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샤드와 시화
김 재 황
시를 알고 싶다는 사람이라든가 시를 쓰고 싶다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말을 들려주어야 할지, 나는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 시(詩)는 사색의 산물이기도 하고 삶의 발자취이기도 하며 지혜의 형상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詩)는 일정한 모양을 지니지 않으니(정형시인 시조라고 하더라도), 시(詩)를 말하는 모두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 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시를 알고자 하거나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시(詩)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을 키우라고 말한다. 그 ‘안목’이 바로 ‘지혜’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혜’를 전하려고 하면 우선 두 사람이 ‘가까이 앉아야’ 한다.
먼 나라 인도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에 아리아 민족이 인더스 강의 상류지방에 자리를 잡은 다음, 아리아 문화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자연을 섬겼으며, 그에 대한 시가집(詩歌集)인 ‘리그 베다’(Rig veda)를 지음으로써 베다 문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그 푸른 물결이 힘차게 흘러오다가 베다 전통의 맨 마지막 단계에서 ‘우파니샤드’(Upanisad)가 생겨나게 된다. 이 우파니샤드는 어떤 개인의 철학이 아니다. 아마도, 이게 만들어진 연대는 기원전 800년에서 기원전 300년까지로 여겨진다. 그리고 종류도 아주 많아서 ‘우파니샤드’라는 이름이 붙은 문헌은 200여 종이나 된다.
‘우파니샤드’에서 ‘우파’(upa)는 ‘가까이’, ‘니’(ni)는 ‘아래로’, 그리고 ‘샤드’(sad)는 ‘앉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는, ‘가깝게 아래로 내려앉는다.’라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우파니샤드는, 아무에게나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꼭 들려주어야 할 사람에게 ‘은밀히’ 전달하는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자격을 갖춘 스승과 자격을 갖춘 제자가 무릎이 맞닿도록 가까이 앉아서 아주 비밀스럽게 전하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파니샤드에 들어 있는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버지 ‘우달라카’(Uddalak)와 아들 ‘스베타케투’(Svetaketu)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지혜를 전하고 있었다.
“저 나무에서 열매 하나를 따오너라.”
“여기 이렇게 열매를 따왔습니다.”
“그러면 그 열매를 반으로 쪼개어라.”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쪼개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몇 개의 까만 씨가 보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반으로 쪼개어라.”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쪼개었습니다.”
“그 안에는 또 무엇이 들어 있느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때에서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볼 수 없는, 이 아주 작은 것. 그 아주 작은 것으로 이루어진 이 큰 나무가 서 있는 걸 보아라. 보이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있다는 걸 너는 믿어라. 그 아주 작은 것.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걸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바로 ‘아트만’이다. 그것은 바로 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트만’(ātman)은 ‘자신의 참모습’을 말한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현미경으로는 보이는 게 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고,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까? 더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그 무엇이 만들어진다면, 또 다른 무엇인가를 거기에서 볼 수 있을 터이다. 그렇듯 분자나 원자보다도 더 작은, 근본이 되는 그 무엇에 모든 생명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 존재가 ‘생명의 참된 존재’이며 바로 ‘아트만’이라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세히 일러준다. 그런가 하면, ‘세상 전체의 참모습’을 ‘브라흐만’(Brahman)이라고 불렀다.
우파니샤드에는 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시들이 있다.
이것은 진리로다
잘 타오르는 아궁이에서 수천 개의 불꽃이 생겨나듯
그 불멸의 브라흐만에서
여러 종류의 생명체들이 생겨나며
다시 그 브라흐만 속으로 잠긴다.
---문다까 우파니샤드 2-1-1
강물이 흐르고 흘러서 바다에 도달하면
‘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다’와 하나가 되듯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은
이름과 생김새의 구속에서 벗어난다.
---문다까 우파니샤드 3-2-8
거미가 스스로 거미줄을 만들고
나중에 그것을 다시 삼키듯
땅에서 약초가 생겨나듯
인간의 몸에서 머리칼과 털이 나듯
그 불멸의 존재에서 모든 세상이 태어난다.
