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형상화
김 재 황
세상은 아름답다. 마음만 활짝 열면 어디에서든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을 만나서 ‘아!’하고 큰 감동을 느끼는 순간, 시인은 시 한 편을 써야 하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중용’(中庸)을 읽다 보면, ‘호문이호찰이언’(好問而好察邇言)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무엇이든지 묻기를 좋아하고 통속적인 말을 살피기 좋아한다.’라는 뜻이다. 무엇이든지 알기를 바란다면 물어야 한다. 묻지 않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끊임없이 모르는 것을 묻는 게, 가장 좋은 ‘앎’의 방식이다. 묻되, 멀리 있는 허황된 것은 말고 통속적인 것을 살피기를 좋아해야 한다. 실생활의 말 중에서 ‘깨달음’을 더욱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아! 그게 이런 것이었구나!’하고 무릎을 칠 때가 있다. 이 때 시의 실마리를 얻는다.
이는, 아무리 느낌이 크다고 하여도, 단지 주관적인 정서나 관념에 불과하다. 다시, 언어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어떻게든 표현해야 한다. 그럴 경우에 나는, 그 추상적인 정서나 관념을 구체적인 시(詩)로 형상화(形象化)를 꾀하려고 애쓴다.
우선 ‘형상’이란 뜻부터 살펴본다. ‘시의 사전’에는 그 뜻이 ‘문자의 의미는 사물의 구체적인 형태를 가리키지만, 형상화라는 경우 등의 예술상의 의미는 단순한 사물의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에 내포된 작자의 진실어린 표현을 가리킨다. 예컨대 여기 대상물이 있다고 할 때, 그 대상물의 색체라든가 형상을 사실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작자의 두뇌에 들어가서 분해 된 다음에 그 특징이라든가 작자의 심정에 있어서 과거의 체험이나 지식 및 여러 가지 뉘앙스나 상상 등이 종합되어 다시금 구상적인 것으로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은 그 어떤 장르라고 하더라도 이 형상을 결여할 수 없다. 문학은, 설명이 아니라 현실을 형상에 의해 상대에게 제시하고, 그 감동에 의해 그 진실을 인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경우에 ’형상화‘라고 하면, 상대에게 이미지를 주고 그 언어가 지닌 리듬에 의해 보다 생생한 감동을 나타낸다.’라고 씌어 있다. 어렵다. 그 뜻이 확실하게 집히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형상화’란,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어떤 일들을 목격하였을 때, ‘머리에 떠오르는 추상적인 생각 따위가 어떠한 방법이나 매체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는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듯싶다. 특히 문학에 있어서는 ‘어떤 감동의 단서를 작가의 어떤 생각에 따라 예술적으로 다시 창조하는 것’을 가리키는 성싶다.
아주 쉽게 다시 말하면, ‘형상’은 ‘색깔이나 소리나 맛이나 냄새나 촉감 등과 같은 감각으로 그려질 수 있는 어떤 모습’을 가리키고, ‘형상화’는 ‘우리가 모든 감각기관을 통하여 어떤 느낌을 받았을 때, 그것을 그림을 그리듯 설명이 아닌 묘사로 나타내는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시(詩)에 있어서 ‘형상화’ 과정은 필수적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로 ‘이미지’(image, 心象 또는 心像)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형상화가 잘된 시는 문학성과 예술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비평가들이 ‘시평’을 할 때에는 그 작품의 형상화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割愛)하여 거론하곤 한다.
그렇다면 ‘이미지’, 즉 ‘심상’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국어사전에는 ‘심상’의 뜻이 ‘상상력에 의하여 구체적인 정경(情景)을 마음속에 그리는 일’ 또는 ‘이전에 감각에 의하여 얻어졌던 것이 마음속에서 재생(再生)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쉽게 이해하기에 조금 부족하다.
그래서 ‘시의 사전’을 다시 펼친다. 거기에는, ‘심상이라고 번역되는데, 직접 외계의 자극에 의하지 않고 기억과 연상에 의하여 마음에 떠오르는 상(像)말한다. 시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을 거슬러 올라간 후에 구체적인 게 아니면서 직접적인 상상의 어떤 형상을 비쳐준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보다도 좀더 순간적으로 다양한 것이 요약된 인상 깊은 영상이며 심리적인 그림이다. 기억이라든가 상상은 모두 과거에 경험된 그 어떤 것이 동기가 되는데, 시는 그것들의 기능을 살리고 언어의 감촉으로 심상적인 세계, 곧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과거의 시는 음악적이며 정서적인 감명에 집착하는 것이 많았으나, 현대에 있어서는 의미와 사고를 어떤 형태로 표현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해서 형상에 의해 사고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점이 현대시에 많은 이유는, 언어의 조합에 의한 미묘하고 복잡한 변화가 사람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고, 직접적인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세계까지 영상으로 나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시는, 노래하기보다도 더욱 더 생각하는 게 되었고, 위로가 된다고 하기보다도 추구하여 발견한다고 하는 식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이는, 시인의 의식 및 사고와 결부된 시는 이미지를 중시함으로써 종래에 없었던 표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미지란 한 마디로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느낌을 바탕으로 머릿속에서 다시 그려지게 된 감각적 모습’이다. 물론, 시에서는 그게 모두 언어로 이루어진다.
