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은 바로 '어짊'
김 재 황
시인이라면 마땅히 늘 ‘시심’(詩心)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쩌다가 시심을 갖는다면 자칫 ‘시인’의 면모를 잃게 될 수도 있다. 언제나 그러하게 ‘시인답지’ 않고서야 어찌 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시심’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나는 이를 가리켜서 ‘어짊’(仁)이라고 말한다. 물론, 공자는 이 ‘어짊’을 우리 삶에서 으뜸으로 꼽았다.
국어사전을 보면 거기에는 ‘타고난 어진 마음씨와 자애(慈愛)의 정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를 완성하는 덕(德)’이라고 되어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때에 어느 책에서 ‘어짊’(仁)은, ‘윤리적(倫理的, ethical)이라기보다 감성적(感性的, feeling-oriented)이고, 감성적이라기보다 심미적(審美的, esthetical)이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이를 한 마디로 줄여서 ‘심미적 감수성’(審美的 感受性, Aesthetic sensitivity)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은 어떠한 사물에서든지 아름다움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예술적 감성’이기도 하다. 감히 단언하거니와, 시인의 가장 큰 덕목도 바로 이 ‘어짊’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러 제자들이 ‘어짊’에 대하여 ‘공자’(孔子)에게 물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공자의 답변을 들어 보기로 하겠다. 아마도, 여러 제자 중에 ‘번지’(樊遲)라는 사람이 가장 ‘어짊’(仁)에 대하여 알고자 했던 것 같다. 그의 ‘어짊’에 대한 물음이 ‘논어’에 세 번씩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와의 첫 번째 문답은 다음과 같다.
번지가 ‘어짊’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는 대답했다. “일상생활에 공손하며, 일을 할 때에 신중하며, 사람을 사귈 때는 충성을 다해야 한다. 이런 행실은 비록 궁벽한 나라에 간다고 하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번지 문인 자왈, 거처공 집사경 여인충 수지이적 불가기야.: 樊遲 問仁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논어 13-19】
여기에서, ‘어짊’이란 ‘공손하고 신중하며 충성스런 사람의 마음’을 뜻한다고 여겨진다. ‘공손하고 신중하며 충성을 다함’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이다. 이 글에서 ‘거처’(居處)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때’를 가리킨다. 그리고 ‘집사’(執事)는 ‘어떤 일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는 때’를 나타낸다. 그 말 외에도 ‘안연편’에서는 ‘어짊’을 ‘애인’(愛人),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또 ‘옹야편’에서는 ‘어짊’을 ‘선난이후획 가위인의’(先難而後獲 可謂仁矣), 즉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보답은 뒤로 미루는 것이며 그래야 어짊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선난’(先難)은 ‘어려운 일을 남보다 내가 먼저 나서서 하는 것’을 이른다. 어떤 이는 ‘선난’을 ‘먼저 힘을 쏟는다.’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어쨌든지 이 모두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인 ‘안연’(顔淵)이 ‘어짊’(仁)에 대하여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누르고 예를 행하는 게 어짊이니, 단 하루라도 예에 맞게 행동하면 천하의 사람들이 너를 어질다고 하리라. 어짊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야지 어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겠는가?”
‘나를 누르고 예를 행한다.’라는 말의 원문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여기에서 ‘극’은 ‘승’(勝)을 말하고, ‘기’는 ‘일신의 사욕’을 이른다. 그리고 ‘복’은 ‘반’(反)을 가리키고 ‘예’는 ‘천부의 정도가 외형에 나타난 것’을 말한다. 또, ‘천하의 사람들이 어질다고 한다.’는 ‘천하귀인언’(天下歸仁焉)이다. 여기에서 ‘천하’는 ‘모든 사람들’을 뜻하고 ‘귀’는 ‘허여’(許與), 곧 ‘인한 사람이라고 칭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짊’(仁)에 대해 여러 제자들, 즉 ‘중궁’(仲弓)에게는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사마우’(司馬牛)에게는 ‘말을 참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자공’(子貢)에게는 ‘인자한 선비를 벗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궁’은 ‘염옹’(冉雍)의 ‘자’(字)이고, ‘사마우’는 성이 ‘사마’(司馬)인데, 이름은 ‘경’(耕)이며 ‘자’는 ‘자우’(子牛)이다. 어떤 기록에는 ‘사마우’의 이름이 ‘리’(犁)라고도 하였다. ‘사마우’는 말이 조금 많고 경솔한 면이 있는 듯싶다. 그래서 ‘말을 참아야 한다.’라고, 공자는 말했다.