---문다까 우파니샤드 1-1-7
우파니샤드는 ‘산스크리트’(Sanskrit) 어로 씌어져 있다. 이는, 옛날 인도 아리안 족의 언어였다. 원래로 인도에는 ‘드라비다’ 족(Dravidians)이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곧 인더스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으며, 지금은 인도의 남부에서나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B.C.1500년부터 B.C.1200년 사이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아리안’(Aryan) 족이 인도로 와서 머물게 되었다. 그 옛날 아리안 족의 언어가 바로 ‘산스크리트’ 어(語)다. 물론, 이 산스크리트 어는 B.C.1800년대부터 나타나며 ‘베다 문학’을 만들었다.
이 산스크리트 어는 일상의 언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언어를 매우 ‘신성한 언어’로 여겼고, 그렇기 때문에 문학이나 예술 분야 등의 뛰어난 고전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 언어는 세계 여러 언어의 갈래로 보아서 영어와 불어 및 독어 등의 유럽 언어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여기에서 문득 생각나는 글이 있다. 스승이신 조지훈 선생님의 수상집(隨想集) ‘시인의 눈’에 들어 있는 ‘시화’(詩話)라는 제목의 글이다. ‘시(詩)를 사랑하는 소녀(少女)를 위하여’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려고 한다.
『시(詩)란 무엇인가? 시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따금 이러한 물음을 받는 수가 많습니다만 이 물음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만족한 답을 베풀 수 있는 이는 영구히 이 세상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시는 ‘영혼의 창’이니 ‘기억(記憶)에의 향수(鄕愁)’니 ‘천계(天啓)의 소리’니 ‘생명(生命)의 약동(躍動)’이니 ‘울굴(鬱屈)에서의 해방’이니 ‘정치선동(政治煽動)의 도구’니 하여 제가끔 일가언(一家言)을 세운 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개인이 느낀 시관(詩觀)일 따름이요 넓은 시의 일부분의 설명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개인(個個人)의 시관(詩觀) 및 그에 따르는 작품행동(作品行動)으로서 시를 두고 그 밖에 따로 시(詩)라는 것이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상(現象) 곧 본질특수(本質特殊) 곧 보편(普遍)이라는 이 명제(命題)는 시에서도 타당한 것입니다.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날씨가 따뜻해진다는 이 모든 현상(現象)을 두고 봄이라는 개념(槪念)이 생길 수 없음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시는 어디 있는가. 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시의 소재(素材)가 우주(宇宙)의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인간생활 일체의 내용 속에 편비(遍備)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다시 한 걸음 나아가 엄밀히 생각할 때 소재는 소재일 뿐 그대로는 아직 시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의 시는 이들 소재가 시인(詩人)의 개성(個性) 있는 가슴과 손을 통하여 다시 창조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란 시인(詩人)이 자연(自然)을 소재로 하여 그 연장으로서 다시 완미(完美)한 결정(結晶)을 이룬 제이(第二)의 자연(自然)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뿐 아니라 모든 예술(藝術)은 자연을 정련(精鍊)함으로써 다시 자연에 통하게 하는 것이요, 바꿔 말하면 막연한 자연에 특수한 의미(意味)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에 더 많이 통할수록 우수한 시(詩)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詩人)이 창조(創造)하는 제이(第二)의 자연이라는 시는 어떠한 용광로(鎔鑛爐) 속에서 정련(精鍊)되는 것이겠습니까. 나는 이 시의 태반(胎盤)을 먼저 자신의 사상(思想)이란 한 말에다 두려 합니다. 남에게서 빌려 온 지식(知識)이 아니요 남에게서 얻어들은 감각(感覺)이 아니요 남이 찾은 이념(理念)이 아닌 저 자신의 속에서 무르익은 사상, 이것은 벌써 개념도 지식도 이론도 아닌 그의 인격(人格)이요 취미(趣味)요 감정(感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의 시 남의 학문(學問)은 저 자신의 사상을 이루는 요소는 되는 것입니다만 저 자신의 사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는 저 자신의 시는 생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시(詩)에 있어 사상이란 무슨 주의(主義) 무슨 논(論)의 기성공식(旣成公式)을 이름이 아니요 꽃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도 시의 사상이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의 사상이란 말은 이 경우에는 마음눈이라 할까, 관안(觀眼)이란 말과 동의어(同義語)라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듯합니다.
