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여, 군자와 같은 선비가 되어라
김 재 황
어찌 시인이 ‘선비’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어야만 되겠는가. 시인은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닦음으로써 ‘군자’(君子)의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
어느 날, 공자가 사랑스러운 자하(子夏)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군자와 같은 선비가 될지언정 소인과 같은 선비는 되지 마라.”
이 원문이 ‘여위군자유 무위소인유’(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이다. ‘유’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곧 선비임’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리고 ‘군자’(君子)는 ‘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공자가 말한 그 군자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겠다.
한 마디로, 공자는 ‘군자’(君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면 ‘군자’란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무게가 없으면 위엄이 없으니 배워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충과 신을 주로 할 것이며, 나만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군자’가 유의할 점이다. 그러니까, 이는 이 사회의 시인들이 지녀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먼저, 군자는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유머’를 중시하는 시대라 그런지, 위엄을 갖춘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 많이 배운 학자까지 그렇다. 또, 무엇보다 ‘군자’에겐 ‘충’(忠)과 ‘신’(信)이 중요하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충’은 ‘마음이 가운데에 자리 잡음으로써 흔들리지 아니함’을 가리키고 ‘신’은 ‘말을 했을 때, 그 말에 신험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훌륭한 벗을 사귀고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고쳐야 더욱 나은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다투는 법이 없다. 그러나 굳이 다툼이 있다고 말한다면 ‘활쏘기’ 정도가 되겠다. 활을 쏘려고 당에 오를 때에도 서로 읍하는 예를 한다. 또 당에서 내려와서는 벌주를 마신다. 이러한 다툼이야말로 군자답지 아니한가?”
여기에서의 ‘읍’(揖)은 ‘두 손을 모아서 위로 올리며 절함’을 말한다. 그리고 ‘활쏘기’에서 진 사람은 당에서 내려온 후에 ‘벌주’(罰酒)를 마시게 된다. ‘벌주’란, ‘벌로 마시는 술’을 말하지만, 내가 듣기에는 ‘위로로 마시게 하는 술’이라고도 한다.
공자는 다시 말했다.
“군자는 긍지를 가지나 다투지 않으며,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는 하지만 패거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이는, ‘시인은 자기 몸가짐을 공정하고 근엄하게 가지므로 남과 다투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욕심이 없으므로 자기들만의 무리를 짓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언제인가, 공자가 이렇게도 말했다.
“그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어렵다.”(기언지부작 즉위지야난.: 其言之不作 則爲之也難. 14-21)
여기에서 말하는, ‘작’(作)은 ‘참’(慙)과 같이 ‘부끄러워함’을 말한다. 그리고 ‘위지야난’(爲之也難)에서 ‘위’(爲)는 ‘행하는 것’을 말하고 ‘난’(難)은 ‘행하기 어려운 것’을 이른다. 또, ‘야’(也)는 주격조사로 강조하는 말이다.
이는, ‘큰소리나 치고 말을 가볍게 여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실천을 보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서 ‘실천하는 사람은, 말의 잘못을 아주 부끄럽게 여긴다.’라는 뜻이 된다. 언행일치를 강조한 말이다. 이와 같은 뜻으로 공자는 또 말했다.
“군자는 말을 부끄럽게 하고 행동은 여유 있게 한다.”
이는, ‘말은 지나치게 하기가 쉬우므로 부끄럽게 하여야 하고, 행동은 말에 따르지 못하기가 쉬우므로 여유를 가지고 행동하여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군자’는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면 안 된다.
그런데 ‘군자’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자공만이 아니었다. 자로도 공자에게 물었다.
“군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다.
“수기이경이다.”
‘수기이경’(修己以敬)은 ‘자기 언행을 수행하여 경건하고 성실하게 하는 것’을 이른다.
그 말을 듣고, 자로는 다시 물었다.
“그렇게만 하면 됩니까?”
공자는 다시 대답했다.
“수기이안인이다.”
‘수기이안인’(修己以安人) 중에서 ‘안인’(安人)은 ‘자기 덕행을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여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또, 공자가 말하였다.
