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시의 실체
김 재 황
사람들은 흔히 ‘낭송’(朗誦)이라면 ‘반드시 외워서 해야 되는 줄’로만 알고 있다. 원래 ‘낭’(朗)이라는 글자는 ‘소리 높이’ 또는 ‘또랑또랑하게’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송’(誦)이라는 글자는 ‘물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쉬지 않고 글을 읽는 것’으로, ‘읽다’ 또는 ‘외다’를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낭송’이라는 말 속에 ‘암송’(暗誦)이나 ‘낭독’(朗讀)의 뜻이 모두 담겨 있다고 보아야 옳을 성싶다. 백과사전에도 ‘낭송’을 ‘글을 소리 내어 외거나 읽음’ 또는 ‘소리 내어 외거나 읽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서 ‘암송’은 ‘머릿속에 외워 두고 읽음’을 뜻하고, ‘낭독’은 ‘그냥 소리를 높여서 읽음’을 뜻한다.
‘낭독’의 개념을 보면, “음독의 한 가지로, 씌어 있는 내용을 이해한 뒤에 목소리로 표현하는 읽기 방법이 ‘낭독’이다. 시를 감상할 때에 낭독을 하면 더 큰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시는 읽기에 따라 그 맛이나 분위기가 달라진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낭독 방법’을 보면, “낭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 낭독은 남들에게 작품을 들려주기 위한 경우이다. 그렇기에 시를 낭독할 때에는 낭랑하고 정확하게 읽는 게 중요하다. 특히 말의 리듬이나 억양을 살려 읽으면 더욱 효과적이다.”라고 요약되어 있다. 자기 자신이 시를 음미하거나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크게 읽으면서 스스로 듣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녹음기를 이용하는 방법이 크게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낭송으로 가장 유명한 것을 말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인도의 ‘베다 낭송’(vedic chant)을 내세우겠다. 이는, 인도의 ‘종교 찬가 낭송’이다. 그들은 힌두교의 고대 성전인 ‘베다’에 나오는 찬가를 종교적으로 낭송한다. 그 역사가 최소한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구전이다. 다음은 그 사전적 설명이다.
“가장 오래된 베다의 본집(samhita)은 ‘리그베다’(rigveda)로 1,000여 개의 찬가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이들은 한 음절을 한 음으로 하여 고음으로 발성하는 음절 형식에 3단계의 높낮이가 적용되어 낭송된다. 하나의 기본 암송 음은 그 주변의 높은 음과 낮은 음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이러한 꾸밈은 성전에서 문법적으로 악센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러한 ‘리그베다’의 여러 찬가들은 후대 ‘사마베다’(samaveda, 찬송의 베다)의 기초가 된다. ‘사마베다’의 찬가들은 음절 형식이 아니라 한 음절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음표를 붙이는 장식적 성악 양식인 멜리스마(melisma) 양식인데 더 화려하고 음악적으로 노래되었으며 음의 범위도 여섯 또는 그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단순하고 수적인 기본법은 경전에 대한 ‘절대적 정확성’ ‘억양’ ‘몸의 자세’ 등을 강조하는 구전과 함께 이 안정된 전통을 영구화하고 인도 전역에서 찬가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공헌했다. ‘베다’는 오늘날에도 몇 세기 전과 똑같이 정확하게 낭송된다.”
인도에 싯다르타가 살았을 당시, 그가 전하는 지혜도 모두 시로 이루어졌다. 그로써 가르치고 그로써 배웠다. 또한, 그 당시에는 기록이 없었으므로 그 일이 모두 암송으로 이루어졌다. 그 시의 아름다움은 암송할 때에 더욱 빛이 난다. ‘팔리’어 자체가 아름다운 발음을 지니고 있기도 하려니와, 시를 지을 때에 그 운(韻)을 읊기 좋고 듣기 좋게 맞추었다. 그래서 이 시들은 읊기에도 아름답고 듣기에도 아름답다. 이를 가리켜서 ‘압운’(押韻)이라고 한다. 이는, ‘시가(詩歌)에서 일정한 자리에 같은 음(音)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운율적(韻律的)인 효과를 내는 일’을 나타낸다. 그러면 이번에는, ‘마하망갈라 숫타’(Mahamangala Sutta), 즉 ‘행복의 시’를 예로 들어서 그 ‘압운’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잘 받드는 것-
이는 바로 더없는 행복이다.
--- 숫타니파타 259
위의 시에 대한 ‘팔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Asevana ca balanam,
Panditanan ca sevana,
Puja ca pujaniyanam-
Etam mangalam uttamam.
또, 이 ‘팔리’어 원문에 대한 발음은 다음과 같다.
아쎄와나 짜 발라낭,
빤다따난 짜 쎄와나,
뿌자 짜 뿌자니야낭-
에땅 망갈람 웃따망.
자, 보아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첫째 줄과 둘째 줄과 셋째 줄의 그 모든 가운데에 ‘짜’를 넣음으로써 멋있는 ‘가락’이 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첫째 줄의 ‘발라낭’과 셋째 줄의 ‘뿌자니야낭’이 마주 보고 웃는가 하면, 셋째 줄의 ‘뿌자니야낭’과 넷째 줄의 ‘에땅’이 앞과 뒤로 손을 잡고 이어진다. 게다가 그 각 줄의 끝남이 ‘낭’ ‘나’ ‘낭’ ‘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낭’이 ‘꽃을 활짝 피운 상태’라면 ‘나’는 ‘꽃봉오리의 상태’이고, ‘망’은 ‘꽃이 아름답게 지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보아도 될 성싶다. 그러면 다른 하나를 더 보고자 한다.
