 21일 오후 3시, 윤성호 시인의 사랑방에서 상황문학 창립회인 첫 모임이 이루어졌다. 그 장소에서 윤성호 시인이 상황문학의 주간을 맡게 되었고 내가 상황문학 문인회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2003년 7월 31일에 상황문학 제1호인 창간호가 출간되었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 참으로 감회가 깊다. 창간호에 실린 작품은 시조 39편, 시 140편, 수필 12편으로 모두 24명이나 되는 동인들의 작품들이 실렸다. 그 가운데는 멀리 캐나다(강숙려, 박건배, 이규석)와 이태리(손영란), 그리고 스페인(오수애) 등지에 거주하는 문인들이 참가하여 상황문학의 자리를 빛내 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호(제9집)에는 캐나다의 강숙려 시인과 스페인의 오수애 시인만이 작품들을 보내주었다. 다행이 최근에는, 그 동안 자리를 비웠던 손영란 시인이 이태리에서 귀국하여 다시 상황의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다.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다.
창 밖에는 감나무가 높은 키로 기웃하고
방 안에는 난 한 촉이 부푼 망울을 드는데
은은한 커피 향기는 절로 깊이 꿈꾼다.
외진 숲을 다녀온 듯 멧비둘긴 다가서고
둥근 못에 안긴 연꽃 그 한 잎이 젖었어도
잔잔한 음악 소리만 홀로 곱게 춤춘다.
문우들이 모인 날은 편 마음이 모두 바다
푸른 바람 부는 대로 흰 돛단배 띄워 놓고
넉넉한 인생 이야기 그칠 줄을 모른다.
-졸시 ‘난곡 입구 사랑방에서’ 전문
특히 창간호에는, ‘1967년에 현상공모 입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문단 선배 유자효 시조시인’과 ‘미주에서 시조월드를 발행하는 문단 선배 김호길 시조시인’이 작품을 보내 줌으로써 한층 상황문학이 빛을 발했다.
물론, 상황문학이 10집까지 간행되어 오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떠나고 여러 사람이 새로 왔다. 만남이 있으면 당연히 헤어짐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보름달이 뜨듯이 문득문득 떠난 동인들이 환하게 그리워진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시리게 만들곤 하는 동인은, 큰형뻘인 강대식 시인이다. 나는 강 시인을 상황문학이 결성되기 몇 해 전에 한국기독교문인협회 모임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은퇴 목사라고 하였는데, 매우 서글서글하였다. 첫 만남에 금방 가까워져서 자주 왕래를 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상황문학은 ‘강대식 시인과 이성장 시인’ 두 동인으로 말미암아 태동되었다. 그 두 시인이 함께 나를 찾아와서 상황문학 결성을 제의하였다. 이성장 시인도 형뻘인데 상황문학의 정신적 지주로서 지금 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대식 시인은 2004년에 먼 세상으로 먼저 떠나고 말았다. 현재 우리 상황문학 동인의 맏형은, 대구에 자리 잡고 있는 김상문 아동문학가이다.
상황문학 제2집부터는 ‘그린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이완주 박사가 수필로 등단하여 우리 모임에 합류하였고, 제3집부터는 김두녀 시인과 김옥남 시인과 서우석 시인과 이숙례 시인이 우리 모임에 참가하였다. 그 동안 윤성호 시인은, 1집와 2집 및 3집의 표지들을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만들었는데, 4호부터는 백규현 화백의 그림을 표지에 담았다. 즉, 4집과 5집과 6집의 표지용으로 백규현 화백이 그림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7집에는 다시 윤성호 주간이 자신의 사진으로 표지를 꾸몄으나, 우리 동인인 김두녀 시인(화가이기도 함)이 좋은 그림을 제공하여 줌으로써 8집과 9집의 표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제4집부터 최정희 수필가가 우리와 동행을 하게 되었고, 제7집부터는 정동한 수필가가 자리를 함께 하였으며, 제9집부터 홍정희 수필가(평론가이기도 함)가 상황의 길을 함께 걷게 되었다. 그 모두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9집에는 동인 19명의 작품 167편이 게재되었다. 그 가운데 시조 33편, 시 99편, 동시 10편, 동화 1편, 수필 등 산문이 24편이다. 10집을 펴내면서도 경사가 생겼다. 교장님으로 은퇴하신 김기산 시인이 우리 모임에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상황문학 제10집에는 신작으로 시조 36편, 시 80편, 수필 19편, 동시 10편, 동화 1편, 단편소설 1편 등 모두 20명의 작품 총 147편이다. 그리고 자선 대표작품은 모두 18편이었는데, ‘시조 5편’ ‘시 9편’ ‘동시 1편’ ‘수필 3편’ 등이 수록되었다.
