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악기론

제41절, '대인'이 '예악'을 일으키면(역: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24. 18:28

제41절 ‘대인’이 ‘예악’을 일으키면

 是故 大人擧禮樂 則天地將爲昭焉 天地訢合 陰陽相得 煦嫗覆育萬物 然後草木茂 區萌達羽翼奮 角觡生 蟄蟲昭蘇 羽者嫗伏 毛者孕鬻 胎生者不殰 而卵生者不殈 則樂之道歸焉耳(시고 대인거례악 칙천지장위소언 천지흔합 음양상득 후구복육만물 연후초목무 구맹달우익분 각격생 칩충소소 우자구복 모자잉국 태생자부독 이란생자불혁 즉악지도귀언이).

 이렇기에 ‘대인’(성인으로서 천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예악’을 일으키면(擧: 제정하여 행하는 것) 하늘과 땅은 장차 밝아지게 된다. 하늘과 땅이 화합(흔합= 和合. ‘흔’은 ‘欣’과 통함.)하고 ‘음’과 ‘양’이 서로 얻으며, 만물을 기로써 따뜻하게 하고(煦) 체로써 따뜻하게 하여(嫗) ‘복육’(‘복’은 하늘을 이어받은 것이고 ‘육’은 땅을 이어받은 것)한다. 그런 다음에야 풀과 나무가 우거지며 조그마한 싹(콩)이 구부러져 나오고 날짐승은 날개를 휘두르며 짐승은 태어나서 길러지고 ‘칩충’(겨울철에 활동하지 않고 가만히 땅속에 엎드려 있는 벌레)은 떨치고 나온다. ‘조류’(羽者= 鳥類.)는 ‘알을 품어 몸체로 덥혀서 새끼를 깐 다음에 기르고’(구복) ‘짐승 종류’(毛者)는 ‘새끼를 배에서 일정한 기간을 채운 다음에 낳아서 기른다.’(孕鬻: ‘鬻’은 여기서 ‘기를 국’ 자임.) 그리하여 ‘어미의 뱃속에서 모든 양분을 공급받으며 개체로서 생활이 가능할 때까지 발육하는 동물’(태생)의 것은 유산하지 않고(不殰) ‘낳은 알을 일정한 온도에서 알이 지닌 영양소로 생장 부화하는 동물’(난생)의 것은 알이 깨지지 않으니.(不殈: ‘혁’은 ‘裂’과 같은 뜻) 이는 곧 ‘악’(음악)의 길이 돌아올 따름이다. (녹시 역)

 ‘시조’의 경우- <이렇기에 ‘큰 시조시인’이 ‘시조의 내용과 형식’을 일으키면(擧: 제정하여 행하는 것) 하늘과 땅은 장차 밝아지게 된다. 하늘과 땅이 화합(흔합= 和合. ‘흔’은 ‘欣’과 통함.)하고 ‘음’과 ‘양’이 서로 얻으며, 만물을 기로써 따뜻하게 하고(煦) 체로써 따뜻하게 하여(嫗) ‘복육’(‘복’은 하늘을 이어받은 것이고 ‘육’은 땅을 이어받은 것)한다. 그런 다음에야 풀과 나무가 우거지며 조그마한 싹(콩)이 구부러져 나오고 날짐승은 날개를 휘두르며 짐승은 태어나서 길러지고 ‘칩충’(겨울철에 활동하지 않고 가만히 땅속에 엎드려 있는 벌레)은 떨치고 나온다. ‘조류’(羽者= 鳥類.)는 ‘알을 품어 몸체로 덥혀서 새끼를 깐 다음에 기르고’(구복) ‘짐승 종류’(毛者)는 ‘새끼를 배에서 일정한 기간을 채운 다음에 낳아서 기른다.’(孕鬻: ‘鬻’은 여기서 ‘기를 국’ 자임.) 그리하여 ‘어미의 뱃속에서 모든 양분을 공급받으며 개체로서 생활이 가능할 때까지 발육하는 동물’(태생)의 것은 유산하지 않고(不殰) ‘낳은 알을 일정한 온도에서 알이 지닌 영양소로 생장 부화하는 동물’(난생)의 것은 알이 깨지지 않으니.(不殈: ‘혁’은 ‘裂’과 같은 뜻) 이는 곧 ‘시조 형식’의 길이 돌아올 따름이다.>

[녹시 생각]
 문득 ‘우파니샤드’에 들어 있는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버지 ‘우달라카’(Uddalak)와 아들 ‘스베타게투’(Svetaketu)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지혜를 전하고 있었다.
 “저 나무에서 열매 하나를 따오너라.”
 “여기 이렇게 열매를 따왔습니다.”
 “그러면 그 열매를 반으로 쪼개어라.”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쪼개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몇 개의 까만 씨가 보입니다.”
 “그중에 하나를 반으로 쪼개어라.”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쪼개었습니다.”
 “그 안에는 또 무엇이 들어 있느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에서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볼 수 없는, 이 아주 작은 것. 그 아주 작은 것으로 이루어진 이 큰 나무가 서 있는 걸 보아라. 보이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있다는 걸 너는 믿어라. 그 아주 작은 것.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걸 ‘아트만’으로 삼고 있다. 그 존재가 바로 ‘아트만’이다. 그것은 바로 너다.”

 이 ‘아트만’(ātman)은 ‘자신의 참모습’을 말한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현미경으로는 보이는 게 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걸까? 더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그 무엇이 만들어진다면 또 다른 무엇인가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듯 분자나 원자보다도 더 작은, 근본이 되는 그 무엇에 모든 생명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그 존재가 ‘생명의 참된 존재’이며 바로 ‘아트만’이라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러준다. 그런가 하면, ‘세상 전체의 참모습’을 ‘브라흐만’(Brahman)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문다까 우파니샤드’(3-2-8)에 들어 있는 시 한 구절을 본다. 

 이것은 진리로다
 잘 타오르는 아궁이에서 수천 개의 불꽃이 생겨나듯
 그 불멸의 브라흐만에서
 여러 생명체가 생겨나며 
 다시 브라흐만 속으로 잠긴다.

 그렇다면 ‘브라흐만’을 ‘시조 내용’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안에서 모든 생명체가 생겨나니까. 그리고 ‘아트만’은 ‘시조 형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곳은 ‘생명의 참된 존재’가 돌아오는 길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