“부귀는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지 않았다면 군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빈천은 누구나 싫어하는 바이나, 정당한 방법으로 얻지 않았어도 군자는 버리지 않는다. 군자가 ‘어짊’을 버리면 어찌 ‘군자’라는 이름을 이루겠는가? 군자는 밥을 먹는 동안에도 ‘어짊’을 어기지 아니하고 다급한 때라도 반드시 ‘어짊’에 의지하며 넘어져 자빠지는 때에도 ‘어짊’과 함께 있다.”(부여귀 시인지소욕야 불이기도 득지 불처야. 빈여천 시인지소오야 불이기도 득지 불거야. 군자 거인 오호성명. 군자 무종식지간 위인, 조차 필어시 전패 필어시.: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 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 得之 不去也. 君子 去仁 惡乎成名. 君子 無終食之間 違仁, 造次 必於是 顚沛 必於是. 4-5)
여기에서 말하는, ‘부’(富)는 ‘재물을 얻는 것’을 말하고 ‘소오’(所惡)는 ‘싫어하는 것’을 말하며 ‘불거’(不去)는 ‘싫어하여도 떠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고 ‘빈’(貧)은 ‘재물이 없는 것’을 이르고 ‘오호성명’(惡乎成名)은 ‘어찌 군자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를 이르며, ‘조차’(造次)는 ‘다급한 때’를 이른다. 또, ‘전패’(顚沛)는 ‘넘어져 자빠짐’의 뜻으로 ‘위급한 때’를 나타내며, ‘어시’(於是)에서 ‘시’(是)는 ‘어짊’(仁)을 가리킨다.
이 글을 읽으니,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는, ‘구차한 중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道)를 즐긴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가난함이 좋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당하게 얻지 않은 부귀보다는 어짊(仁)에 의한 가난함을 택한다는 말이다.
한 때, 공자가 구이(九夷) 땅에서 살기를 원하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누추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가 사는데 무슨 누추한 게 있겠는가?”
이 말 중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곳이 몇 군데 있다. 먼저 ‘구이’ 땅은, 동쪽의 작은 나라들, 즉 중국에서 생각하기를 ‘미개한 나라들’을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하기는 우리도 중국을 ‘오랑캐’라고 불렀으니, 마찬가지 논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문맥으로 보아서 ‘어떤 제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은, 공자가 스스로를 ‘군자’라고 말했다는 거다. 공자는, ‘군자는 누추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가슴에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누추한 곳에 산다면 군자를 자처할 수 있지 않겠느냐?’ 혹은 ‘군자는 사는 데가 누추하거나 안 하거나를 따지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자신 있게 스스로를 ‘군자’라고 말했을 듯싶다.
또, 이렇게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도를 꾀할 뿐이고 먹을 것을 꾀하지는 않는다. 농사를 지어도 배고플 수 있으나, 배우면 녹(祿 또는 福)이 그 가운데 있으니 군자는 도를 근심하지만 가난을 근심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녹이 그 가운데 있다.’라는 말이다. 원문에는, ‘녹재기중의’(祿在其中矣)라고 되어 있다. 이말 중에서 ‘녹’(祿)은, 보통 ‘녹봉’(祿俸)으로 여기고 있지만, 나는 ‘복’(福)으로 풀이하고 싶다. 배움이 취직하기 위함이라고 여긴다면, 너무나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군자’ 역시 출세와 결부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나는 ‘녹재기중의’를, ‘구하지 않아도 기쁨이나 행복은 그 안에서 자연히 얻게 된다.’라는 말로 받아들인다.
공자가 다시 말했다.
“군자는 말을 어눌하게 하려고 하며 행동은 민첩하게 하려고 한다.”(자왈 군자 욕눌어언이민어행.: 子曰 君子 欲訥於言而敏於行. 4-24)
‘군자’라면 마땅히 말에는 ‘느리고 둔하기를’ 바라고, 행동은 ‘민활하고 민첩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천거하지 않으며, 사람을 가지고 그 말을 버리지 않는다.”
이 말은, ‘군자는 언제나 공정하므로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그 말이 착하다고 하여 바로 믿지 않으며, 또 그 사람이 착하지 않다고 하여 그 사람의 착한 말까지 버리지는 않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공자의 말은 또 이어진다.
