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다
김 재 황
누구나 이 세상에서 이름을 높이 날리고 싶은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어찌 안 그렇겠는가. 예외가 아니다. 물론 나도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렇다고 억지로 유명해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름이 날 게 있으면 이름이 나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마음을 쓴다고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인 중에도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 별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도 노래를 부른다거나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냥 애교로 봐 줄 수 있고, 정치를 하는 사람까지도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길 수 있다. 정치판 또한 전쟁터이니 ‘병불염사’(兵不厭詐)라고 속임수가 없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소위 ‘시인’이라는 사람이 그런 추태를 보일 때면 참으로 마음이 답답하고 안쓰러울 때가 많다. 내가 보기에 그저 그런 작품이건만 그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는 모습을 보면, 대체 무엇을 얼마나 얻어먹었기에 저러는가 하고 탄식이 절로 나올 때도 더러 있다. 자기들끼리 패거리를 지어서 서로 추켜올리며 상을 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나라 대표적 시인이라고 대놓고 떠들며 다닌다. 참으로 볼썽사납고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시인이란 들에 자유롭게 피어 있는 ‘한 송이 아름다운 들꽃’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그런 들꽃들의 순위를 매긴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들꽃은 제 나름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개성이 강하여 절대로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들꽃은 그저 묵묵히 제 길을 가며 자기 모습대로 아름다움을 나타낼 뿐이다. 시인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시인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면 어찌 좋은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설사 괜찮은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 시는 거짓이 되고 만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이야말로 ‘옳음의 실마리’라는 말도 있다. 어쨌든 시인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고, 결코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을 해서도 절대로 안 된다. 시인이 ‘어짊’과 ‘옳음’을 잃으면 목숨을 잃은 바와 같다.
그래서 공자는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1-1)라고 말했다. 이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부끄럽지 않다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느냐?’라는 뜻이다. 남이 알아주든지 말든지 나는 열심히 ‘나의 길’을 가겠다는, 이런 마음가짐이 시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알아줄 만큼의 인격수양이 되어 있다는 ‘자부심’(自負心)이다. 그 가슴에 그런 마음이 있어야 떳떳하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1-16)라고. 이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라는 뜻이다. 이를 가리켜서 ‘수기지학’(修己之學)이라고 한다. 그렇다. 시를 좋아하고 시를 씀은, 오직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닦기 위한 배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시 하나로 뻐길 건더기가 아무것도 없다.
공자는 또 ‘불환인지불기지 환기불능야’(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 14-32)라고도 말했다. 이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능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라’라는 뜻이다. 이 말은 참으로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아야 한다. 자신의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유명해졌다면 그처럼 부담스러운 일은 없을 터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라면 언제인가는 진실이 밝혀지게 마련이다. 공자는 이 말을 ‘군자병무능언 불병인지불기지야’(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라고 슬쩍 바꾸어서 말하기도 했다. 이는, ‘군자는 자기 재능이 모자람을 아파하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아파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고전인 ‘맹자’에도 이런 글이 실려 있다.
하루는 서벽(徐辟)이라는 사람이 맹자에게 물었다.
“공자께서 물을 자주 칭찬하여 ‘물이여! 물이여!’하셨다는데 물에서 무엇을 얻으신 겁니까?”
맹자는 대답했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졸졸 흘러서 구덩이를 채운 뒤에 앞으로 나아가서 바다에 이른다.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으니 이를 얻으신 것이다. 진실로 근본이 있다면 칠팔월 사이에 빗물이 모여서 크고 작은 도랑을 채우지만 그 물이 말라 버리는 것을 서서 기다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친 것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
여기에서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친 것’을 원문에서는 ‘성문과정’(聲聞過情 맹자 8-18)이라고 한다. ‘성문’은 ‘실속 없는 칭찬의 소문이 나는 것으로 명예를 뜻하는 말’이고, ‘과정’은 ‘실질적인 내용보다 지나치게 부풀린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보니 ‘소문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욕을 먹게 되더라도 일단 여러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놓고 보자는 배짱이다. 그래서 한때는 어느 시인이 자기 시집에 ‘야한 제목’을 붙여서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논어’에는 이런 이야기가 들어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장’(子張)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비가 어떠하여야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자장’에게 되물었다.
“네가 말하는 ‘도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자장’이 대답했다.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이름이 나는 거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이름이 나는 겁니다.”
‘자장’이 말하는 ‘선비의 도달함’이란 바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뜻하였다. 이는, 바로 요즘에 말하는 ‘유명해지는 것’이다. 어찌 이를 옳은 생각이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공자는 말했다.
“네가 말하는 그것은 소문일 뿐이지 도달한 것은 아니다. ‘도달했다.’라고 하는 것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의를 좋아하고 남의 말을 살피며 얼굴빛을 관찰하고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것이니, 나라에서도 반드시 도달하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도달하게 된다. 소문이라는 것은 얼굴빛이 ‘어짊’을 취하나 실제로는 위배되며 그대로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게 된다.”
‘자장’은 ‘소문나는 것’과 ‘도달하는 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지금도 ‘소문나는 것’을 출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거의 모두 겉치레에 신경을 많이 쓴다.
공자가 ‘진채지액’(陳蔡之厄)의 어려움을 겪을 때의 일이다. 공자는 임금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단 말이냐? 우리가 왜 여기에서 이런 곤란을 당해야만 한단 말이냐?”
