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절 노래의 말 삼음은 길게 말하는 것
故歌之爲言也 長言之也 說之故言之 言之不足 故長言之 長言之不足 故嗟歎之 嗟歎之不足 故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고가지위언야 장언지야 열지고언지 언지불족 고장언지 장언지불족 고차탄지 차탄지불족 고불지수지무지족지도지야).
“그러므로 노래의 말 삼음은 길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기에 말하고 말해도 부족하기에 길게 말하며 길게 말해도 부족하기에 ‘차탄’(嗟歎: 한숨지어 탄식함. ‘차’는 소리에 관계되고, ‘탄’은 기운에 관계됨. 차탄하여 자연스레 억양이나 고하의 음조가 나오는 것)합니다. 차탄하는 것도 부족하기에 손으로 춤추고 발로는 밟음을 알지 못합니다.” (녹시 역)
‘시조’의 경우- <“그러므로 시조의 말 삼음은 길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기에 말하고 말해도 부족하기에 길게 말하며 길게 말해도 부족하기에 ‘차탄’(嗟歎: 한숨지어 탄식함. ‘차’는 소리에 관계되고, ‘탄’은 기운에 관계됨. 차탄하여 자연스레 억양이나 고하의 어조가 나오는 것)합니다. 차탄하는 것도 부족하기에 ‘손으로 춤추고 발로는 밟는 것같이’ 몸짓으로 기쁨을 나타냅니다.”>
[녹시 생각]
시조를 읽고 그 안에서 남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묘미(妙味)를 발견하였을 때의 기쁨을 그 무엇에 비기겠는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덩실덩실 춤을 출 것만 같다. 이런 ‘묘미’를 얻는 묘안은 없는 것일까? 우리가 음식을 선택할 때 우선 먹음직스러운 것을 고르게 된다. 그렇듯 현대시조에서 ‘읽을 만한 작품을 고르는 데’는 아무래도 ‘작품의 제목’이 큰 역할을 담당할 것 같다.
그러니 어찌 작품의 이름을 허술히 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시조에서도 그 작품의 이름, 곧 시조 작품의 제목이 좋아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시제’(詩題)이다. 그러나 예전의 일부 시인들은 이 ‘시제’에서 무관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작품을 읽다가 보면 더러 ‘무제’(無題)라는 작품을 만나곤 한다. ‘무제’라는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제목이 없는 것. 흔히 시나 그림 등에 제목을 붙이기 어려울 때에 대신하는 제목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무제’란, ‘제목을 붙이고 싶지 않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독자의 느낌에 따라 ‘시의 제목을 한번 붙여 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이는, 독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일 텐데, 어쩌면 이게 독자에 대한 지나친 배려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시의 제목’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 나름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을 성싶다. 그들은 다만 한 가지, ‘이름보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하듯이, 시조에서도 제목보다 그 시조의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옳은 말이다. 나 또한 그 생각에 동감한다. 아무리 시의 제목이 멋들어지다고 하더라도 시의 내용이 그에 따르지 못한다면 ‘비단에 싸 놓은 개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독자들 가슴에 실망만 가득 안겨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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