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악기론

제43절, 위나라 문후가 자하에게(역: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25. 12:32

제43절 위나라 문후가 자하에게

 魏文侯問於子夏曰 吾端冕而聽古樂則唯恐臥 聽鄭衛之音則不知倦 敢問古樂之如彼何也 新樂之如此何也(위문후문어자하왈 오단면이청고악칙유공와청정위지음칙불지권 감문고악지여피하야 신악지여차하야).

 위나라 문후(전국시대 초기의 명군)가 자하(공자의 제자. 위나라 문후의 스승)에게 말했다. “내가 예복을 입고(端冕) 옛 ‘악’(음악)을 들으면 오직 (싫증이 나서) 눕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소리를 들으면 (재미가 있어서) 싫증남을 알지 못한다. 감히 묻는데 ‘옛 음악’이 그와 같음은 어찌된 것인가?” (녹시 역)

 ‘시조’의 경우- <시조 작가 한 사람이 그 스승에게 말했다. “제가 옷깃을 여미고(端冕) 옛 ‘시조 내용’을 들으면 오직 (싫증이 나서) 눕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지금의 ‘시조 내용’에 따른 음률을 들으면 (재미가 있어서) 싫증남을 알지 못합니다. 감히 여쭙는데 ‘옛 시조 내용’이 그와 같음은 어찌된 것입니까?”>

[녹시 생각]
 이 절은 위나라 문후가 ‘고악’(古樂)과 ‘금악’(今樂)을 들은 후에 그 느낌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 시조의 경우로 보아서 ‘옛시조는 싫증이 나는데 지금의 시조는 재미가 난다.’라는 뜻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지금 이처럼 시조를 재미로 읽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무엇보다 먼저 ‘시(시조)’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싶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스승이신 조지훈 시인의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시(시조)란 무엇인가? 시(시조)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따금 이러한 물음을 받는 수가 많습니다만, 이 물음에 대하여 누구에게나 만족한 답을 베풀 수 있는 이는 영구히 이 세상에 없다고 보는 게 옳겠습니다. 시(시조)는 ‘영혼의 창’이니 ‘기억의 향수’니 ‘천계의 소리’니 ‘생명의 약동’이니 ‘울굴에서의 해방’이니 ‘정치선동의 도구’니 하여 제가끔 일가언(一家言)을 세운 사람이 있으나 그것은 개인이 느낀 시관(詩觀)일 따름이요 넓은 시 일부분의 설명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개인의 시관 및 그에 따르는 ‘작품행동’으로서 시(시조)를 두고 그밖에 따로 시(시조)가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현상 곧 본질특수(本質特殊) 곧 보편(普遍)이라는 이 명제(命題)는 시(시조)에서도 타당한 것입니다.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날씨가 따뜻해진다는 이 모든 현상을 두고 봄이라는 개념(槪念)이 생길 수 없음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시(시조)는 어디에 있는가. 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시(시조)의 소재(素材)가 우주의 삼라만상과 인간생활 일체의 내용 속에 편비(遍備)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다시 한 걸음 나아가 엄밀히 생각할 때 소재는 소재일 뿐 그대로는 아직 시(시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의 시(시조)는 이들 소재가 시인의 개성 있는 가슴과 손을 통하여 다시 창조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하여 그 연장으로서 다시 완미(完美)한 결정(結晶)을 이룬 제이(第二)의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시(시조)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은 자연을 정련(精鍊)함으로써 다시 자연에 통하게 하는 것이요, 바꿔 말하면 막연한 자연에 특수한 의미(意味)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에 더 많이 통할수록 우수한 시(시조)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