또한, 제자인 ‘자장’(子張)이 ‘어짊’(仁)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천하에 다섯 가지를 행할 수 있으면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 다섯 가지는, ‘공’(恭)과 ‘관’(寬)과 ‘신’(信)과 ‘민’(敏)과 ‘혜’(惠)이다. 즉, ‘공손하면 모욕을 받지 않고 관대하면 여러 사람들의 옹호를 받게 되며 성실하면 다른 사람에 의해 임용되고 민첩하면 일의 효율과 공이 크게 되며 은혜로우면 사람을 부릴 수 있다.’라는 뜻이다.
어느 날, ‘원헌’(原憲)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남을 이기기 좋아하고 공을 자랑하며 남을 원망하고 탐욕스러운, 이 네 가지를 행하지 않으면 어질다(仁)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을 받고, 공자는 대답했다.
“그렇게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게 ‘어짊’인지 ‘어짊’이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이로써 ‘어짊’은 ‘마음에 있는 바른 도리가 스스로 우러나서 자연히 행하여져야만 된다.’라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이왕 내친 김에, 공자의 ‘어짊’(仁)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 보기로 한다. 우선, ‘학이편’에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교묘하게 꾸민 말과 아첨하는 얼굴빛에는 어짊(仁)이 드물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교언’(巧言)은 ‘남이 듣기 좋게 꾸민 말’이고, ‘영색’(令色)은 ‘남의 환심을 사려고 겉으로 꾸민 얼굴빛’이다. ‘선의인’(鮮矣仁)은, ‘인선의’(仁鮮矣)의 도치법으로, ‘어세를 강하게 한 것’이다. ‘선’(鮮)은 ‘드물다’의 뜻을 지녔는가 하면, ‘의’(矣)는 ‘개탄의 뜻’을 지닌 종조사(終助詞)이다. ‘사기꾼’은 모두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잘 바꾼다.
또, 술이편에도 공자의 ‘어짊’(仁)에 대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즉, ‘인이 멀리 있겠느냐? 내가 인하고자 하면 곧 인이 이르게 된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마음먹기에 따라 인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인다.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위영공편’을 보면, 지사(志士)와 인자(仁者)는 ‘몸을 바쳐서 어짊을 이룩하는 경우가 있다.’라는 말이 나타나고, ‘어짊을 행함에 있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몸을 바친다.’와 ‘스승에게도 양보 못한다.’가 모두 ‘결사적인 의미’를 그 안에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인’(仁)은 목숨처럼 끝까지 지켜야 할 덕목이라는 말이겠다.
그런데 ‘이인편’은 그야말로 ‘인(仁)의 묶음’이라고 말해도 될 성싶다. ‘인한 마을에 사는 게 아름답다.’라는 말을 선두로 하여 ‘어진 사람(仁者)은 어짊에 안주하고 슬기로운 사람(知者)은 어짊을 이롭게 여긴다.’라는 말이 있고, ‘어진 사람이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라는 말도 있다. 앞에서 ‘어짊’을 ‘애인’(愛人)이라고 했으니, 이는 아주 당연한 말들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어짊에 뜻을 두면 악이 싹틀 수가 없다.’라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짊’(仁)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할 나위도 없거니와, ‘어질지 않음’(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 ‘어짊’을 실행함에 있어서 ‘어질지 않음’으로 하여금 그 몸에 붙지 못하게 한다.’라든가 ‘허물을 보면 그 어짊을 곧 알게 된다.’라는 말도 보인다.