그러면 시의 태반(胎盤)이 될 수 있는 저 자신의 사상을 갖춘 사람은 모두 시를 쓸 수 있는가.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시를 사랑하고 알고 느끼는 사람이 있음으로써 시가 세상에 나오는 보람이 있고 시(詩)를 읽고 좋아할 줄 앎으로써 그는 시인(詩人)된 소질을 가진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저 자신의 사상을 가진다는 말은 시를 쓸 수 있는 태반(胎盤)일 뿐 시를 쓰기까지에는 다시 그 자신의 사상이 시(詩)를 위한 재편성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시(詩)를 위한 사상의 재편성이란 말은 영혼(靈魂)의 모성(母性)인 시인(詩人)의 배란작용(排卵作用)의 시초란 말이 아니겠습니까. 노래하지 못하는 새가 명금류(鳴禽類)에 들 수 없듯이 시를 알고 좋아한다고 시를 생산할 줄 모르는 사람까지 시인(詩人)이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詩人)이란 시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요 인생의미(人生意味)의 새로운 발견을 언어(言語)의 음률적(音律的) 구성을 통하여 개성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면 그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시를 쓰고 싶고, 시인(詩人)을 사랑하고 싶은 이는 대체 어떻게 하면 시를 지을 수 있을까 하는 데 생각이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듣고 배워서 곧 시(詩) 짓는 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설명으로써 시를 알고 시를 쓸 수 있다면 세상에 어찌 이다지도 참의 시인(詩人)이 희귀하겠습니까. 마침내 시란 것은 진실(眞實)한 느낌, 진실(眞實)한 표현을 통하여 나오는 그 자신(自身)의 전인격적(全人格的) 체험(體驗)에서만 스스로 체득할 수 있고, 이와 같이 시를 체득한 시인(詩人)의 생명의 결정(結晶)인 작품(作品)을 통하여서만 그의 최상의 ‘작시법해설’(作詩法解說)을 듣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서고금(東西古今)의 허다한 작시법(作詩法)이란 한갓 ‘나는 이렇게 시를 썼노라’라는 체험담(體驗談)에 지나지 않는 것은 물론 항상 이런 부질없는 시험(試驗)도 시인(詩人)보다는 학자(學者)가 많이 가지는 취미인 것도 사실입니다. 대체 우리는 남에게 시법(詩法)을 묻기 전에 제 자신의 시에 대한 공부의 치열함이 어떤가를 반성해야 될 것입니다.(중략)
먼저 시 쓰는 마음바탕으로 ‘경이’(驚異)를, 곧 놀라움을 느낄 줄 아는 심안(心眼)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전차 타고 나가는 생활, 날마다 뜨고 지는 해와 달과 별에 대한 ‘성찰(省察),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마침내 모든 것에 미치는 창조적 발견으로써 경이(驚異)가 없이는 시는 포착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평범한 사실의 비범화(非凡化), 이것은 결국 그 인생(人生)의 수련(修鍊)에서 오는 경이(驚異)의 체계(體系)에 연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뉴턴의 눈앞에 떨어지는 능금이나 석가(釋迦)의 눈앞에 빛나던 새벽별, 그것은 아무렇게나 보이게 된 내용이 아니요, 또 다만 우연히 보이게 된 현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당연하게, 평범하게 보는 곳에서는 예술(藝術)도 과학(科學)도 종교(宗敎)도 무슨 아랑곳이 있겠습니까.
그 다음 우리는 복잡한 사실(事實)을 단순화하는 태도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황홀한 느낌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시정(詩情)입니다. 단면(斷面)의 전체성(全體性)이 그 표현(表現)의 순일(純一)한 조화(調和)를 얻을 때 이 복잡한 인간성(人間性)의 소음 속에 들려오는 개성 있는 소리를 잡을 수 있고 거기서만 시(詩)의 바른 탄생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순일(純一)에서 우리는 더 많이 세밀한 화성(和聲)을 감지(感知)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유한(有限)을 무한화(無限化)하는 기법을 닦아야 하겠습니다. 망망(茫茫)한 누리, 덧없는 세월 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찰나(刹那)의 움직임의 미묘한 바를 보고 듣고 느낌으로써 그것을 핍진(逼眞)하게 사생(寫生)하고 그리하여 무한한 뜻이 그 속에 녹아들도록 구성할 때 비로소 작자(作者)가 느낀 그때 그곳 그 움직임의 정확하고 순미(純美)한 감성적(感性的) 전달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으로써 한 작품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공명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고요한 밤은 벽에 기대어 눈감고 생각함이 있어 스스로 고개 끄덕여지는 바 있으면 차라리 시(詩)를 위하여 더 큰 공부가 될 것을 생각하면 나도 이 밤 부질없는 노릇을 하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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