어쨌든 시인은, 이 형상화를 거치지 않고는 시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이 시의 ‘형상화’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더욱 놀랍게도 우리의 통속적인 말 속에 많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특히 시골의 아낙네들이 무심코 툭 던지는 말 중에서 이런 형상화의 문구를 많이 만날 수 있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바로 ‘속담’(俗談)이다. 여기에서 ‘속담’들을 좀 살펴보기로 한다.
가까운 데 집은 깎이고 먼데 절은 비친다. -(가까운 데 있는 것은 너무 친숙하여 좋지 않아 보이고 먼데 것은 훌륭해 보인다는 뜻)
가는 년이 보리방아 찧어 놓고 가랴. -(이미 일이 모두 틀어져서 고만두는 터에 뒷일을 위하여 일하거나 걱정할 리 만무하다는 뜻)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 -(이쪽에서 방망이로 저쪽을 때리면 저쪽에서는 홍두깨로 이쪽을 때린다 함이니, 무슨 일이나 자기가 한 일보다 더 가혹한 갚음을 받게 된다는 말)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이 많으면 해되는 일만 많으니 말을 삼가라고 경계한 말)
가마 밑이 노구솥 밑을 검다 한다. -(제 흉은 모르고 남을 흉보기는 쉽다고 남의 허물을 웃고 욕할 때 이르는 말)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이 없다. -(자식을 많이 거느린 어버이는 자식을 위하는 걱정이 한없이 많고 또 할 일이 많아 편한 날이 없음을 이름)
강철이 달면 더욱 뜨겁다. -(더디 다는 강철이 달면 보통 쇠보다 더 뜨겁다 함이니, 웬만해서는 화도 낼 것 같지 않은 사람이 한 번 성나면 한층 무섭다는 뜻)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도록. -(검던 머리가 파 뿌리처럼 하얗게 셀 때까지란 말이니, ‘아주 늙을 때까지’라는 뜻)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 -(푸른 것이 다 없어진 한겨울에야 솔잎 푸른 줄 안다 함이니, 어지러운 세상이 되어야 훌륭한 사람이 뚜렷이 나타나 보인다는 뜻)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장사꾼이 똑같은 값을 달라고 하면 다른 치미보다도 다홍치마를 사겠다는 것이니, 같은 노력을 한다면 품질이 좋은 것으로 택한다는 말)
고양이 쥐 생각 -(쥐를 보기만 하면 잡아먹는 고양이가 도리어 쥐를 위해서 생각해 줄 리는 만무한 것이니, 당치 않게 누구를 위해서 생각해 주는 척함을 비유한 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나 받아 가질 차비나 하지, 남의 일에 쓸 데 없는 간섭을 하지 말라는 뜻)
까마귀가 검어도 살은 아니 검다. -(겉모양은 허술하고 지저분하여도 마음은 깨끗하고 훌륭하다는 말, 또는 사람을 평할 때는 겉모양만 보고 할 것이 아니라는 말)
‘ㄱ’으로 시작되는 속담을 조금 살펴보았다. 이 얼마나 멋진 말들인가? 형상화 또한 아주 잘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 볼 게 있다. 그것은 빛깔에 대한 형상화이다.
이를테면, ‘가마 밑이 노구솥 밑을 검다 한다.’에서 ‘검다’는 ‘허물’을 가리키고 있다. 이처럼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빛깔은 무엇보다도 느낌을 잘 나타낸다. 그뿐만이 아니라, 검정은 ‘인간의 지혜’를 나타내기도 하고 ‘어둠과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견고함’이나 ‘품위’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 마디로, 검정은 ‘자신감’과 ‘어려움을 이기고 싶은 욕망과 의지’를 나타내는 색이다. 그런가 하면, ‘만물의 생사를 관장하는 신의 색’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권위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지녔다.
그리고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도록’에서 ‘파 뿌리’는 ‘흰 색’을 나타내고, 여기에서 ‘흰 색’은 ‘늙음’의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하양은 ‘단순함’ ‘깨끗함’ 등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순결’ ‘청초’ ‘결백’ ‘진실’ ‘신성’ ‘고귀’ 등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한 마디로, ‘산뜻하고 경쾌하며 밝은 색’이다. 그래서 하양은 ‘어두운 상황에서 시작과 긍정으로 넘어가는 경계’라고도 말한다.