공자가 아끼는 제자인 ‘자공’에게 들려준 ‘어짊’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어진 사람은 자신이 나서려고 하는 곳에 남을 내세우고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 데에 남을 이루게 한다. 가까운 자신을 가지고 남의 처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바로 인을 행하는 방법이다.”
사실, ‘어짊’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가까이 있는 ‘어짊’을 실천하는 게 중요한 일이다. ‘어짊’을 머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반드시 가슴으로 받아들여서 손과 발로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공자가어’를 보면, ‘어짊’(仁)에 대한 공자의 말이 다음과 같이 담겨 있다.
“대체로 따뜻하고 참된 것은 어진 것의 근본이며, 삼가고 공경하는 것은 어진 것의 바탕이며, 너그럽고 넉넉한 것은 어진 것의 행동이며, 겸손한 대우는 어진 것의 재능이며, 예에 대한 절차는 어진 것의 형용이며, 말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진 것의 문채(文彩)이며, 노래와 음악은 어진 것의 화락(和樂)이며, 재물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흩어 주는 것은 어진 마음의 베풂입니다.”
이는, 공자가 ‘애공’(哀公)에게 한 말이다. ‘애공’은 공자 말년의 노나라 임금이다. ‘애공’이 물었다.
“어떤 사람을 어진 사람이라고 합니까?”
공자가 ‘애공’에게 말했다.
“어진 사람은 그 덕이 법을 넘어서지 않게 하고 행동을 척도에 맞게 하며 말을 천하의 법이 되게 하기 때문에 몸에 손상을 입지 않으며, 그 도가 백성들에게 덕화(德化)를 끼치기 때문에 역시 자기 근본에 손상을 입히지 않습니다. 부(富)에 대해서는 천하에 재물을 쌓아놓는 일이 없고 남에게 재물을 줌에 이르러서는 천하에 가난함을 걱정하는 일이 없으니 이러한 사람을 어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모두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다시 공자의 말을 들어 본다.
“사람이 어질지 아니하면 예(禮)는 무엇에 쓸 것이며, 사람이 어질지 아니하면 악(樂)은 무엇에 쓸 것이냐?”(인이불인 여례하 인이불인 여악하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3-3)
여기에서 ‘인이불인’이란, ‘모습은 사람의 탈을 썼으나 마음에 어진 덕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서 ‘인이불인 여시하’(人而不仁 如詩何)를 외치고 싶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 ‘어짊’은 늘 가슴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날, 공자는 말했다.
“회(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지나도 ‘어짊’에 어긋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을 어짊에 이르고 말더구나.”(회야기심 삼월불위인 기여즉일월지언이이의 ‘回也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6-5)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없을 듯싶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시인은 언제나 시심, 즉 ‘어짊’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시인이 이 ‘어짊’을 잃으면 목숨을 잃는 바와 같다. 그런데 공자는 이 ‘어짊’(仁)의 본질이 ‘서’(恕)에 있다고 보았다. ‘서’는 ‘나의 마음을 남의 마음에 이입(移入)하여 함께 느끼는 공감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아마도 이를 기독교적으로 풀이한다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이 될 성싶다. 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보편적인 가치관’이며 더 나아가서 ‘인류애’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어짊(仁)의 느낌이 남과의 관계에서 이야기될 때에 ‘서’(恕)가 된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공자에게 “한 마디로 종신토록 지켜 행할 만한 말이 있습니까?”(유일언이가이종신행지자호?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서슴없이 “그것은 ‘서’(恕)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기서호. 기소불욕 물시어인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15-23)라고 말했다.
시인이 늘 ‘어짊’의 시심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좋은 작품(詩)을 많이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시인다운 모습을 늘 지닐 수가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을 받게 될 터이다. 그게 바로 ‘시인의 길’을 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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