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이 가리키는 길
김 재 황
(1)
이 세상은 풀과 나무로 하여 녹색을 나타낸다. 그렇다. 녹색은 풀과 나무가 지닌 빛깔이다. 이 녹색을 지닌 풀과 나무가 우리를 먹여 살린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목숨을 먹여 살린다. 그러니 얼마나 그 베풂이 큰가.
풀과 나무가 가는 길이 바로 군자의 길이요 성자의 길이다. 만약에 우리가 풀과 나무의 길을 따를 수만 있다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그러면 녹색이 가리키는 길이 어떠한 길인지 여기에서 짚어 보기로 한다.
풀과 나무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다만, 한 마디로 ‘성’(誠)의 길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풀과 나무처럼 한 자리에 굳게 서서 온 정성을 다하여 살고 있는 게 어디 또 있겠는가. 그 정성을 다하는 풀과 나무의 씩씩한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다고 아니할 수 없다. 중용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성자 천지도야; 성지자 인지도야. 성자 불면이중 불사이득 종용중도 성인야. 성지자 택선이고집지자야.”)
- “정성스러움인 바로 그것은 하늘의 길입니다. 그리고 정성스러움을 지니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길입니다. 정성스러움인 바로 그것은 힘쓰지 않아도 들어맞고 바라지 않아도 얻게 되며 차분하고 찬찬해도 길에 알맞으니 ‘거룩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성스러움을 지니려고 하는 것은 착함을 골라서 굳게 잡는 것으로 뭇 사람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중용 제20장)
이는, 70대의 공자가 20대의 임금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를 앞에 앉히고 간곡하게 이르는 것 같다. 자애로움이 가득 담기어 있다.
여기에서 풀과 나무가 가는 길이, 바로 ‘하늘의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誠), 즉 ‘정성스러움’ 그 자체가 ‘하늘’이다. 나무야말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뜻에 따르는 하늘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성자’(誠者), 그게 바로 ‘녹색의 길’이다. 그러나 사람은 풀과 나무처럼 ‘하늘의 길’을 갈 수는 없다. 다만, 그러한 길을 가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성지자’(誠之者)라고 하며, 비로소 ‘인지도’(人之道)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야 하는 길’은 ‘택선이고집지자’(擇善而固執之者)이다. 여기에서, ‘착함을 골라서 굳게 잡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요 그게 녹색이 가리키는 길이라는 게 확실해진다.
그렇다면 ‘착함’(善)은 어떤 것인가.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맹자는 ‘가욕지위선’(可欲之謂善)이라고 말했다. 이는, ‘하고자 함이 옳은 것을 착하다고 한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착함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미덥다’라고 하며 그게 몸에 가득 차면 ‘아름답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착함’과 ‘미더움’과 ‘아름다움’이 모두 ‘성’(誠) 속에 있다.
더욱이 중용에서 공자는 ‘정성스럽게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일러주고 있다.
“널리 배우십시오. 꼬치꼬치 물으십시오. 참된 마음으로 헤아리십시오. 밝게 가리십시오. 도탑게 움직이십시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대 잘함이 없으면 그만두지 마십시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대 알지 못하면 그만두지 마십시오. 헤아리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헤아릴진대 얻음이 없으면 그만두지 마십시오. 가리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가릴진대 밝음이 없으면 그만두지 마십시오. 움직이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움직일진대 도타움이 없으면 그만두지 마십시오.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잘하면 나는 천 번을 하십시오. 참으로 그러하게 이 길을 잘 가게 되면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고 비록 부드러워도 반드시 굳세어집니다.”