이렇듯 상황문학이 제10호를 펴낼 수 있었던 데에는 누구보다 윤성호 시인의 노고가 컸다. 윤성호 시인은 대학 농학과의 나보다 한 해 아래 동문이지만 재학시절에는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 다행이 이성선 시인과는 각별한 사이여서 그가 타계하기 전에 나와의 인연을 맺게 해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친구가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윤성호 시인의 글이다.
『지나간 10년처럼 앞으로 10년도 지금과 같이 한결같았으면 좋겠다. 나는 문학 소년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문학청년이긴 하였다. 그나마 그 청년 시절이 끝날 무렵에는 망설임도 없이 문학을 짐짓 멀리하였다. 그것은 내 직업에서 문학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물에 대한 감수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였고, 그것이 내 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장년 시절도 보내고 어느덧 그 직업에서 물러나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 시점은 분명 내게는 전환점이었다. 그 전환점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예전 문학청년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였다. 이 바람은 막연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부터 습작 시를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써 모은 시편을 엮어 문학청년 시절에 만난 이성선 시인에게 보였더니 시집으로 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이성선 시인이 생전 처음 해설을 썼다는 시집 [새들의 손님이 되어]가 나왔다.
당시 내가 아는 문인이라고는 이성선 시인뿐이었다. 그는 내 시집을 보낼 곳을 정갈하게 적어서 내게 보내왔다. 그 가운데 마침 김재황 시인이 들어 있었다. 김재황 시인은 학교 한 해 선배이며 이성선 시인과 동기라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반가웠다. 사는 곳도 나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처음 김재황 시인을 만나보니 낯이 익었다. 인상이 좋은 사람은 처음 만나도 어디서 꼭 만난 적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하지만, 그는 같은 학교 같은 과의 한 해 선배이니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내가 상황문학 동인이 된 첫 인연이다.
시집을 먼저 내고 나서 <시와 산문>을 통하여 2회 추천을 거쳐 등단하였다. 등단은 평생을 바쳐서 문학을 하는 분들의 것인 줄 알고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김재황 시인은 남녀가 만나서 혼례식을 치르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혼례식을 올리고 부부로 사는 것이 도리이듯이, 문학을 하고자 하면 등단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상황문학 동인이 되는 둘째 인연이었다. 등단하였으니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재황 시인에게 졸랐다. 동인회를 만든다더니 어떻게 되었느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쭈었다. 내 채근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으랴 만은, 마침내 2003년 2월 21일 내 서재에서 상황문학동인회가 결성되었다. 동인들은 ‘이성장’ ‘강대식(작고)’ ‘김재황’ 시인의 노력으로 모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해부터 동인지 <상황문학>을 내기 시작하여,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0년을 이어왔다. <상황문학> 발간은 내 일상이 되었다. 지나고 보니 이 일상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걸음마를 겨우 하는 내 작품을 보면서, 상황문학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엉거주춤 서기라도 하였을까 하고 돌이켜본다. 기껏 해봐야 나는 딜레탕트를 넘지는 못하겠지만, 문단의 여러 선배를 상황문학에서 뵌 다음부터는 모두 내 스승으로 생각하였다. 이 기쁨을 어디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10년이 지났고, 앞으로 10년도 그렇게 이어나갈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
돌이켜보면, 상황문학의 문우들과의 여러 일 중에서 ‘상황문학’을 펴내는 일도 중요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문우들과 ‘문학기행’을 다닌 일도 매우 중요하였다. 일상에서 벗어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은 즐겁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끼리 함께 떠나는 여행은 참으로 더욱 즐겁다. 그러니 문학을 공부하는 문인들끼리 떠나는 여행은 얼마나 즐겁겠는가.
여행은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고, 먼 곳에 사는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좋고, 갖가지 음식을 맛볼 수 있어서 좋고, 늘 만날 수 없는 자연을 만날 수 있어서 좋고, 많은 풍물에 대하여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좋고, 많이 걷고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서 건강에 좋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특히 문학기행은 동인들끼리의 유대를 돈독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작품을 얻을 수 있어서 좋다.
