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장자가 들려준 이야기 셋

시조시인 2014. 5. 19. 23:18

장자가 들려준 이야기 셋


김   재   황



  잘 알고 있듯이 옛 책에서 말하는,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하나의 문장이다. 한 마리의 새가 하늘을 날고, 한 마리의 나비가 꽃을 찾아다니며, 한 그루의 나무가 푸른 모습으로 서 있다. 그 모두가 ‘스스로 그러하기’에 우리는 ‘자연’이라고 말한다. 물론, 사람의 몸 또한 그렇다. 그러니 어찌 ‘자연’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 참으로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것 같이’ 위태하다. ‘스스로 그러함’, 즉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장자’라는 책을 읽으면 그 안에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에서 ‘자연’의 가르침을 몇 개 골라서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제해’라는 것은, 이상야릇한 일을 써 놓은 책이다. 이 책에서 말했다. “‘붕’이라는 새가 남쪽 아득한 바다로 떠나는데, 삼천리나 되는 물을 치는 날갯짓으로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 높이까지 올라가며, 떠난 지 여섯 달이 지나서야 쉰다.”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제해자, 지괴자야. 해지언왈, “붕지사어남명야 수격삼천리 박부요이상자구만리 거이육월식자야.”]


-장자의 ‘소요부’ 중에서


  ‘제해’(齊該)라는 것은, ‘사람의 이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제나라의 익살스러운 이야기’들을 적어 놓은 책일 성싶다. 어쨌든 이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새인 ‘붕’의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떠난 지 여섯 달이 지나서야 쉰다.’는 구절이다. 새가 날아가는 동안에는 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먹을 수도 없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곁들이어 있다. ‘가까운 들판으로 떠나는 사람은 세 끼를 먹고 돌아와도 배가 오히려 부르다. 백 리의 길을 떠나는 사람은 하룻밤 묵을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천 리의 길을 떠나는 사람은 석 달 먹을 양식을 모아야 한다.’ 그러니 그 먼 길을 떠나는 ‘붕’의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문인’들을 생각한다. 이 시대에 ‘이’(利)를 따르지 않고 ‘의’(義)와 ‘인’(仁)을 따르는 ‘문인’들이야말로 저 넓은 사색의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붕’이 아닐까 한다.
  이 이야기를 계속 읽어 나가면 작은 연못의 메추라기가 “저 새는 또한 어디로 가는 거지? 나는 팔짝 뛰어오른 후에 얼마 날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와서 우거진 쑥대 숲을 빙빙 날아다니지만, 이 역시 날아다님을 이루는 거야. 그런데 저 새는 또한 어디로 가는 거지?”라고 비웃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말은 나도 수없이 들었다. 아마도 이 땅의 모든 ‘문인’들이 이와 같은 말을 이미 들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들어야만 하리라.
  그러나 나는 작은 연못의 메추라기는 되지 않으려고 한다. 이 가슴에 큰 꿈을 지니고 저 높은 하늘을 날아가는 한 마리의 ‘붕’이 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소인’(小人)이 되지 않고 대인(大人)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나는 끊임없이 책을 읽는다. 요즘은 특히 중국의 옛 책들 속에 푹 빠져서 지낸다.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게 더 낫다.’는 말을 쫓아서 마음껏 즐기고 있다. 물론, 즐기는 데에서 끝나면 안 된다. 때에 알맞게 실천해야 한다. 이를, 공자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가슴에 품는다. 특히 ‘장자’라는 책은, 일단 책을 손에 들면 쉽게 놓기 어렵다. 또 하나.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에 ‘장주’라는 사람이 꿈에서 나비가 되었고, 기쁘게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뜻에 맞아서 스스로 깨우쳤다! 그러나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이윽고 깨어나니, 뚜렷하게 있는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서 ‘장주’가 되었던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석자장주몽위호접, 허허연호접야, 자유적지여, 부지주야. 아연교, 즉거거연주야. 부지주지몽위호접여, 호접지몽위주여,.)


