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다운 시’ 알기
김 재 황
공자(孔子)가 36세 때의 일이었다. 제(齊)나라로 가서 제나라의 임금인 경공(景公)을 만났다. 경공은 공자를 만나게 되자, 그 동안 가슴에 넣어 두었던 말을 불쑥 그 앞에 꺼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참으로 간단명료했다. 공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과 같이 경공에게 대답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이 말이 그 유명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이다. 이 말은, 시인은 시인다워야 하며, ‘시를 쓰는 데’에 있어서도 통용된다. 말하자면 시인은 ‘시다운 시’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시다운 시’는 어떤 것일까?
이 답을 알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시(詩)의 본질을 짚어 보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사실적 진실보다는 문학적 진실이 더욱 의미 있다.’라고 말하면서 역사보다도 시를 한 단계 더 높이 평가했다. 게다가 그는, ‘시가 인간의 마음과 감정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작용이 있음’을 믿었다. 이를 소위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 한다. 지금도 카타르시스는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감상함으로써 마음속에 솟아 오른 슬픔이나 공포의 기분을 토해 내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뿐만 아니라 공자도 ‘시의 예찬론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는 왜 시(詩)를 배우지 않느냐? 시(詩)는 그것으로 감흥을 자아낼 수 있고, 그것으로 살필 수 있으며, 그것으로 여럿이 모일 수 있고 그것으로 불의를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아버지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게 하며, 새와 짐승 및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소자하막학부시 시 가이흥 가이관 가이군 가이원 이지사부 원지사군 다식어조수초목지명’(小子何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郡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그리고 공자는, ‘시(詩)는 인정에 근본을 두어서 도리를 밝히고 풍속의 성쇠를 말하며 정치의 득실을 볼 수 있고 그 말이 온후하며 풍류를 지녔기에 이를 배우면 다스림에 통달하고 말도 잘하게 된다.’라고도 했다.
시(詩)라는 한자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말로 나타낸 것’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러므로 시에서는 무엇보다도 ‘말’이 중요하다. 모든 문학작품에서도 그렇거니와, 시도 ‘언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 시(詩)는 ‘언어의 예술’이다. 다시 말해서 시는 문자언어인 ‘글’로서 창작되고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글’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글의 생성뿐만 아니라, 그 활용법과 맞춤법까지 소상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시에 쓰이는 글과 산문에 쓰이는 글은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시는 ‘아름다운 율동의 창조물’이란 말이 있듯이, 시의 글은 ‘리듬을 지닌 글’이어야 한다. 이를 가리켜서 ‘운문’(韻文)이라고 한다. ‘운’(韻)이란 한자는, ‘소리가 둥글고 고르게 잘 어울리는 것’을 나타낸 글자이다. 비유하건대, 산문을 ‘밥’이라고 한다면 운문은 ‘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는 ‘먹기 좋은 떡’처럼 너무 길게 붙여 쓰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시(詩)가 어떠한 것인지 느낌이 갈 터이다. 한 마디로,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시(詩)에 대한 특질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시(詩)’가 바로 ‘시(詩)다운 시(詩)’이다.
또 하나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게 있다. 시는 논픽션이다. 그래서 정직해야 한다. 게다가 시(詩)는, 그 작품을 쓴 시인의 품격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렇기에 시인은 높은 품격의 시를 창작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마음을 항상 아름답고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 독자가 시 한 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 시인까지 잘 알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시인의 길’이란 어떤 것인가를 여기에 다시 한 번 밝혀 보고자 한다.
요즘에는 문인이 되는 길이 개방되었다. 좋은 작품을 얻기 위해 노력할 각오만 뚜렷하다면 누구든지 등단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물론, 문인으로 성공하려면 등단한 후에 더욱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여하튼 그 수많은 문학지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문인들을 배출하고 있으므로 근래에 이르러서 문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그런데 이렇게 시인은 많아도 정작으로 ‘눈이 번쩍 뜨이는 시(詩)’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불평의 소리가 높다. 이는, 무엇보다도 시인들이 잡념 없이 오직 시에만 매달리기에는 너무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일 터이다.
사실 시(詩)는 돈이 되기가 어렵다. 몇 명의 널리 알려진 시인(詩人)을 제외하고는 출판사에서 시집을 만들려고 하지도 않는다. 하는 수없이 시인이 자비(自費)로 시집을 만들어 내놓아도, 많아야 5백부가 팔리는 게 고작이다.
그러니 시인들은 생계(生計)를 잇기 위해 시(詩)와는 무관한 직장이라도 구해서 일해야 한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시달리다 보면 시(詩)를 쓸 마음의 여유를 얻기 힘들다. 정말이지, 시심을 얻기가 참으로 힘들다.
어쩌다가 시집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들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대부분은, 독자가 순수하게 그 시집의 작품들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나 그 시집의 제목이 동정이나 흥미를 끌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렇기에 어느 비평가는 이런 시집일수록 그 안에 실린 시의 질(質)이 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잘 팔리는 책이 곧 좋은 책은 아니다. 언제인가 서울 시내의 한 대형서점이 국내 출판계에 만연돼 있는 상업주의에 제동을 건 일이 있었다. 서점이 특정도서의 내용을 문제 삼아 판매를 거부한 일은 국내 출판사상 처음 있었던 일로서, 조금 더 일찍 이러한 시도가 있어야 했다.
이렇게 시를 쓰려면 경제적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요즘은 사십대의 주부(主婦)들이 시인으로 등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제 자식들을 웬만큼은 키워 놓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을 얻었기에, 그동안 잠재워 두었던 시인의 꿈을 다시 피워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이 ‘안일하게 쓴 수준미달의 작품’을 가지고 돈으로 등단을 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가장 순수해야 할 시단(詩壇)마저 오염되어 간다는 개탄(慨嘆)의 소리를 듣게 되니 그게 문제다.
