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인의 품격

시조시인 2013. 11. 26. 06:23

시인의 품격

 

 

  김 재 황  

 

 

 

모름지기 남 앞에 서려는 사람은 남보다 높은 품격을 지녀야 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시인에게서야 더 말할 게 없다. 시인에게 시()는 하나의 방편일 뿐, 사람 됨됨이의 품격이 높아야 한다. 그깟 시() 나부랭이나 잘 쓴다고 으스대고 다닌다면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하기야, 높은 품격을 지닌 시인이라야 좋은 시를 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항상 마음을 닦아야 하고 공부를 게으르게 하면 안 된다. 학문 수양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선비라고 하니, 이 어두운 세상에서 시인이야말로 선비의 대표주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비는 어떤 면모를 지녀야 하는가? 우선 논어를 살펴본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도, 낡은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족히 더불어서 이야기할 상대가 못 된다.”(사 지어도이치악의악식자 미족여의야 士 志於道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4-9)

이는, 선비의 본분은 학문 수양에 있기 때문에, 오직 학문에 마음을 두어야지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마음을 무겁게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저 헐벗지 않고 굶주리지 않으면 된다는 뜻일 게다.

하루는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행동함에 부끄러움을 알며, 사방에 사신으로 감에 임금을 욕되게 아니하면 선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원문은, ‘행기유치 사어사방 불욕군명 가위사의’(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이다. 여기에서 사신으로 감에 임금을 욕되게 아니 함, 자공이 말솜씨가 좋아서 사방의 사신으로 자주 다니기 때문에 공자는 그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자공은 그래서 다시 말했다.

감히 그 다음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공자는 또 대답했다.

친척들이 효자라고 말하며, 온 고을 사람들이 우애가 깊다고 일컫는 사람이다.”

이 원문은, ‘종족칭효언 향당칭제언’(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이다. 여기에서 향당친족 이외의 향리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자공은 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감히 그 다음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공자는 몸을 바르게 하며 말했다.

말이 반드시 믿음직스러우며 행동에 반드시 과단성이 있는 것은 딱딱하여 소인이라 하겠으나, 그런 대로 역시 그 다음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원문은, ‘언필신 행필과 갱갱연소인재 억역가이위차의’(言必信 行必果 硜硜然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이다. 여기에서 갱갱연작은 돌멩이처럼 단단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어느 날, 이번에는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선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대답했다.

정성스럽고 자상하면서 화락하면 가히 선비라 이를 것이니, 곧 친구에게는 정성스럽고 자상하며 형제간에는 화락해야 한다.”

이 원문은, ‘절절시시 이이여야 가위사의, 붕우 절절시시 형제이이’(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 切切偲偲 兄弟怡怡)이다. 여기에서 절절성의를 다하여 권하는 모양을 이르고 시시자세히 고하는 모양을 가리킨다고 한다. ‘자로는 성질이 괄괄한 사람이다. 친구나 형제에게 결코 정성스럽고 자상하지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맹자는 선비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였을까? 맹자는 제자인 만장’(萬章)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고을의 착한 선비라야 한 고을의 착한 선비를 벗하고, 한 나라의 착한 선비라야 한 나라의 착한 선비를 벗하며, 천하의 착한 선비라야 천하의 착한 선비를 벗할 수 있다. 천하의 착한 선비와 사귀고도 부족하기에 또 옛 사람을 숭상하여 논한다. 그 사람이 지은 시를 외우고 그 사람이 쓴 책을 읽고도 그의 사람됨을 모른대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그 세대의 행적을 논하게 되는 것이니, 이를 거슬러가서 벗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일향지선사 사우일향지선사, 일국지선사 사우일국지선사, 천하지선사 사우천하지선사. 이우천하지선사 위미족 우상논고지인. 송기시 독기서 부지기인 가호? 시이 논기세야 시상우야. ‘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 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 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 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 論其世也 是尙友也.’ 맹자 10-8)

무릇 벗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서로 대등한 품격을 지닌 사람들끼리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선비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에게서 학문적 목마름을 모두 해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옛 사람들의 시와 책을 읽고 그 사람들이 처해 있던 시대의 세태를 논구하여 그 사람들의 참모습을 파악해야 된다는 말일 듯싶다. 이 글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자꾸 읽어도 좋다.

마침내 맹자는 선비에 대한 시원한 정의를 내렸다. 그 당시, ()나라 왕자인 ’()이 맹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비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그 말을 듣고, 맹자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뜻을 높이는 사람이오.”(상지尙志’)

그 말에 왕자는 머리를 갸웃하고 다시 물었다.

뜻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맹자는 정중하게 말했다.

어짊()과 옳음()일 따름이니,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짊이 아니요, 자기 소유가 아닌데 가지는 것은 옳음이 아닙니다. 몸을 어디다 둘 것이냐 하면 어짊이 바로 그것이고,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옳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짊을 몸에 두르고 옳음을 따라가면 대인의 일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인의이이의 살일무죄 비인야 비기유이취지 비의야 거오재 인시야. 노오재 의시야. 거인유의 대인지사 비의 仁義而已矣 殺一無罪 非仁也 非其有而取之 非義也 居惡在 仁是也. 路惡在 義是也. 居仁由義 大人之事 備矣맹자 13-33)

이 또한, ‘왕자라는 신분을 염두에 두고 그가 행하여야 할 어짊옳음에 대해 맹자가 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인이 반드시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말이 있다. 바로 거인유의’! , ‘어짊을 몸에 두르고 옳음을 따라가는 일! 이처럼 선비의 길을 간단명료하게 제시한 말이 없다. 그렇다. 이게 바로 시인의 길이다.