(2)
문인은 선비이니, 이러한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녹색이 가리키는 길이요 정성스러운 길이요 쉬지 않고 가야 하는 길! 이게 바로 선비의 길이다. 쉬지 않고 가는 길? 그건 또 어떠한 길일까? 그건 다름 아닌 ‘물과 같은 길’이기도 하다. 노자의 도경(道經)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장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것에게 잘 보탬이 되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 사람이 꺼리는 곳에 머무른다. 그 까닭에 길과 거의 같다. 앉는 곳은 땅이 좋아야 하고 마음은 깊어야 좋으며, 주는 것은 어질어야 좋고 말은 믿음이 있어야 좋으며, 본보기는 다스림이 좋아야 하고 일은 익숙하게 잘해야 좋으며, 움직임은 때가 좋아야 한다. 무릇 다만 다투지 않는다. 그 까닭에 허물이 없다.(노자 도경 제8장)
물의 특징은 흘러간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문득, 맹자의 말이 떠오른다. 맹자는 말했다. “사람의 본성이 착한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과도 같지요. 사람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물이라고 하면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는 물은 없습니다. 만약에 물을 튀기면 사람의 이마도 넘어가게 할 수 있고, 또한 꼭 막았다가 터주면 산 위에까지도 올라가게 할 수 있소. 그러나 그게 어찌 물의 본성이겠습니까? 밖으로부터의 힘에 의해서 한때 그렇게 되었을 뿐이지요. 사람이 착하지 못한 짓을 하게 되는 것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그 유명한 맹자의 성선설이다. 사람의 성실성을 맹자는 물과 비교하여 말했다고 여겨진다.
더 나아가서 가장 맑은 물은 녹색을 띤다. 그러니 이 또한 녹색의 길이다. 역시 여기에서 가리키는 물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쉼 없이 흘러가는 물’이다.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고는 녹색의 길을 밟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성무식’(至誠無息)이다. 고전 중에서도 특히 중용이라는 책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즉,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불식즉구 구즉징 징즉유원 유원즉박후 박후즉고명.)’이다. 이는, ‘쉼이 없으니 오래 가고, 오래 가니 거두어들이며, 거두어들이니 아득히 멀고, 아득히 머니 넓고 두터우며, 넓고 두터우니 높고 밝다.’라고 풀이된다.
논어에는 공자의 ‘사이회거 부족이위사의’(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라는 천금의 말 한 마디가 들어 있다. 이는, 선비가 안일만을 생각하면 족히 선비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어느 때, 자공은 공부에 싫증이 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스승인 공자에게 말했다.
“저는 학문을 해보아도 권태증만 생기고 도를 해보아도 곤경에만 몰리게 되니, 이제 이런 것은 그만두고 그대로 임금이나 섬겨서 정치를 하는 게 옳을까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시에 이르기를 ‘아침과 저녁으로 뜻을 쌓고 일을 잡아서 하는 데 공경으로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임금 섬기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배우기를 쉴 수가 있겠느냐?”
그러자, 자공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임금을 섬기는 일은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서 부모나 섬길까 합니다.”
그 말에 공자가 다시 말했다.
“시에 이르기를 ‘효자란 끝이 없나니 너에게 길이길이 착함을 준다.’라고 하였으니, 부모 섬기기도 어렵기 그지없다. 어찌 배우기를 쉴 수가 있겠느냐?”
이에, 자공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처자나 데리고 쉴까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다.
“시에 이르기를 ‘아내에게 법이 되어 형제에까지 이르게 되어야만 가정과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라고 하였으니, 처자를 거느리기도 이와 같이 어렵다. 어찌 배우기를 쉴 수가 있겠느냐?”
자공이 또 말했다.
“그러하다면, 저는 친구나 사귀면서 쉬어 볼까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시에 이르기를 ‘친구 간에 서로 교제하는 것은 위의(威儀)로 한다.’라고 하였으니, 친구를 사귀기도 이렇게 어렵다. 어찌 배움을 쉴 수가 있겠느냐?”
자공이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러면 저는 시골에 파묻혀서 농사나 지으며 쉴까 합니다.”
공자도 끈질기게 말했다.
“시에 이르기를 ‘낮으로는 띠를 자르고 밤으로는 새끼를 꼬아서 빨리 지붕을 덮어야만 비로소 백 가지 곡식을 뿌리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농사짓기도 이처럼 어렵다. 어찌 잠시인들 배우기를 쉴까 보냐?”
자공이 힘없이 물었다.
“그렇다면 저는 장차 쉴 곳이 없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왜 없기야 하겠느냐? 스스로 저 넓은 곳을 바라보면 우뚝한 듯도 하며 그 높은 것을 쳐다보면 꽉 찬 듯도 하며 그 주위를 둘러보면 멀리 막힌 듯도 하니, 이곳이 쉬는 곳일 게다.”