등단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성취일 수가 없다.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데는 즐거움보다 오히려 큰 고통이 따른다. 숙명적(宿命的)이라고 보아야 옳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심사숙고(深思熟考)한 후에 이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 마치 ‘탈속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경우와 같이’ 비장한 결심이 있어야 한다.
시작(詩作)은 도(道)를 닦는 일이나 같다. 시(詩)는 아름다움의 추구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작품과 행동이 그 내용면에서 일치해야 한다.
또한, 문단에 등단하여 시인의 칭호를 듣는 그 순간, 시인은 열심히 시를 써서 발표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시인에게는 휴식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시를 쓰는 일이 있을 뿐이다. 시인은 늘 낮은 곳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또 그들의 따뜻한 불빛이 되어 주어야 한다. 시인으로 등단하고서도 시를 게을리 쓴다면 그것은 독자를 기만하는 짓이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현재진행형(現在進行形)이어야 한다. 십년 전쯤에 몇 편의 시를 내놓고는 지금까지 시 한 편 발표도 않은 채로 시인의 칭호를 듣기 원한다면, 그는 참으로 뻔뻔스러운 사람이다.
시인이 좋은 시를 쓰려면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그렇지만 좋은 책은 구하기도 어렵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부담이 간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더욱 많은 도서관을 지어야 한다. 문화를 지닌 나라라면 적어도 인구 10만 명당 1개 수준으로 도서관이 설립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시인이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결코 시인의 노력부족 탓만은 아니다. 시인으로 등단시켜 놓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문학지나 신문사의 무책임이 더 크다. 이는, 어머니가 아기를 낳아 놓고도 양육하지 않는 바와 다르지 않다.
시(詩)란 희생 없이는 이룰 수가 없다. 영혼을 불살라야 한다. 세상이 어둡다고 한탄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에서 시인들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준다면 한결 세상이 밝아질 게다. 앞으로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모두가 시를 가까이 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하기야 사람 중에 시인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성싶다. 특히 시만을 생각하는 전업시인은 몸과 마음이 모두 꽃과 같다. 언제나 그는 시심 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것도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우리는 일평생을 학문탐구에 바친 학자나, 오로지 도자기 만들기에 그의 영혼을 불사른 도예가, 그리고 끝없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체육인 등을 존경한다.
이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덜 자고 덜 먹으며 덜 가져야 한다. 그리고 더욱 노력하여 흘리는 땀이 없고서는 우뚝 설 수가 없다. 하물며 시인의 길에 있어서야 더 말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시(詩)를 쓰는 일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무엇보다도 고독과 홀로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 게다가 항상 시만을 생각하고 살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없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시(詩)가 돈이 되지 못하기에 거의 모든 시인이 직장을 갖고 있다. 먹고 살려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직장생활도 시작생활도 모두 변변할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나이에 시인으로 입문(入門)하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보기에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시인들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요즘은 나이 사십을 훌쩍 넘기고 시인이 되는 사람을 많이 본다. 현실적으로 어쩌면 바람직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시(詩)에만 전념할 각오이고, 또 그럴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면 말이다.
시인이 되기는 쉽지만, 시인으로 살기는 어렵다. 어디 어느 문학지에 작품이 당선되어 시인이 된 것을 마치 정상에 올랐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다만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노력은 하지 않고 연수만을 따져 가며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수로서, 의사로서, 사업가로서 시인이란 이름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려고 한다. 하던 일을 과감히 버리고 시인의 길을 택했다면 누가 무어라고 하겠는가마는, 그들은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욕심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
물론, 어쩌다가 그들 중에는 두 가지 일을 훌륭히 해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두 가지 일 중에서 한 가지 일만을 선택하여 정진한다면 더욱 큰 업적을 이룰 수가 있겠기에 안타까운 심정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적으로 두 가지 일을 똑같이 병행할 수 없다. 어찌 한 포수가 두 토끼를 좇을 수 있겠는가. 자연히 둘 중에서 하나는 부수적일 수밖에 없으니 슬픈 일이다.
시(詩)를 쓰는 일은 적당히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그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영혼을 불사르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시(詩)를 쓴다고 시인이 되는 게 아니다. 시인이기에 시를 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詩)보다도 사람이 먼저라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사람이 제대로 된 시를 쓴다.
시인은 늘 시적(詩的)으로 생각하고 시적(詩的)으로 말하며 시적(詩的)으로 행동한다. 시인의 생활자체가 곧 시(詩)다. 그러므로 당연히 시인은 돈을 모른다. 가난할 수밖에 없다. 가난하니 아픔이 있고, 아프니 시를 쓴다.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다시 강조하거니와, 시를 쓰는 이유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함으로써 아름다운 영혼을 지니기 위해서이다.
마음이 가난한 영혼, 그 전업시인(專業詩人)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더 없이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인이란 시(詩)와 결혼한 사람이다. 이왕에 부부가 되어서 가정을 이루었으면, 금슬 좋게 아들 딸 낳고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결혼식 때에 모든 사람 앞에서 선서한 대로, 오직 시(詩)만을 사랑하고 아낄 일이다. 죽음이 그 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킬 일이다.
공연히 주위를 기웃거리며 다른 일을 넘겨다보아서는 안 된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서 시심(詩心)을 멀리 한다면, 아름다운 시(詩)는 슬퍼하며 그의 곁을 떠나 버리고 말게 될 게다. 시(詩)를 버린 그를 두고, 누가 그를 다시 ‘시인’(詩人)이라 불러 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일생을 해로한 전업시인은 위대하다. 2월의 추위 속에서 당당하게 꽃을 피우는 동백처럼 아름답고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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