생각하건대, 상황문학 문학기행은 200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1차 문학기행은 이성장 고문이 주선하였다. 행선지는 화진포였다. 1박2일의 여행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아주 널찍한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거실이 아주 넓었기에 거실에 모여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거실에서 바다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그리고 바닷가에는 아주 고운 모래밭이 그림처럼 펼치어져 있었다. 모두들 바닷가를 거닐며 시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열 명 정도의 동인들이 참가하였다고 여겨진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넓게 펼치어진 바닷가를 거닐며 너울너울 춤을 추듯 걸어가는 최언진 시인의 모습이다. 또, 윤성호 시인은 바닷가에서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따개비를 발견하고 사뭇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라보며 탄성을 올렸다. 그 곳이 바로 군인 휴양소여서 바닷가도 깨끗하고 사람의 출입도 드물었다. 참으로 한적하였다.
2005년, 2차 문학기행은 윤성호 시인이 주선하였다. 행선지는 속초의 영랑호였다. 서울에서 모인 후에 속초로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영랑호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밖을 바라보니 물가에는 하얀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봄의 여윈 갈대들이 우리를 손짓해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때는 4월 22일, 하룻밤을 묵는 1박2일의 일정이었다.
숙소는 아담한 독채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2채를 빌렸다고 여겨진다. 숙소에 다다라서 짐을 풀자마자, 서둘러서 밖으로 나갔다. 모두들 영랑호 주변을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렸다.
산책을 하다 보니, 새싹들이 아름답게 돋아나 있었다. 쑥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여류들이 그걸 그냥 둘 리가 없었다. 한 움큼씩을 뜯어다가 쑥국을 끓였다. 그 맛과 향기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멋진 소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이성장 고문과 나는 포즈를 취하였고 윤성호 시인이 사진을 찍었다. 또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때에 영랑호를 배경으로 우리는 모두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춘원 시인과 전순영 시인과 하태무 시인과 최언진 시인, 그리고 그 양옆으로 이성장 고문과 내가 서 있다. 역시 윤성호 시인이 사진을 찍었다.
‘영랑호 문학기행’이 좋았기 때문인지, 다시 문학기행을 떠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서 2005년 6월 13일부터 6월 14일까지 1박2일의 문학기행이 다시 잡혔다. 이 여행은 대구에 사시는 김상문 고문이 주선하였다. 물론 행선지는 대구 지방이며, 팔공산이 목표였다. 이 3차 문학기행에서는, 무엇보다도 대구 지방에 살고 있는 김상문 고문과 박태선 시인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이 컸다. 우리는 팔공산 자락을 밟고 시상을 떠올렸다.
그날, 김상문 고문은 ‘어머니에 대한 회고’를 감동적으로 들려주었다. 그리고 박태선 시인은 여기저기 좋은 곳을 안내해 주었다. 그때 나는 팔공산 자락을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고 ‘팔공산 산신령’ 같다고 했다. 어찌 내가 그리 보였겠는가. 그 모두가 신비스런 팔공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학기행에서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는 모습들이 있다. 왼손을 허리에 대고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는 이난호 수필가, 파안대소로 온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전순영 시인, 반짝반짝 고운 눈망울을 별처럼 빛내는 김순금 시인, 마음의 순수로 진실을 이야기하는 박태선 시인,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즐거운 미소를 머금는 최언진 시인과 하태무 시인. 그날도 윤성호 시인이 바쁘게 사진을 찍었다.
2005년은 문학기행의 풍년이었다. 몇 달 후, 제4차 상황문학 문학기행이 또 있었다. 일정은 8월 10일에서 8월 11일까지 1박2일이었는데, 이 문학기행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뜻하지 않게 내가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을 받게 되고 하태무 시인이 우수상을 받게 됨으로써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행선지는 만해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시상식이 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며칠 동안 그곳에서는 시상식 외에도 문학을 위한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졌다.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시상에 젖어 있었다.
사실, 이 여정은 문학기행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조금 부족하다. 여러 가지 행사가 겹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끼리의 문학기행이라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멋진 시상을 떠올릴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는 그저 마음이 들떠 있으니 좋은 작품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에게 이 만해마을은 특별한 관계가 있다. 나의 벗 ‘이성선 시인’과 이 만해마을이 무관하지 않기에 그렇다. 생전에 그는 이 만해마을을 사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그의 영혼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거기에서 한참을 걸어가면 백담사가 있다. 그 절 앞에는 이성선 시인의 시비 하나가 세워져 있다.
