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시어로 되기까지
김 재 황
시를 쓸 때는 쉬운 언어를 골라서 쓰는 게 좋다. 어려운 언어를 골라서 쓴 시(詩)야말로 널리 사랑받기가 힘들다. 남이 잘 모르게 쓰려면 그냥 점 하나 찍어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시 또한 내 감정을 남에게 전하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언어’(言語)란 ‘사상이나 감정을 나타내고 의사를 소통하기 위한,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언’(言)은 ‘사람이 말하는 모양’을 본뜬 글자이고 ‘어’(語)는 ‘나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뜻하는 글자이다.
어차피 언어의 역할이 이렇다고 한다면 그 역할에 충실히 다가가는 게 좋은 일이겠다. 사람은 문자가 생기기 전부터 말을 해왔다. 그런데 그 말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말에 대한 가르침을 많이 남겼다. 우선 공자의 말부터 들어 보자.
공자는 말을 번드르르하게 하는 사람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이 말은 ‘교묘하게 꾸민 말과 아름답게 꾸미는 얼굴빛에서는 어짊이 드물다.’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치고 믿을 사람은 흔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이 다시 반복되기도 하고, ‘교언 난덕’(巧言 亂德)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교언 난덕’은 ‘교묘한 말이,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지킬 바를 잃게 하니 베풂을 어지럽히는 결과가 된다.’라는 뜻이다.
게다가 입에서 나온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사람들은 말을 입으로 쉽게 하지만 그 말을 실제적인 행동을 몸으로 옮길 때는 어려움을 겪는다. 상황이 바뀌거나 마음이 바뀌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공자는 ‘선행기언 이후종지’(先行其言 而後從之)라고 했다. 이는, ‘먼저 그 말을 행하고, 그 다음에 그 말을 한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행동으로 옮기고 나서 말을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공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많이 들어서 의아스러운 것을 빼고는 그 나머지를 삼가 말하면 허물이 적으며, 많이 보아서 위태로운 것을 빼놓고 그 나머지를 삼가 행하면 뉘우침이 적게 된다. 말에 허물이 적으며 행실에 뉘우침이 적게 되면 행복은 그 가운데에 있다.”(‘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다문궐의 신언기여즉과우 다견궐태 신행기여즉과회 언과우 행과회 녹재기중의. 논어 2-18). 이는, ‘말을 삼가면 행복이 스스로 찾아온다.’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녹’(祿)은, ‘공자가 살았던 그 당시에는 벼슬을 가리키는 말이었겠으나, 지금에는 행복이라고 풀이하는 게’ 더 알맞을 듯싶다. 이 글자는 ‘신에게 잘 보여야 삶의 근본인 월급과 행복을 받는다.’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는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려고 한다.’(‘君子 欲訥於言而敏於行’ 군자 욕눌어언이민어행 4-24)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눌’(訥)이란 ‘말이 적다’거나 ‘말을 더듬다’ 등의 뜻을 지닌다. 왜 말을 더듬을까? 그야, 그 말을 해야 옳은지 안 해야 옳은지 등을 여러 번 깊이 생각하고 난 다음에 말을 하기 때문이다. 한 번 뱉으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게 말이니,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대신에 행동은 재빨리 한다. 그렇게 되면 그 말이 살아나게 된다. 이를 가리켜서 ‘믿음’(信)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자는, ‘말이 도리에 맞고 충실하다고 해서 그 사람도 그런 사람으로 보게 되면, 그가 과연 군자인지 겉만 꾸민 사람인지 알 수 없다.’(‘論篤 是與 君子者乎 色莊者乎’ 논독 시여 군자자호 색장자호 11-20)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논독’은 ‘말이 도리에 맞고 충실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색장자’는 ‘외부에 나타난 언어동작만이 장중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말만 가지고는 그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이 말은, 시에서도 통한다.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고 해서 그가 진실로 아름다운 시인이라고도 할 수 없다. 반드시 그 행동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말한 바를 어떻게 해야 실천하기 쉬울까? 그에 대해 공자는 ‘그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실천하기가 어렵다.’라고 했다. 이 원문은 ‘기언지부작 즉위지야 난’(其言之不作 則爲之也 難)이다. 여기에서 ‘난’은 ‘참’(慙)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참’은 ‘마음을 칼로 도려내고 싶도록 부끄러운 것’을 나타내는 글자라고 한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말은 하되, 제대로 해야 한다. 공자는, ‘가히 더불어서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아니하면 사람을 잃고, 가히 더불어서 말할 만하지 못한데도 말하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을 잃지 않고 말도 역시 잃지 않는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 不失人 亦不失言’ 가여언이불여지언 실인 불가연이여지언 실언, 지자 부실인 역불실언 15-7)라는 말을 남겼다. 즉, 말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될 자리가 있고 꼭 해야 될 자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말은 절제해야 된다. 이는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꼭 해야 될 말만을 골라서 아껴 써야 한다. 말은 무겁고 함묵은 귀하다. 어느 날, 공자가 ‘나는 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予欲無言 여욕무언)라고 하자, 옆에 있던 제자 ‘자공’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전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하늘이 무엇을 말하더냐? 그래도 사계절이 운행되고 모든 것이 생겨난다. 하늘이 무엇을 말하더냐?’