악을 싫어하여 멀리하고,
술 마심을 절제하며,
가르침을 따르기에 게으르지 않은 것-
이는 바로 더 없는 행복이다.
---숫타니파타 264
위의 시에 대한 ‘팔리’어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Arati virati papa,
majjapana ca sannamo,
Appamado ca dhammaesu-
Etam mangalam uttamam.
또, 이 ‘팔리’어 원문에 대한 발음은 다음과 같다.
아라띠 위라띠 빠빠,
맛자빠나 짜 샹냐모,
압빠마도 짜 담메쑤-
에땅 망갈람 웃따망.
아! 참으로 아름답다. 둘째 줄과 셋째 줄의 가운데에 ‘짜’를 놓음으로써 ‘운’(韻)을 맞추었는가 하면, 첫째 줄의 끝에 ‘빠’를 놓고 셋째 줄의 끝에 ‘쑤’를 놓음으로써 다시 한 번 ‘파도타기’를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첫째 줄에서는 이미 ‘아라띠’와 ‘위라띠’로 ‘운’을 밟았다. 그러므로 그 운율이 마치 ‘하나둘 셋 넷’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첫째 줄에서 ‘빠빠’와 둘째 줄에서 ‘맛자빠나’의 ‘빠’, 그리고 셋째 줄에서 ‘압빠마도’의 ‘빠’가 징검다리와 같이 놓여 있다. 그러니 이 시를 직접 듣는다면 어떠할지, 상상이 갈 터이다.
요즘에 들어서 ‘시낭송 대회’가 더러 열리고 있는데, 주최자 측에서 낭송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외워서 낭송하도록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안 될 일은 없겠지만, ‘낭송’이라면 작품을 보고 ‘소리 높이 또랑또랑하게’ 읽어도 되는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하여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일도 활성화되어 있다. 더욱이 각종 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낭송을 통하여 시를 감상할 때에는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이나 상황이라든가 분위기까지 부수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낭송’은 듣는 사람의 정서와 상상력에 닿아서 감동을 주는 영역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낭송의 목적은, 낭송하는 시(詩)를 명확하고 정확하게 청중에게 전달하는 데 있다. 알아듣기 쉬워야 한다. 그래서 낭송하는 사람은 시(詩)와 일체감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한 몸이 되었을 때, 낭송의 리듬이 살아날 수 있다. 이는, 낭송하는 사람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낭송을 듣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낭송하는 사람과 낭송을 듣는 사람이 ‘혼연일체’(渾然一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앞서서 더욱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은 시인도 ‘낭송시’를 ‘낭송하기에 알맞도록 창작’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시인은 ‘책으로 펴내야 될 작품과는 별도’로 ‘낭송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창작하여야 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나의 경우를 보면, ‘고도의 압축된 이미지의 시’를 쓰고자 하는 게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내가 창작한 시들을 책으로 펴내야 하겠다는 전제조건이 늘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그런 이미지의 시들은 낭송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나도 여태껏 많이 겪어본 일이지만, 시를 낭송할 경우에 그 내용을 제대로 짚어 보기도 전에 이미 낭송이 끝나 버린다. 이런 황당할 데가 어디 또 있겠는가. 나는 그저 인사치레로 박수를 치고 만다. 솔직히 이런 낭송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을 성싶다.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는가? 가장 큰 이유는, 낭송할 시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다. 낭송할 시는 어렵지 않고 짧지도 않아야 한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곤소곤 들려 줄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 소리에 있어서 사람의 기억은, ‘그 소리를 하나의 그림으로 재구성하여 기억하는 게’ 가장 오래 간직될 듯싶다. 그렇다면 낭송할 시는 소리를 통하여 마음속으로 하나의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는, 아주 알아듣기 쉽고 처음과 끝이 길게 이어지는 내용이어야 한다. 물론, 이렇게 소리를 그림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리듬이나 발음 및 태도 등이 부수적인 작용을 할 게 분명하다.
두서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낭송시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기술하였다. 앞으로 낭송을 하고자 하거나 낭송을 듣고자 할 때에 이 글을 상기하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그뿐만 아니라, 시인으로 낭송시를 창작하고자 할 때에도 이 글이 다소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은 내가 쓴 낭송시 한 편이다. 제목은 ‘동행’인데, 함께 걷는다고 생각하고 시를 크게 소리 내어 한 번 읽어 보기를 바란다.
“나는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갑니다. 바람을 데리고 산책을 나섭니다. 동네를 지나서 산자락을 밟으면 나무들이 나를 보고 손을 번쩍 들며 아는 체를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일일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입니다. 바람도 살래살래 꼬리를 흔듭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인사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주고받는 미소가 눈부십니다. 나보다 한 발짝 늘 바람이 앞섭니다. 킁킁 냄새도 맡아 보고 잠시 서서 작은 소리에 귀를 쫑긋거립니다. 나는 그저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바람도 나처럼 꽃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들꽃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립니다.
작은 들꽃일수록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마다 안고 있는 사연이 깊습니다. 나는 가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칩니다. 바람도 알겠다는 듯 강아지처럼 ‘멍멍’ 짖습니다. 나직하게 메아리가 우리 앞에 엎드립니다. 많은 들꽃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정작 새로 들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게 모두 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들꽃은 결코 남이 아닙니다.
내가 바람과 함께 걷는 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물소리 흐르는 오솔길입니다. 사뿐사뿐 걸어갑니다. 숲에서 산고양이 한 마리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바람은 한눈팔지 않고 나만 바르게 이끕니다.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는데 벌써 하늘이 활짝 열립니다. 산 위로, 둥근 해가 뜹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발걸음이 모두 가볍습니다. 휘파람을 붑니다.”
-졸시 ‘동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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