그러자 자공이 옆에 있다가 이렇게 청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큰 까닭에 천하에서 선생님을 능히 용납하지 못하오니, 선생님께서는 조금 도를 낮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공자는 말했다.
“사야, 들어라! 아무리 농사를 잘하는 자라도 자기 힘으로 능히 심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거두는 일은 잘하지 못하며, 물건을 잘 만드는 장인은 능히 교묘하게 하기는 하지만 남의 마음에 꼭 맞는 물건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자도 능히 그 도를 닦아서 기강은 세울지언정 세상에 꼭 용납된다는 것은 기약할 수 없다. 그런데 더욱이 이제 그 도는 부지런히 닦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용납되기만 구하니, 너는 뜻하는 바도 넓지 못하고 생각하는 바도 원대하지 못하구나.”
공자의 말을 듣고, 자공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안회가 들어왔다. 공자는 역시, 자공에게 말한 대로 안회에게 모든 말을 들려주었다. 안회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에 선생님을 능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선생님께서는 이 도를 더욱 미루어 행하실 뿐입니다. 세상에서 쓰지 못하는 것이야 나라를 가진 자가 고루해서 그런 것이오니, 선생님께 무슨 병이 될 게 있습니까? 원래 세상에서 용납하지 못한 뒤에라야 비로소 군자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자, 얼굴에 가득 기쁜 빛을 나타내며 말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저 안씨(顔氏)의 아들이여! 나는 또한 생각하기를 네가 만약 재물이 많다면 내가 네 집의 가신 노릇을 하려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중용’(中庸)에는 공자의 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말했다.
“숨어 있는 편벽한 것들을 들쑤셔내고 괴이한 행동을 하면, 후세에 거론될 만큼 이름을 날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군자가 길을 따라 가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있는데 나는 중도에 그만두는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군자는 중용을 실천함을 의지 삼고 세상에 숨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후회함이 없다.”
(색은행괴 후세유술언 오불위지의 군자준도이행 반도이폐 오불능이의 군자의호중용 둔세불견지이불회‘索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君子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 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중용 11장)
그뿐만 아니라, 노자(老子)의 도경(道經)에도 이런 글이 있다.
‘발돋움한 사람은 서 있을 수 없고 가랑이를 벌린 사람은 걸어갈 수 없다. 스스로 드러내는 사람은 밝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사람은 빛나지 않으며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애쓴 보람이 없고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어른이 되지 못한다.’(기자불립 과자불행. 자현자불명 자시자불창 자벌자무공 자긍자불장 ‘企者不立 誇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제24장)
그렇다고 공자는, 알려지는 것을 꺼리지도 않았다. 논어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이는, ‘나를 아는 이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알려지게 되도록 노력하라.’라는 뜻이다. 즉, 남이 몰라준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남에게 알려질 만한 일을 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알려질 만한 일을 했다고 반드시 알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이름을 낸다는 것도 요행이 따라야 하는 것 같다. 누군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불현 듯이 한퇴지(韓退之)의 잡설(雜說)이 머리에 떠오른다.
‘세상에선 백락(伯樂: 馬相을 잘 본 사람)이 있은 다음에 천리마(千里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천리마는 항상 있으되 백락은 항상 없으므로, 비록 명마(名馬)가 있을지라도 다만 말군의 손에 욕을 보아 마판과 죽통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죽어갈 뿐이며 천리마의 이름을 마침내 듣지 못하고 만다.
천리를 달리는 말은 한 번 먹음에 좁쌀 한 섬을 다 먹는 때도 있거늘 말을 먹이는 자가 그 능히 천리를 달릴 수 있음을 모르고 먹이니 이 말이 비록 천리의 능함이 있어도 배불리 먹지 못하매 힘이 모자라 그 재주의 아름다움이 바깥에 나타나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상마(常馬, 보통 말)와 같고자 할지라도(먹는 것이 모자라) 상마만치도 되지 못하니 어찌 그 말에게 천리의 능(能)을 바랄 수 있으리오. 채찍질을 하되 그 도(道)로써 하지 않고, 말을 먹이되 그 말의 바탕에 맞추어 먹이지 않으며, 말이 울어도 그 뜻을 모르면서 채찍을 들고 나서서 하는 말(言)이 ‘천하에 말(馬)이 없다’고 하니 슬프다 천하에 과연 명마가 없다는 말인가. 그 참으로 명마임을 모른다는 말인가.’
어쨌든 그 모든 게 운명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 공자도 말했다.
“싹이 돋고서 꽃을 피우지 않는 경우도 있고, 꽃을 피우고서 열매를 맺지 않는 경우도 있다.”(묘이불수자 유의부 수이불실자 유의부 ‘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 9-21)
그러니 우리가 시를 좋아하거나 시를 쓰는 게 반드시 이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위함만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내가 정한 내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될 뿐이다. 남이야 보든지 말든지 나 홀로 시인답게 걸어가면 된다. 아마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림)의 참뜻이 거기에 있을 듯싶다.
결론적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라면 그는 분명히 ‘군자’(君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성공한 삶이 될 터이다. 공자는 ‘선비’를 ‘군자’라는 이름으로 구현했고, 나는 지금 여기에서 ‘군자’를 ‘시인’이라는 아름으로 다시 새롭게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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