행사가 끝나고 하룻밤을 묵은 후에, 우리는 백담사로 향했다. 우리는 이성선 시인의 시비 앞에 서서 긴 묵념을 올렸다. 그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나를 반겼겠는가. 막걸리라도 한 잔 하자고 내 소매를 끌었을 게 분명하다.
2005년이 저물어 갈 때, 또 한 번의 문학기행이 결행되었다. 이른바 상황문학 제5차 문학기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여행은 최언진 시인이 주선하였다. 행선지는, 이천에서 이름만 대면 모두 아는 ‘하얀집’이었다. 이 ‘하얀집’은 바로 최언진 시인의 집이다.
일정은 1박2일이었고, 최언진 시인이 독채 하나를 비워 주었다. 그날,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송년회를 겸하였다. 그래서 미리 준비해 온 선물들을 교환하기도 하고, 즐겁게 손뼉을 치며 노래도 불렀다. 마침 밖에서는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방안에만 있었겠는가. 우리는 모두 밖으로 나가서 냇가를 하염없이 걸었다. 모든 동인들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천둥벌거숭이 어린이가 되었다.
정말이지, 이때의 냇가를 거닐던 기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다. 어른이 되고 나서 가장 순수한 때였으니까, 찌든 일상을 벗어난 가장 아름다운 때였으니까. 이런 마음과 이런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건, 우리들이 순수한 문인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눈발 속에서 웃고 떠는 모습들을, 윤성호 시인이 사진으로 남겼다. 물론, 내가 윤성호 시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성장 고문을 비롯하여 윤성호 시인과 이춘원 시인, 그리고 전순영 시인과 이난호 수필가, 또한 집 주인인 최언진 시인의 모습들이 꽃처럼 담겨 있다.
2005년이 저물고 2006년이 밝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천에 살고 있는 하태무 시인이 우리를 ‘소리울’로 초대하였다. 3월20일부터 3월21일까지 1박2일의 일정이었고, 행선지는 아담한 하태무 시인의 전원주택이었다. 이는 명백히 제6차 상황문학 문학기행이다.
우리는 강변역 부근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다음, 버스를 타고 이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소리울에 도착하니, 하태무 동인 내외가 마을 앞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놀랍게도 대문 앞에는 ‘상황문학 동인들 방문 환영’이라는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 그 정성이 얼마나 놀라운가. 사람들은 그들 내외를 ‘천하부부’라고 부른다. 바깥 분은 ‘천 씨’이고 안주인은 ‘하 씨’이기 때문이다.
하태무 시인은 우리를 방으로 안내한 다음, 곧 이어서 점심준비를 시작했다. 어찌나 많은 음식들을 장만하였는지 상다리가 휠 정도였다. 전번의 곤지암 ‘하얀집’을 방문하였을 때도, 최언진 시인이 그 솜씨를 발휘하여 많은 음식을 만들어서 한 상 가득 차려 내놓았다. 이 두 분의 대접을 어떻게 갚아야 될지 모르겠다.
우리는 점심을 해결한 후, 그 부근에 있는 용학사까지 산책을 즐겼다. 그리고 시를 이야기하고 시낭송도 했다. 그러나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슬라이드 시사회’였다. 제목은 ‘천종욱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세계 여행’이었다. 이 분이, 바로 하태무 시인의 남편이고 사진작가이다.
이날 이 문학기행에 참석한 이들은, 이성장 고문을 비롯하여 윤성호 시인과 이춘원 시인 내외분, 그리고 전순영 시인과 김순금 시인과 최언진 시인과 김두녀 시인과 나였다. 그런가 하면 저녁 늦게 김재권 시인 부부가 당도하였다.
2006년 5월, 이어서 본격적인 상황문학 문학기행이 이루어졌다. 일정은 5월 19일부터 5월 20일까지 1박2일이었고, 행선지는 군산 열도의 선유도였다. 이 문학기행은 서우석 시인이 주선하였다. 이는, 제7차 상황문학 문학기행이다.
며칠 전부터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했던 ‘짠쯔’호 태풍도 스스로 소멸해 버렸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게다가 모처럼 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라 더욱 마음이 들떴다. 배가 선유도 선착장에 도착하였을 때, 모든 동인들이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을 게다. 그 이름처럼 신선이나 살았음직한 섬이었다.
선유도 선착장에서 조금 걸어가니 몇 채의 횟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곳에서 회를 마음껏 먹었다. 이완주 수필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성싶다. 그 식당에서 최언진 시인이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는데, 여행 온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뜨거운 갈채를 보내었다. 점심을 맛있게 끝내고 숙소로 향하였다. 그때,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나타나서 우리를 안내하듯 앞장을 섰다.