자공이 이렇게 말했다.
“크기도 합니다. 저 죽음이여! 군자도 쉬게 되고 소인도 쉬게 되니, 참 크기도 합니다. 그 죽음이여!”
범종을 바로 앞에서 치는 것처럼 큰 울림이 있다. 그렇고말고. 죽고 난 후에는 그 쉼이 얼마나 길겠는가.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열자(列子)의 천서편(天瑞篇)에도 기술되어 있다. 자공이 ‘원유소식’(原有所息)이라고 하니, 공자는 ‘생무소식’(生無所息)이라고 한다. 즉, ‘바라건대 쉴 곳이 있었으면 합니다.’라는 자공의 말에, 공자는 ‘살아서는 쉴 곳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몸에서 힘이 쏙 빠져 나간다. 그러나 저 들판을 보면 녹색의 풀과 나무들이 조금의 쉼도 없이 여전히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다. 그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산소도 만들어 내고 열매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우리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한다.
(3)
중용에는 ‘녹색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게 바로 나무와 풀이 걸어가는 길이라고 여겨진다. 또, 그 길을 따라가는 게, 선비가 걸어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소부귀 행호부귀; 소빈천 행호빈천; 소이적 행호이적; 소환난 행호환난. 군자무입이불자득언.)
- 넉넉하거나 빼어날 때는 넉넉하거나 빼어난 대로 걸어간다. 가난하거나 업신여김을 받을 때는 가난하거나 업신여김을 받는 대로 걸어간다. 동쪽 오랑캐라고 하거나 북쪽 오랑캐라고 할 때에는 동쪽 오랑캐나 북쪽 오랑캐대로 걸어간다. 미워하거나 나무라거나 할 때에는 미워하거나 나무라는 대로 걸어간다. ‘베풂이 높은 사람’은 길로 들어서면 스스로 얻지 못함이 없다.(중용 제14장 중에서)
참으로 옳은 말이다. 풀이나 나무 중에는,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을 지닌 것들도 많다. 그러거나 말거나, 풀과 나무들은 녹색의 길을 말없이 걸어간다. 잡목이라고 베어내고 잡초라고 뽑아내도 그대로 걸어간다. 우리는 어떠한가? 이 세상의 주인인 양 으스대며 오만불손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는 마땅히 정성스럽고 겸손한 녹색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런 선비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노자의 도경에서는 ‘좋은 선비’를 이렇게 풀고 있다.
‘예로부터 좋은 선비라고 하는 사람은, 뚜렷하지 않고 야릇하며 거무레함을 꿰뚫기에 깊이를 알 수 없다. 무릇 오직 알 수 없다. 그 까닭에 모습을 억지로 그려 본다. 머뭇거림은 마치 겨울에 내를 건너는 것 같고, 망설임은 마치 이웃한 네 집이 볼까 보아서 두려워하는 것 같으며, 의젓함은 그게 마치 손님과 같고, 흩어짐은 마치 조금 지나서 얼음이 풀리는 것 같으며, 도타움은 그게 마치 통나무와 같고, 밝기는 그게 마치 골짜기와 같으며, 섞이기는 그게 마치 흐린 것 같다.’
또, 논어에도 똑 부러지게 ‘선비를 규정한 증자의 말’이 있다.
“선비는 너그럽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임무가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어짊’을 자기 임무로 맡았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앞에서 밝힌 바 있듯이, 우리는 결코 나무와 풀처럼 정성스러움 그 자체의 길은 갈 수 없다. 다만, 정성스러워지려고 노력하는 길을 갈 수 있을 뿐이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 줄은 우리가 모두 잘 안다. 그러나 그 힘든 길을 조금이나마 쉽게 가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을 공자가 귀띔해 준다. 논어의 제6펀 옹야(雍也)에 들어 있는,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라는 이 한 마디 말! 아는 것은 좋아하느니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느니만 못하다니, 무슨 일을 하든지 즐겁게 해야 한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작품을 써야 한다. 그게 바로 녹색을 따르는 삶이다. 그러나 작품 자체가 우리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작품은 우리가 살아가는, 한 방편일 뿐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청정한 길’을 가는 데 있다. 쉬지 않고 ‘녹색이 가리키는 길’을 걷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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