                                                                                                -장자의 ‘제물론’ 중에서


  ‘장주’(莊周)는 장자(莊子)의 이름이다. 중국 전국시대 송(宋)나라 ‘몽’(蒙)이란 곳에서 태어나서 ‘칠원’(漆園)의 하급관리를 지냈으며 초(楚)나라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졌다. 여기에서 특히 내가 주목하는 바가 있다. 왜 ‘장주’는 그 많은 것 중에서 하필이면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나 하는 점이다.
  모두 알다시피, 나비는 완전 탈바꿈을 한다. 즉, 나비가 알을 낳으면 그 알이 애벌레로 되고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며 번데기가 다시 껍질을 벗고 어른벌레인 ‘나비’로 된다. 일반적으로 애벌레는 4번의 껍질을 벗고 나서 다섯 번째 껍질을 벗으며 번데기가 되는데, 약 2주가 지난 후에야 번데기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번데기 껍질을 벗는다고 곧바로 하늘을 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날개가 마르기를 1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 한다.
  이런 어려움이 ‘문인’이 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문인’이 되려면 먼저 ‘문인’이 되려는 꿈을 지녀야 한다. 이는 ‘나비의 알’ 시기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꿈’을 지녔으면 오랜 습작기간을 거쳐야 한다. ‘시’도 만나고 ‘수필’도 만나는 여러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바로 ‘나비의 애벌레’ 시기와도 같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친 후에 마음에 확고한 길이 정해진 다음에는 홀로 밤을 밝히는 습작기에 도달한다. 이는 다름 아닌 ‘나비의 번데기’ 시기이다. 그런 피를 말리는 작업이 지난 후에야 ‘등단’의 길을 밟는다. 그러므로 ‘문인’이 된다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날 수 있는 ‘나비’가 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장자’는 ‘꿈에서 자기가 나비로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서 자기로 되었던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라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나비이든지 나비가 나이든지 무슨 구별이 필요하겠는가. 모두가 하나이다. 내가 나비라고 하면 나비의 삶을 살아가면 될 터이고, 나비가 나라고 하면 내 길을 성실히 걸어가면 그뿐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정말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사람은 절대적인 ‘자기’라고 하는 게 없다. 그래서 ‘무아’(無我)이다. ‘나’라고 하는 인식이 지속하고 있을 뿐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다. 언제나 변하고 있다. 몸이 변하고 마음이 변한다. 그게 모두 스스로 그러하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있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過程)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순간마다 성실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 순간이 모여서 나를 이룬다.
  ‘성실함’이란 ‘아름다움의 추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아름다움’을 말하기는 아주 조심스럽다. 그래서 노자는 ‘하늘 아래에서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줄로 알지만, 그것은 추할(더러울) 뿐이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라고 했다. 다행히 ‘맹자’가 이 ‘아름다움’을 아주 적절히 나타냈다. 그는 말했다. “하고자 함이 옳은(마땅한) 것을 ‘착하다’고 하며, 그것을 지니고 있으면 ‘믿음직스럽다’라고 하며, 그것이 가득 차 있으면 아름답다고 한다.” (可欲之謂善 有諸己之謂信 充實之謂美). 그러므로 ‘옳고 마땅한 것’을 몸에 가득 지니고 있으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선비인 문인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장자’라는 책에는 비유의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송나라에 ‘형’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가래나무와 잣나무와 뽕나무가 잘 자랐다. 손아귀가 넘는 것은 원숭이의 말뚝을 얻으려는 사람이 베어 갔고, 세 아름이나 네 아름이면 이름 높은 집안의 대들보를 얻으려는 사람이 베어 갔으며, 일곱 아름이나 여덟 아름이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돈이 많은 장사꾼 집의 판목을 얻으려는 사람이 베어 갔다. 그러므로 그 하늘에서 내린 나이를 끝내지 못하고 길 가운데에서 도끼에 일찍 죽었다.