그날 우리는 장자교를 건너서 장자도와 대왕도를 다녀왔다. 그리고 무녀도에 당도하니 바닷가에 고동들이 널려 있었다. 그 고동을 줍는 ‘동심 가득한 동인’들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특히 모감주나무 군락이 푸름을 안겨 주었다. 또, 한밤의 선유도해수욕장은 우리들에게 제공된 무대였다. 어깨동무를 하고 동요와 가곡을 마음껏 불렀다. 누가 무어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선유도에는 섬 주위로 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섬 일주도 할 수 있었다. 마음은 끌렸으나, 우리는 걸어서 섬을 돌았다.
선유도 문학기행에 참가한 동인은, 우리를 안내한 서우석 시인을 비롯하여 이성장 고문과 윤성호 주간, 그리고 이완주 수필가와 전순영 시인과 최언진 시인과 하태무 시인과 김두녀 시인과 최정희 수필가와 이춘원 시인과 나였다. 그리고 특별히 이숲 소설가가 참가하였다.
2007년이 되었다. 그 동안, 하태무 시인은 이천의 소리울을 떠나서 삼천포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그 소식이 있자마자, 하태무 시인이 우리를 삼천포로 초대하였다. 그래서 제8차 상황문학 문학기행은 삼천포로 결정되었다. 일정은 3월 23일부터 3월 24일까지 1박2일이었다.
삼천포에 당도하여 숙소로 갔다. 바로 천하부부가 머무는 집이다. 방을 2개 비워 놓았다. 놀랍게도 바다가 바로 코앞에 펼쳐져 있었다. 태풍이라도 불면 바닷물이 창을 덮칠 것만 같았는데, 다행이 섬들이 바다를 가로막고 있어서 그럴 염려는 없다고 한다. 특히 불빛을 머금은, 밤의 연육교가 아름다웠다. 나는 시상을 가다듬었다.
무엇이 이곳으로 걸음을 옮기게 했나
길고 먼 이야기는 바다에서 마냥 졸고
이처럼 어떤 손이 날, 바람으로 이끌었나.
섬들은 아이인 양 안개 속에 슬쩍 숨고
하늘은 술래처럼 짙은 구름 안았는데
왜 그리 이곳으로 난, 부리나케 달려왔나.
갈매기 몇 마리가 소식들을 놓고 간 후
조그만 통통배들 지난 세월 되씹는데
도대체 저 연육교는 무슨 인연 맺었는지-.
불빛이 가슴속에 절로 뜨겁게 닿으면
가벼운 입술 모두 꽃인 듯이 피어나고
그 누가 이곳에서 날, 못 떠나게 잡는가.
-졸시 ‘삼천포에서’
삼천포에서 맞는 밤은 화려하였다. 연육교의 불빛들은 알알이 가슴에 보석처럼 달려와서 박히고, 그에 따라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대방진의 아침이 맑게 열려 있었다. 통통배 한 척이 그 바다 앞으로 그림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삼천포는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김상문 고문 내외분이 달려왔다.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이란 말인가. 서울에서 동인 10명이 참가하였다.
2008년, 이해에는 조금 숨을 돌려야만 했다. 그래서 11월에야 상황문학 문학기행의 일정이 가까스로 잡혔다. 그만큼 신중을 기하였다. 될 수 있는 한, 여러 동인들의 마음을 모으려고 했다. 그렇게 하여 상황문학 제9차 문학기행이 성사되었다.
일정은 11월 14일부터 11월 15일까지 1박2일이었고, 문학기행 장소는 부산을 비롯하여 창원의 불모산 일대였다. 이 제9차 문학기행은, 부산에 살고 있는 김옥남 시인과 창원에 살고 있는 김순금 시인 등이 주선했다.
이번 여행은, 버스와는 달리, 기차를 타고 간다는 데에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KTX열차를 타고 가는 여행이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겠는가.
자리가 2군데로 떨어져 있었으나, 몇 사람씩 앉아서 깨가 쏟아지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창밖으로는 산과 들이 흘러가고 시간도 꿈결처럼 흘러서 어느새 부산역에 닿았다.