그런 중에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이 똑 부러지는 말 한 마디를 했다.

선비는 너그럽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임무가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어짊을 자기의 임무로 맡았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사불가이불홍의 임중이도원. 인이위기임 불역중호. 사이후이 불역원호.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논어 8-7)

증삼은 바로 증자’(曾子)를 가리킨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이 증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며, 맹자가 먼 스승으로 삼은 사람이다. ‘증삼의 이 어짊을 의무로 삼고 있는 선비는 죽는 순간에야 그 의무에서 놓여난다.’라는 이 말이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문득,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죽는다.’(士爲知己者死)라는, ‘고사’(故事) 하나가 떠오른다.

 

후리’(候羸)는 나이 70세에 성문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큰 포부를 가슴에 지니고 있던 선비였다. 마침내 그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나라 공자(公子) 신릉군(信陵君)이었다. 신릉군은 연회를 크게 열고 손님들을 좌정시킨 다음, 그 상좌를 비워 두고 스스로 말고삐를 잡았다. 그가 가는 곳은 바로, ‘후생’(候生, 후리)이 근무하고 있는 동쪽 성문! 그 곳으로 후생을 모시러 갔다. 후생은 사양하지 않고 수레에 올랐다.

가는 도중에, ‘후생은 종로에 있는 친구를 좀 찾아보고 가겠다고 했다. ‘후생이 신릉군을 문 앞에 세워두고 찾아들어간 집은 푸줏간이었다. 그 푸줏간의 주인인 백정(白丁) ‘주해’(朱亥)후생의 친구였다. 그들이 한담을 주고받으며 신릉군의 기색을 살피니, 그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귀한 몸으로 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말고삐를 잡고 서 있는 신릉군의 모습, ‘후생은 크게 감동했다.

연회장에 다다라서 상좌에 앉은 사람이 성문 문지기(‘후생이란 사람)였음을 알게 된, 그 곳의 손님들이 크게 놀랐음은 당연하다. ‘후생의 친구인 백정 주해’(朱亥)도 은자(隱者)였다. 그 후 후생은 어려운 국제정세를 통찰하는 그 식견과 군략으로 신릉군을 위하여 계책을 가르쳐줌으로써 그(신릉군)를 성공하게 만들었고, ‘주해역시 역사(力士)로서 후생의 천거로 신릉군을 위해 커다란 공을 세웠다.

마침내 신릉군이 마지막 출병할 때, ‘후생이 신릉군 앞으로 나가서 이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

신이 마땅히 종군해야 하겠으나 몸이 늙어서 불능하니, 청컨대 주군이 진비군(晋鄙軍)에 도착하시는 날을 헤아려서 북쪽을 향해 자경(自剄)함으로써 주공을 배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옵소서.”

 

이 얼마나 비장한 말인가! ‘후생은 스스로 약속한 그날에 자경이사’(自剄而死)하였다. ‘자경자문’(自刎)이라고도 하는데 스스로 목을 찌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중국에서만 있었겠는가.

오늘 나는 다시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을 아픈 가슴으로 생각한다. 19108,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강제로 병합되었을 때에 황현 선생은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조수애명해악빈(鳥獸哀鳴海岳嚬)-새와 짐승도 울고 바다와 큰 산도 찡그리니

근화세계이침륜(槿花世界已沈淪)-무궁화 온 세상이 이제 가라앉아 망해버렸다.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긴 세월을 생각하니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우리 사는 세상에서 선비 노릇하기 어렵다.

 

황현 선생은 1855년에 전라남도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1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아름답고 수준 높은 한시’(漢詩)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줄줄 외울 정도로 탐독하였다고 지금까지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살이 되었을 때에 홀로 서울로 올라와서 당대의 논객들을 찾아다니며 시와 역사인식에 대한 토론을 청하였다. 시골뜨기 차림에 사팔뜨기인 황현 선생의 모습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의 입에서 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그 열정 어린 역사의식과 시는 당대의 선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전한다.

나는 지금 선생이 남긴 역저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읽으며 선생을 떠올린다. 아니, 선생을 만난다. 과연 선생은 선비의 도리를 다하신 분이다. 하늘을 바라보아서 결코 부끄럽지 않을 분이다. 위의 시를 남겨 놓고 난 후, 황현 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였다. 황현 선생은 미리 준비한 아편 세 덩어리를 꺼내 놓았다. 그러나 결행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선생은 아편을 입에 댔다 뗐다 하기를 세 차례나 거듭했다고도 전한다. 마침내 선생이 숨을 거두시고 난 다음에, 선생이 가족들에게 남긴 유자제서’(遺子弟書)가 공개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는 꼭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그러나 조선이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목숨을 끊는 이가 없다면 가슴 아픈 일이고도 남는다. 내가 위로는 하늘이 지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책속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았다. 이제 깊이 잠들려고 하니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라.’

그렇다. 이는 선비의 모습이요, 시인의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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