  宋有荊氏者, 宜楸柏桑. 其拱把而上者, 求狙繕之얶者斬之, 三圍四圍, 求高名之麗者斬之, 七圍八圍, 貴人富商之家求.傍者斬之. 故未終其天年, 而中道之夭於斧斤(송유형씨자, 의추백상. 기공파이상자, 구저후지익자참지, 삼위사위, 구고명지려자참지, 칠위팔위, 귀인부상지가구전방자참지. 고미종기천년, 이중도지요어부근)

-장자의 ‘인간세’ 중에서


  위의 내용 중 ‘형씨’(荊氏)는 ‘형’이라는 곳(지역)을 이르는 것같다. ‘씨’(氏)는 ‘지명에 붙는 접미사’라고 한다. ‘형’(荊)은 ‘모형 나무’ 또는 ‘가시나무’를 가리키는데, ‘꾸며낸 곳’으로 실제의 지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튼, 그곳에는 가래나무나 잣나무나 뽕나무 등이 잘 자랐는데, 조금씩 자랄 때마다 그에 맞는 용도로 벌목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재미있다. 가장 가늘 때에는 원숭이를 기르려고 베어 갔다. 이는, 눈을 즐겁게 하는 데 쓰였다. 그리고 더 자라면 집을 지을 때에 대들보로 쓰려고 베어갔다. 이는 몸을 편하게 위함이다. 그리고 더욱 더 자라면 이번에는 돈 많은 사람이 ‘판목’으로 쓰려고 베어 갔다. ‘선방’(樿傍)은 ‘관’(棺)의 양옆에 붙이는 고급스러운 한 장짜리 큰 널판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니 이는, 죽음을 위한 용도이다. 나무도 나와 같은 한 몸인데, 이렇듯 갖가지 명목으로 베어 버렸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문인’들 하나하나가 모두 나무와 같다. 스스로 그러하게 ‘푸른 모습’을 지닌다. 그 생각이 그러하고 그 삶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들을 그냥 두려고 하지 않는다. 말 잘하는 사람이면 정치꾼들이 데려가고, 머리 좋은 사람이면 장사꾼들이 데려가고, 잘생긴 사람이면 연예계에서 데려간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비라면, 깊이 숨어서 스스로 몸을 열심히 닦아야만 한다. 그래야 큰 그늘을 내릴 수 있는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
  모두 이 세상에서 ‘돈’이 제일이라고 말하지만, ‘돈’이 왜 필요한가? 내가 호의호식하기 위해서? 아니다. ‘돈’이 필요함은 그 ‘돈’으로 이 세상에 큰 베풂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왜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는가?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아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았어도 베풂을 이루지 못했다면 수치스러울 뿐이다. 모두 유명해지려고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통해서 베풂을 이룰 수 있어서이다. 그런데 ‘문인’은 작품을 통해서 남보다 많은 베풂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노자(제44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넉넉함을 알면 더럽힘이 없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말 그대로 틀림없이 길고 오래간다.). ‘재목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려고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 때문에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란다. 그걸 그치면 위태롭지 않다는 뜻일 성싶다. 하늘이 하라고 시키는 게 천성이고, 천성을 따르는 게 ‘나의 길’이다.
  나는 ‘오지탐험’(奧地探險)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왜 그곳으로 가서 더러운 발자국을 남기려는 것인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곳은 그대로 그냥 두면 왜 안 되는가. 사람의 발길이 닿으면 그곳은 순식간에 더러워지고 망가지게 된다. 아무도 모르는 ‘깊은 곳’일수록 아무도 모르게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게 그곳을 살리는 길이다. 사람의 힘으로 산과 강을 죽일 수는 있어도 살릴 수는 없다.
  녹색문인들은 자연의 진정한 친구들이다. 친구라면 마땅히 그 아픔을 다독여 주고 함께 아파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나서서 어떻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마음을 보태야 한다. 그게 ‘시’(詩)나 ‘수필’이나 ‘동화’ 등으로 나타나게 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낀다.’는 뜻이다.

【한국녹색문인회 회장】

'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집을 펴내는 까닭  (0) 2015.08.07
시를 쓰는 이유  (0) 2015.07.21
언어가 시어로 되기까지  (0) 2014.01.24
시조와 하이쿠의 국제교류에 대한 제언  (0) 2014.01.15
시의 형상화  (0) 2014.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