우리는 부산역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최정희 수필가, 하태무 시인, 최언진 시인, 김순금 시인, 김두녀 시인, 전순영 시인, 이성장 고문, 김상문 고문, 윤성호 주간, 이춘원 시인, 김재권 시인 등의 얼굴이 보인다. 물론, 나도 그 사진에 들어 있다. 박태선 시인이 사진을 찍었고, 김옥남 시인은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
부산역 부근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마친 후에 우리는 부산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부산 일대를 돌아보았다. 용두산공원, 몽돌해수욕장, 송도해수욕장----등, 이 모두가 우리들에게는 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자갈치시장은 저녁에 찾았다. 먹을거리가 가득하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그곳에서 우리는 풍성한 저녁을 들었다. 그 맛좋은 회를 안주로 소주 한 잔을 걸치니 온 세상이 내 품으로 들어와서 안겼다. 그날 저녁에는, ‘부산의 이숙례 시인이 이끌고 있는 문학회’의 행사에 초대되어 동인 몇 사람이 시낭송을 하기도 했다. 이숙례 시인은 우리 상황문학문인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창원으로 함께 향했다.
창원에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정확한 이름은 ‘불모산 가야산장.’ 민박집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시낭송도 하고 문학에 대한 대담도 나누었다. 하룻밤을 묵은 후, 불모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아늑한 숲에서 작품 구상의 시간도 가졌다. 우리는 그 숲을 가리켜서 ‘상황의 숲’이라고 이름 지었다. 시상에 잠긴 모습들이 사진에 생생히 담겨 있다.
창원에는 그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있다. 그걸 안 보면 안 된다. 우리는 그곳으로 달려갔는데, 새들의 군무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다. 낙동강이 흐르는 곳, 갈대들도 무성하게 자라나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민물고기들도 많이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곳이야말로 ‘철새들의 낙원’이리라.
2009년이 새롭게 열리고, 봄이 밝았다. 우리는 제10차 상황문학 문학기행을 고창과 부안 지역으로 정했다. 이 여행은 김두녀 시인이 주선하였다. 그 일정은 4월 10일부터 4월 11일까지 1박2일이었다.
4월 10일 오전 8시, 우리는 사당동에서 모인 다음, 임대한 봉고차를 타고 신나게 고창으로 출발하였다. 좋은 벗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고창에 도착하였다. 고창에는 전에 고창군수의 초청으로 문인들과 온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친근하다. 맨 먼저 찾은 곳은 ‘고창읍성’이었다.
고창읍성은 성곽이 아름답게 쌓여져 있다. 그게 바로 예술이다. 그러나 돌덩이 하나마다 그곳 주민들의 땀과 피가 묻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특히 그곳에는 조선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우리는 성황사를 둘러보고 맹종죽림과 사적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고창동헌과 고창내아도 거닐어 보았다. 척화비 앞에서는 모두 엄숙한 표정을 지었으며,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는 모두가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누가 뭐라고 해도, 고창에서 ‘뱀장어구이’를 빼놓을 수 없다. 그 안주에는 ‘복분자 주’가 제격! 우리는 그날 점심으로 별미 중의 별미라는 ‘뱀장어구이’와 ‘복분자 주’를 맛보았다. 그런데 너무 고맙게도 그 값을 이완주 수필가가 지불했다.
배가 부르니, 기운차게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바로 ‘고창고인돌박물관’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름도 귀엽기 이를 데 없는 ‘모로모로열차’를 만났다. 그 열차는 궤도차는 아니다. 우리는 열차를 타고 고인돌 지역을 돌아보았다. 고창 지역의 고인돌은 남방식 고인돌이 대부분이다. 아주 드물게 북방식 고인돌이 있기는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이어서 미당 생가를 찾았다. 전에 한 번 들렀던 곳이기도 하지만, 좋은 벗들과 다시 둘러보니 새로운 느낌이 있다. 그리고 기념관도 찾았는데, 놀랍게도 친일 내용의 문학작품들도 걸려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미당은 불행한 문인이다.
그곳을 떠나서 이번에는 선운사로 향했다. 고창에 와서 선운사를 보지 않으면 되겠는가. 그리고 선운사를 찾으면 반드시 보아야 할 명물이 있다. 그게 바로 선운사 입구에 있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인 ‘송악’이다. 힘 있게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송악’ 앞에서, 김옥남 시인이 멋진 포즈를 취했다. 내가 그 사진을 찍었다.
우리 모두 선운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보니, 나무 밑에 꽃무릇이 파랗게 돋아나 있었다. 꽃무릇과 상사화와 진노랑상사화 및 백양꽃 등이 헷갈린다. 개화기 등이 조금씩 다르다. 이들은 모두 수선화과 식물들이다.