(‘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 生焉 天何言哉?’ 천하언재? 사시행언 백물 생언 찬하언재? 17-19)라고 말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 언어가 생긴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언어 때문에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 모든 것 중에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사람을 그대로 참고 있게 가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참지 못할 두려움 때문에 ‘종교’를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절대적인 힘의 소유자인 신(神)’ 즉 ‘하느님’이 창조되었다. 현재에도, 그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믿기보다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그렇기에 최초의 언어는 ‘주술적 언어’가 아닐까 한다. 예컨대 ‘꽃이 노래한다.’라고 하면 실재로 꽃이 노래를 부르고, ‘하늘에서 깨끗한 눈을 내려 주신다.’라고 하면 실재로 하늘이 깨끗한 눈을 내려 준다고 믿었을 게다. 그래서 대상을 ‘너’로 인식하는 이런 의인관적 태도가 ‘시의 본질’이며 ‘시의 미학’은 최초로 여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아의 세계’ 및 ‘시상’과 ‘감정’이 융합된 ‘결합의 방식’이 순수한 미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시의 언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사람이 언어를 시용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시(詩)란 바로 자신의 감정을 진실하게 나타낸 글이다. 그런데 모든 언어를 다 시어(詩語)로 쓸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같은 언어라도 ‘시어’가 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하면, 시적 기능을 할 경우와 일상적 기능을 할 경우가 있다고 한다. 여러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첫째는 ‘의사전달’ ‘정보제공’ ‘지시명령’ 등의 기능을 하고, 두 번째는 ‘형식적 여운’과 ‘감정표현’ 및 ‘미적 기능’을 한다고 한다. 전자는 대체로 과학적이며 사전적인 의미의 기능을 수행하고, 후자는 문학적이고 정서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가 하면, 전자는 ‘언어의 개념표시’ 혹은 ‘외연’에 의존하고, 후자는 ‘언어의 함축성’ 또는 ‘내포’에 의존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외연’(外延, denotation)은 일반적이고 객관적이며 사전적인 의미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고정되고 한정된 기존의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또 ‘내포’(內包, connotation)는 문학적 언어이고 개인적 언어라고 한다. 따라서 시어는 내포적 용법에 속한다고 한다. 시어가 개성적이고 구체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외연’인 사전적 의미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다음은 김종길 선생님의 글이다.
“언어전달의 한 형식으로서 시가 특수하고 고도의 것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의 언어와 일상생활의 언어 사이에 확연한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이 시에서 그대로 쓰일 뿐만 아니라, 시에서 쓰일 법한 말이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쓰이고 있다. ‘그 꽃 참 곱군.’이라든가 ‘그 녀석 눈이 샛별 같아.’와 같은 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고 듣는 말이다. 이러한 말은 ‘쌀값이 얼마인가?’라든가 ‘교통사고가 났어.’와 같은 말과는 구별되는 점이 있다. 즉, 후자의 경우에는 말하는 사람이 실제적인 관심을 보이거나 사실을 보고하고 있음에 비하여, 전자의 경우에는 말하는 사람의 느낌이나 태도나 해석이 나타나 있다.”
이렇듯 언어는 쓰임에 따라 ‘사실을 보고하거나 실제적인 관심을 보이는’ 말과 ‘느낌이나 태도 및 해석을 나타낸’ 말로 나누어진다. 이를 바꾸어서 말하면, 시의 언어는 ‘느낌이나 태도 또는 해석’이 깃들어 있어야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게 정서적이고 시적인 언어이다.
그리고 일상의 진술이 아닌 것을 ‘의사진술’(擬似陳述 pseudo statement)이라고 한다. 물론, 일상적으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은 그 말하는 내용에 대한 증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진술’(陳述 statement)이라고 한다. ‘너는 죽어서 별이 되었다.’라고 한다면,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의사진술’이다.
시인은 어느 때에 어떤 느낌을 받아서 시인 자신의 독특한 그림을 그리듯 시를 짓는다. 그 시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제각기 또 다른 그림을 머릿속에서 그리게 된다. 이렇게 사람마다 언어의 해석이 다르게 나타난다. 시의 해석은 어디까지나 자의적이다. 그 이유는, 시적 언어가 과학적 언어보다 그 포괄하는 의미 영역이 넓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시적 언어는 다의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의적인 것을 시어의 애매성(曖昧性, ambiguity)이라고 한다. 이는 오히려 ‘시의 특성이며 중요한 자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가 일반 산문처럼 길지는 않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많은 의미와 감정을 담을 수 있다. 이는, 바로 이 애매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언어는 구체적 체험을 ‘추상화’ 또는 ‘의미화’한다. 모든 감각을 언어가 모두 감당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섬세하고 구체적인 묘사라고 할지라도 언어가 그 모든 감각 대상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하는 수 없이 많은 부분이 빠지게 된다. 그래서 언어는 이런 본질적인 추상성 때문에 감각적인 방향보다 개념적 방향에 따라 독자의 감수성을 이끌어 가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언어의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언어의 역동성을 얻기 위해서 그 언어가 실재와의 일체감이나 동일성을 회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시어의 모순’이 숨어 있다고 한다. ‘시는 근본적으로 역설적인 언어’라는 말은 옳다. 시인이 쓰는 언어는, 언어이면서도 언어의 구속에서 벗어남으로써 사물 그 자체이고자 한다.