“언론이 독실하다고 그 인격을 허여한다면 그 사람이 과연 군자인지 아니면 겉만 꾸민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 말 또한, 말이나 얼굴만 가지고 사람을 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고 본다. 말이나 얼굴은 얼마든지 좋게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군자’는 신념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한 해답도 ‘논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곧으면서도 무턱대고 나쁘게 곧지는 않다.”(자왈 군자 정이불량.: 子曰 君子 貞而不諒. 15-36)
여기에서 말하는 ‘정’(貞)은 ‘바른 일을 굳게 지킴’을 말하고, ‘양’(諒)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집착함’을 말한다. 이는, ‘대의에 대해 굳은 신념을 지켜 나가지만, 옳고 그름을 불문하고 소신을 지키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아, 그리고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말도 있다. 앞에서도 조금 이야기했듯이, ‘군자’는 결코 그 쓰임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쓰임’은 방편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는 ‘방편’을 ‘목적’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여기에서 나의 스승이신 조지훈 선생님의 글을 되새겨 본다.
‘군자는 그릇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가능성만 지니고 끝내 그릇이 되지는 않는다. 간장 담으면 간장그릇, 국 담으면 국그릇, 똥 담으면 똥그릇 –그릇의 이름에 고착되고 대소에 논란되지 않는다. 무슨 때문인가. 그릇으로는 너무 커서 쓸모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군자는 담는 자가 아니라 담기는 자다. 담기기에도 너무 커서 담을 그릇이 없는 것이다. 설령 담긴다고 하더라도 요리로서 담기는 것이 아니고 담길 요리를 만드는 물이나 불이나 소금으로 담긴다.(중략) 너무 커서 쓸 곳이 없는 대기(大器)는 쓰지 못하는 데 쓸모가 있다. 무용(無用)으로 위용(爲用)이란 말이다. 용납되지 않음은 현실의 소기배(小器輩)가 알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고 버리고 구박하고 깨뜨리려 하는 탓이요, 군자 그 자신은 더 큰 민족과 인간에 봉사해서 지키는 도(道)가 있는 것이다.’(1961.5.1. 민국일보 ‘대기무용론’ 중에서 발췌)
사람들은 높이 출세하는 데에만 온 정신이 쏠려 있다. ‘출세’란 다른 말로, ‘쓰임을 받는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덕을 갖춘 ‘군자’, 즉 ‘시인다운 시인’은, 한 가지 쓰임에만 쓰이는, 일예(一藝) 일기(一技)의 재주꾼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일에만 능하고 다른 일에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때를 만나면 하늘을 날고, 때를 못 만나면 우물 속에라도 숨을 뿐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군자’와 ‘소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공자가어’에는 ‘군자’와 ‘소인’에 대한 내용이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다.
“어른을 뵈었을 때에 어른의 말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리 갑자기 바람과 비가 몰아친다고 해도 자리를 떠나면 안 된다. 그런 까닭으로 군자는 자기의 능한 바를 가지고 남을 공경하는 것이고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
공자가 또 말했다.
“군자는 자기 마음으로 귀와 눈을 인도하며 의지를 세워서 용맹스러운 일을 하지만, 소인은 이와 반대로 귀와 눈을 가지고 마음을 인도하여 공손하지 못한 태도를 용맹한 일로 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남에게 배척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자라면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도 좋다고 말하겠다.”
또한, 안회도 군자에 대하여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안회는 공자에게 물었다. 그 내용이 ‘공자가어’에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안회가 물었다.
“군자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진 데에 가깝고, 일을 법도대로 하는 것은 지혜로운 데 가까우며, 자기 몸을 위해서는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을 위하는 데에는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
안회가 또 물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배우지 않아서도 행하며 생각하지 않고서도 얻는 것이니. 소자들아! 힘써 해야 한다.”
어느 때, 안회가 다시 물었다.
“소인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공자가 말했다.
“남의 착한 일을 헐뜯는 것으로 자기가 말을 잘한다고 하며, 남을 속이고 교활한 짓을 하는 것으로 지혜롭다고 하며, 남의 허물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며, 배우기를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능하지 못한 것도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한다.”
안회가 다시 말했다.
“소인의 말도 군자의 말과 같은 게 있으니,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행동으로 말을 대신하고 소인은 다만 혀로만 말을 한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의리에 대하여 서로 권하므로 물러가서도 서로 사랑하게 되며, 소인은 어지러운 일에 대하여 서로 사랑하므로 물러가면 서로 미워하게 된다.”
자, 이만하면 ‘군자’에 대해서도 조금은 ‘느낌’이 잡힐 듯싶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군자’가 되려는 꿈을 지녀야 한다. 이 세상에 군자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시인이 바로 군자요, 군자가 바로 시인이다. 이 세상에서 ‘이로움’(利)을 버리고 오로지 ‘어짊’(仁)과 ‘옳음’(義)을 따를 사람이 시인밖에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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