선운사를 둘러보고 숙소로 가려고 할 때, 봉고차가 고장을 일으켰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최언진 시인이 마련해 온 묵으로 허기를 달랬다. 우리의 숙소는 부안에 정해 놓았다. 어렵사리 도착하니, 숙소의 건물이 멋져 보였다. 그러나 밖의 풍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이 그 부근을 돌아보았다. ‘부안 영상특구 세트장’이 잘 꾸며져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채석강과 적벽강 및 수성당 등을 찾았다. 특히 적벽강은, 후박나무 군락지가 있는 격포리로부터 용두산을 감싸는, ‘약 2킬로미터의 해안선’을 일컫는다. 그 후, 내소사에 도착하였다. 무엇보다도 내소사는 전나무 우거진 길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매창공원’과 ‘신석정 고택’을 둘러보았다. 감회가 컸다.
참가 동인은 윤성호 시인과 이완주 수필가와 서우석 시인과 전순영 시인과 최정희 수필가와 최언진 시인과 김두녀 시인과 김옥남 시인과 이춘원 시인과 김재권 시인과 나, 그리고 이숲 소설가가 동행하였다. 손님으로 온 이숲 소설가는, 음식상을 차리느라 땀을 많이 흘렸다.
또 한 해가 저물고, 2010년이 되었다. 5월 달을 기하여 상황문학 제11차 문학기행이 결정되었다. 이번에도 서우석 시인이 주선하였다. 일정은 5월 14일부터 5월 15일까지 1박2일이며, 행선지는 서해바다의 문갑도였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 문갑리이다.
집결지는 인천항여객터미널이었다. 모두 모이자, 9시 30분에 우선 덕적도행 스마트호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덕적도에서 해양호로 갈아타고 문갑도로 향했다. 문갑도까지의 거리는 약 8킬로미터이고 소요시간은 20여 분이다. 문갑도 선착장에 이르니 꽃향기가 코로 스몄다.
문갑도에는 분꽃나무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고, 드문드문 병꽃나무도 붉은 꽃을 내보이고 있었다. 식사를 하고 문갑해변을 거닐었는데, 바지락조개나 굴 등이 많이 자란다고 한다. 얼마쯤 걸어가니, 마을입구가 보였다. 멋진 정자가 있다. 동네로 들어가니 밭가에는 달래가 지천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 사람들이 이 달래를 잡초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전망이 좋은 곳에 숙소는 자리 잡고 있었다. 점심을 잘 먹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아, 줄딸기가 연보랏빛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하여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서, 나는 윤성호 시인과 함께 서해 일출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그날 오전에는 한월리해수욕장을 둘러보고, 그날 오후에는 하리산을 올랐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어렵사리 금난초와 은난초를 만나고, 꽃피운 홀아비꽃대를 만났는가 하면, 멋진 웃음을 보이는 으름덩굴도 만나 보았다.
서우석 시인은 이번 여행을 주선했으나, 직장 일 때문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참가한 동인들은, 윤성호 시인과 김옥남 시인과 이완주 수필가와 이춘원 시인과 김두녀 시인과 최언진 시인과 나, 그리고 이숲 소설가가 게스트로 참석하였다.
2011년, 제12차 상황문학 문학기행이 전격적으로 결행되었다. 일정은 5월 24일부터 5월25일까지 1박2일이고, 행선지는 ‘남해 창선도의 아라 클럽’이다. 이번 여행은, 하태무 시인이 초청하였다. 그들 ‘천하부부’가 남해 창선도에 펜션을 마련하였다. 그래서 축하차 우리는 남해로 달려갔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참석인원이 적었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동인이 모두 5명뿐이었다. 즉, 윤성호 시인과 이춘원 시인과 최언진 시인과 손영란 시인과 나, 그게 전부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살던 손영란 시인이 귀국하여 이번 여행에 동참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싶다. 총무인 이춘원 시인이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와서 우리를 편안하게 데려가고 데려다주었다.
목적지에 다다르니 ‘아라 클럽’이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안내한 숙소로 갔다. 방안에서도 바다가 환히 보였다. 심지어는 먼동이 틀 때, 방안에서 일출을 볼 도 있다고 하였다. 윤성호 시인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남해 일출을 찍었다.