또,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에서 ‘푸름’은 ‘훌륭함’을 나타낸다. 물론, 여기에서의 ‘푸름’은 그냥 ‘파랑’일 수도 있다. 파랑은 ‘희망’과 ‘고요’의 빛깔이다. ‘자기 확신’이나 ‘믿음’ ‘생명력’ 등, 긍정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모두 알다시피, ‘하늘’과 ‘바다’를 상징하는 색이다. ‘순수의 색’이고 ‘사람의 정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색’이며 ‘침착하고 이지적이며 냉정함을 나타내는 색’이다. 그런 반면에, 솔잎의 빛깔인 ‘초록’을 나타내기도 한다. ‘초록’은 ‘생명’의 빛깔이다. ‘생존’의 이미지를 강하게 나타낸다. 그런데 ‘파랑과 초록이 섞인 어두운 청록’은 ‘감정이 배제된 차갑고 삭막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창백한 느낌의 청록’은 ‘질병’이나 ‘부패’ ‘죽음’ 등을 뜻하기도 한다. ‘청록’은 ‘섬뜩함’을 느끼게 하고 주위를 긴장시킨다.
그 외에 노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따뜻함’의 느낌이 있다. ‘낙관주의 적인 색’으로 ‘쾌활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개나리꽃’이라든지 ‘병아리’를 연상하게 됨으로써 ‘사랑스러움’까지 지닌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분노와 거짓’을 나타내고 ‘질투의 색’이 되기도 한다. ‘황금의 색’이고 ‘존경의 색’(임금의 옷은 황금색)이다. 그리고 ‘주의’를 나타내는 ‘옐로카드’도 있다. ‘지능’을 상징하는가 하면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의존적인 이미지도 있다.
‘보라’는 ‘힘과 권력’이라든가 ‘신비로운’ 환상적 이미지를 지닌다. ‘마법의 색’이다. 그런가 하면, ‘허영과 화려함의 색’으로 연상되기도 하고 ‘독창성’을 상징한다. 아무튼 ‘관습을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한 마디로 ‘이성보다 감성이 더 짙게 느껴지는 색’이다. 예를 들자면, 보랏빛의 라벤더 꽃을 보면, 시를 읽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공주의 색’이다.
그건 그렇고, 이미지의 기능을 생각해 본다. 그야 말할 것도 없이, 자기의 관념이나 실제경험 또는 상상적 체험 등을 보다 더 호소력 있게 전달하려는 방편이다. 더 쉽게 말하면 ‘의미를 전달하는 미학적 전달수단’이다.
이를 보고 독자는 주제를 찾을 수 있다. 이런 의미의 탐구를 ‘지수비평’(指數批評)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지수’는 시에서 ‘의미의 유형’이나 ‘반복되는 관념’ 및 ‘정서’ 또는 ‘태도’ 등을 가리키는 ‘이미지’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미지 분석을 통해 시의 의미를 추적할 때 시의 의미는 세 가지 측면을 지닌다고 한다. 그게 ‘의도적 의미’와 ‘실제적 의미’와 ‘해석한 의미’라고 한다. 이 세 측면은 반드시 일치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느낌은 원래 주관적이다. 그렇기에 이미지가 주는 느낌이 신선하게 된다. 저마다 시인은 자기가 볼 수 있을 만큼만 보고 자기의 마음 빛깔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게 바로 ‘개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의 이미지는 실제의 대상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픽션’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 마음이 일으키는 솔직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서를, ‘이미지 선택’의 원리라고 한다.
모든 이미지는 감각적이다. 감각의 종류에 따라 이미지는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우선 이미지는 그게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상대적 이미지’와 ‘절대적 이미지’로 분류된다. 즉, 대상을 가진 시의 심상이 ‘상대적 이미지’이고, 그 자체가 사물이 되는 심상은 ‘절대적 이미지’이다.
그런가 하면 ‘언어발달의 단계’에 맞추어서 ‘정신적 이미지’와 ‘비유적 이미지’와 ‘상징적 이미지’로 나눌 수도 있다. 그 밖에, 기본적으로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에 따른 이미지가 있다. ‘근육감각’이라든가 ‘내장감각’이라든가 ‘공감각’ 또는 ‘복합감각’ 등의 말도 쓰인다. 조금 더 설명하면, 근육의 수축이나 긴장일 때 생기는 감각이 ‘근육감각’이다. ‘발이 저리다’거나 ‘쥐가 난다’는 등이 ‘근육감각’이다.
그리고 내장기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각이 ‘내장감각’이다. ‘속이 쓰리다’거나 ‘숨이 가쁘다’ 등의 경우이다. 또 ‘공감각’은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전이(轉移)시켜 표현하는 것’을 말하고, ‘복합감각’은 ‘둘 이상의 감각이 전이 없이 복합적으로 어울려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감각은 외부의 물리적 자극에 대하여 여러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반드시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다. 소리가 귀에 자극될 때, 그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빛깔을 느낄 수가 있다. 빛깔을 보고 냄새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감각기관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 결과를 ‘공감각’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느낌을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통하여 디자인하는 일’, 그 형상화야말로 시를 꽃으로 만드는 핵심적 요소이다. 거기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으며 냄새도 맡을 수 있고 맛도 느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촉감까지 느낄 수 있다. 이게 바로 ‘시의 형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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