불현 듯 노자의 글 한 구절이 떠오른다. 노자의 책을 열면 그 첫머리에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글이 나타난다. 이는 ‘길을 길이라고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가도’나 ‘가명’은 ‘의미’이고 ‘상도’나 ‘상명’은 ‘존재’일 듯싶다. 그렇게 시어는 의미차원이 아니라 존재차원을 지향하는 것 같다. ‘시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봉사한다.’라거나 ‘시인은 말을 기호로서가 아니라 사물로 간주하는 태도를 취한다.’라거나 ‘시인에게 의미까지도 자연적이다.’라고 한 것 등의 ‘사르트르’의 말은, ‘시어’와 ‘사물’을 동일시한 태도라고 말한다.
시를 짓는 일은, 존재의 진리를 묻는 철학자의 사유와 일치한다고도 한다. 철학자의 임무는 ‘존재의 사유’이다. 그리고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존재를 이끌어 냄’을 뜻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밝히고 세우는 ‘공동의 임무’가 있다고 말해도 될 성싶다. 이의 재료가 언어이다. 말하자면 ‘존재이해의 통로’가 언어이다.
시인은, 존재를 수용하는 하나의 통로일 뿐만 아니라,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언어를 부리는 게 아니고 언어가 시인을 부린다. 이는 나도 체험한 적이 있다. 어느 때는 내가 쓴 시가 아주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런 시를 썼을까 하고 놀랄 때가 있다. 언어가 주인이고 나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언어의 추종자가 ‘시인’일 듯도 하다. 이럴 때, 시인은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존재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시의 언어는 신중히 선택되고 신중히 배열되어야 한다. 이 말은, 시어의 신중한 선택과 배열이 언어의 일반적 용법이나 문법과는 다름을 의미한다.
시인은 예술적 효과를 창조하려는 중심의도와 관련하여 낱말을 엄밀히 선택하고 또한 그 낱말들을 긴밀하게 배치함으로써 ‘세부와 세부’나 ‘세부와 전체’ 사이에 유기적 관계를 맺도록 만든다. 그렇기에 언어의 선택과 배열은 언어기호의 형성과정이라고 한다.
다음은 시제(時制)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시제’는 ‘말하는 시간을 중심으로 사건이 일어난 시간의 앞뒤를 표시하는 문법 범주’를 이른다. 물론 우리말 시제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다. 우리말로는 ‘때매김’이다. 체험적 시간이 예술적 의도에 의해 가장 단적으로 나타난 게 문학에 있어서 ‘시제’이다. 그런데 문학적 시간은 자연적 시간과 다르다. 문학적 시간은 예술의 효과를 위해 자연적 시간을 왜곡한 상상적인 시간이다. 서정시는 현재의 장르이며 순간의 문학이다. 그 세계관이 현재에 있다. 그렇듯 서정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현재시제의 사용에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있다. 서정시는 시인이 ‘자기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또, 순수한 현재는 한 행위에 관한 시간적 느낌을 간직하면서도 한 행위의 인상을 창조한다.
하지만 우리가 실재로 서정시를 만났을 때에는, 현재 시제뿐만 아니라, 과거형이나 미래형 등의 다른 문법적 시제도 만난다. 게다가 파격으로 처리되는 경우도 본다. 서정시에서 시간을 역사적 현재와 무시간성의 두 가지 양상으로 체험하곤 한다. ‘역사적 현재’란, ‘현재를 과거와 현재를 함께 지닌 존재로 느끼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서로 떼어놓지 않고 연결하여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시간의 흐름 가운데 행위를 마치 현재처럼 말함으로써 그 행위의 생생함을 느끼게 하는 문학방식이다.
시제는 ‘모호성’도 지니고 ‘무시간성’도 지닌다. 그리고 ‘영원한 현재’도 있다. ‘영원한 현재’는 ‘서정적 시간의 또 다른 의미심장한 모습’이다. 서정시가 ‘정서’와 ‘사상’의 융합이라고 할 때, ‘정서’는 순간적이고 ‘사상’은 초시간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정적 시간’은 ‘영원한 현재’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인의 경우에는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이런 시도를 굳이 문법적으로 따질 필요는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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