바닷가로 나가서 거닐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는 ‘갯메꽃’을 비로소 만날 수가 있었다. 다음 날은, ‘노산공원’을 방문했다. 그곳에 ‘박재삼문학관’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향기로운 작품들을 만나는 기쁨이 컸다. 물론, 노산공원에는 ‘호연재’도 자리 잡고 있다. ‘호연재’는 ‘맹자’의 높은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 후에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인 ‘남해 창선면 왕후박나무’도 만나보았다. 그 기품 당당한 모습에 우리 모두가 압도되었다. 또 한 곳, 유배문학관도 둘러보았는데, 특히 김만중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넓은 바다도 보고 맛도 즐기고 문학의 향기에 취했다.
제13차 문학기행은 2011년 가을, 9월 2일부터 9월 3일까지 1박2일로 실시되었다. 목적지는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최정희 동인의 주말농장이었다. 우리는 이춘원 시인과 김두녀 시인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포천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아름답게 가꾸어 놓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연못도 있었고 정자 하나도 수줍게 놓여 있었다. 게다가 농장답게 널찍한 바위 위에서 잘 익은 고추가 편안하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목가적인 풍경인가.
우리는 그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그 근방에 위치한 산정호수를 찾았다. 가장 먼저 달뿌리풀이 우리를 반겼다. 산정호수는 오랜만에 찾았는데 여전하였다. 중학교 학생시절에 온 적이 있었는가 보다. 그 둘레를 걸으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각자가 준비해 온 작품들을 돌아가며 낭송하고 밤이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산속의 밤은 신비스럽다.
다음 날은 포천에서 요즘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아침고요수목원’행! 이곳은 개인적으로는 몇 번 온 적이 있지만, 상황문학 동인들하고의 기행은 첫 번째이다. 여전히 수려한 산과 우거진 숲이 우리를 맞았고 아름다운 꽃들이 우리를 반겼다.
그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이 문학기행에 참가란 동인들은, 우리를 초대한 최정희 수필가를 비롯하여 최언진 시인, 홍정희 수필가, 김두녀 시인, 전순영 시인, 김옥남 시인, 이춘원 시인 부부, 윤성호 시인, 이완주 수필가, 그리고 나였다.
바야흐로 2011년이 저물고 2012년이 밝았다. 그리고 5월이 지나고 6월이 시작되려고 하였다. 화창한 봄을 맞이하여 우리는 제14차 문학기행을 강원도 춘천으로 떠났다. 일정은 6월 1일부터 6월 2일까지 1박2일. 방문 예정지는 김유정문학관 등이었다.
6월 1일 아침 10시, 우리는 용산역에서 남춘천역행 iTX 기차를 탔다. 놀랍게도 생전 처음으로 타 보는 3층 칸이었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주 좋았다. 미리 춘천의 문채동인들과 연락이 되어 있었다. 역에는 문채동인인 김유진 시인과 금시아 시인이 마중을 나왔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마친 후, 숙소인 ‘라데나 콘도’로 향했다. 도착하니, 그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의암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 여장을 풀고 그 근처를 산책한 후, 숙소에서 문학기행 일정논의와 시 낭송을 끝낸 후에 문채 동인들과의 만남을 위해 춘천시 평생교육원 정보관으로 향했다. 그들은 우리와의 만남을 위해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문채 동인들과 함께 시론도 펴고 시 낭송도 실시하였다. 그리고 저녁을 그 유명한 ‘춘천닭갈비’로 해결하였다. 그 후, 우리는 문채 동인들의 안내로 춘천 야경을 감상하였는데 참으로 아름다웠다.
둘째 날에는 ‘김유정 문학관’의 탐방 길에 올랐다.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잘 단장되어 있는 초가를 살펴보고 해설사사 들려주는 김유정에 대한 여러 이야기도 경청하였다. 그리고 ‘실례 이야기 길’을 한 바퀴 돌았다.
김유적 문학관을 둘러본 뒤에는 ‘신숭겸 묘역’으로 향했다. 알다시피, 신숭겸은 왕건을 도와서 고려를 세운 개국공신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그 주위의 멋진 소나무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후, 우리는 서울로 향했는데, 오는 도중에 북한강변에 위치한 ‘문학공원’도 잠시 들렀다. 이 문학기행에 참가한 동인은, 이성장 고문을 비롯하여 윤성호 시인, 이완주 수필가, 이춘원 시인, 전순영 시인, 최언진 시인, 김두녀 시인, 홍정희 수필가, 손영란 시린, 하태무 시인, 이난호 수필가, 김재권 시인, 최정희 수필가 등이었다. 물론, 나도 시종일관 참가하였다. 그러니까 2012년 현재 우리 ‘상황문학’ 동인들은 모두 14차례의 문학기행을 함께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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