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다호
(원제: MY OWN PRIVATE IDAHO)
김
재 황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어두운 분위기가 가슴을 무겁게 누르지만, 징검돌처럼 중간 중간에 서정적 요소들을 놓아
둠으로써 숨을 돌리게 해주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예술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짙게 깔려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는,
먹고 살기 위해 매춘남 노릇을 하고 있는, 청년 ‘마이크’가 어머니를 찾아서 영원히 길을 떠난다는 이야기.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길은 가장
강조될 수밖에 없는 요소이고, 그러므로 길에 대한 주인공의 독백이 자못 진지하게 나타난다.
‘길 모양만 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분명히 와 본 적이 있어. 그 언제인가 여기 머문 적이 있거든. 이런 길은, 정말 이렇게 생긴 길은 아무데도 없어.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의 얼굴이 그렇듯이,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이야.’
곧잘, 길은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곧고 바르고 쾌적한 길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울퉁불퉁하고 꾸불꾸불한 길도 있는 법.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길은, 황야 한가운데로 좁고 아득하게 뻗어 있다. 바로 외로움이
가득하고 서러움이 질척한, 일그러진 사람의 얼굴 같은 길이다.
길이 머니, 다리가 무겁다/ 가다가 어디선지 머무는 곳/ 그 곳에
몸을 쉴 자리
있으리니/ 처음을 가도 낯이 익은 길/ 황야에 마른 풀만 가득하여도/ 갈 길이
있으니, 나는 좋아라/ 밤길을 걸어도,
나는 좋아라/ 멀리 보이는 따뜻한 불빛
한 점.
---------- 졸시 ‘이어지는 길’
이 영화는 주인공
‘마이크’ 역을 맡은 ‘리버 피닉스’를 이해해야만 더욱 큰 애정을 가질 수 있다. 지나치게 잘 생긴 남자라는 느낌보다는 결코 웃음을 밖으로
드러낼 것 같지 않은, 어쩌면 50년대의 ‘제임스 딘’을 다시 보는 듯한, 우수에 잠겨서 입을 꽉 다문 무표정한 얼굴의 리버. 물론, 이 영화가
‘리버 피닉스’ 최후의 대표작이라는 데에도 특별한 관심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야말로 가장 ‘리버 피닉스’다운 영화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정말이지, 이 영화에서 연기하는 ‘리버’의 행동 하나하나가 평상시에 자기의 삶을 보여주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내용처럼 ‘리버’가 불행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말은 아니다.
‘리버 피닉스’는 시인이자 작곡가인 아버지 ‘존’과 진보적인 성격의 어머니 ‘앨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 부모는 아이들을
‘무지개’니, ‘자유’니, ‘여름’이니, ‘잎사귀’ 등으로 이름을 지어 부를 만큼 서정어린 분이었다. 그러므로 ‘리버’에게서 풍기는 고독감은
순전히 선천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이 영화에서 또 하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요소는, 주인공 ‘마이크’가 앓고 있는
‘기면발작증’. 어떤 충격을 받으면 갑자기 경미한 발작을 일으킨 후에 쓰러져서 깊은 잠에 빠지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현대의학은 이 병을
‘원인불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 그는 어머니를 상기하게 되는 어떤 상황과
만나게 되면, 어김없이 ‘기면발작증’을 일으켜서 깊은 잠에 빠지곤 한다. 그는 잠 속으로 잠기며 어머니를 만나는 꿈을 꾸게 되는데, 꿈 속에서
어머니는 그를 품에 안고 토닥거리며 이렇게 속삭인다.
‘걱정 마. 잘 될 거야. 괜찮다니까. 네가 괴로워하는건
알지만…….’
사실로 어머니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다. 모두가 그리워하고, 가서 안기고 싶어하는 고향. 그 곳에서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서는 우리를 두 팔 벌려서 맞으시리라. 그러니, 어머니와 고향은 잊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존재다. ‘마이크’는 독백한다.
‘어머니의 집은 청색이었어. 아니, 회색이야. 그걸 다 잊다니…….’
가물거리는
기억을 안타까워하며, 어린 자기를 안고 춤을 추는 어머니의 환영(幻影)에, ‘마이크’는 더욱 어머니를 목마르게 그리워한다. 어찌 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현실적으로 만나기 힘든 어머니를 꿈 속에서나마 만나기 위하여 ‘기면발작증’이라는 병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먼 길을 떠나신 어머니도/ 동산에 뜨는 보름달처럼/ 밤이면 내 가슴으로
오시네/ 적막의 흰 동정 두르시고/ 시린 옥색치마
길게 끌며 오시네/
아아, 그 강물 같은 가슴/ 갈대꽃만 피어 흔들리는 고향/ 거기 여전히 오늘도/
어머니는 품을 열고 나와
계시네.
--------- 졸시 ‘기다리시는 어머니’
여하튼 ‘마이크’에게는 그 어머니가 어떠한 여자였건 간에, 단
하나 의지하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찾아간 형은 무자비하게 그 앞에서 어머니를 매도한다.
“내가 잠들면
어머니는 남자를 찾아다녔어. 술집을 돌아다니며 남자들을 유혹했지. 리노에서 온 도박꾼, 카우보이를 하나 만났어. 베가스의 카지노에서 일했는데,
사기를 치다가 쫓겨났지. 진짜 멍청이였지만, 어머니는 그 자를 사랑했어. 가정을 꾸미고 멋진 집, 개, 자동차를 꿈꾸었지. 그 자는 결혼 의사가
없었어. 사랑하지도 않았고……. 그 때쯤 네가 태어난 거야. 어머니는 38구경 권총을 가지고 있었어. 총을 좋아해서 잘 때도 늘 옆에 두고
잤어. 또 장전된 권총으로 야채를 볶아대기도 했지. 어느 날, 어머니는 그 자와 드라이브-인 극장엘 갔어. 리오 부라보, ‘존 웨인’이 나오는
영화였어. 영화를 보는 도중, 어머니는 그 자의 머리에 총을 쐈어. 그게 어머니가 떠나야 했던 이유야. 그리고 그 자, 그가 너의 진짜
아버지야.”
‘마이크’는 그 말을 듣고, 형을 향해 성을 내고는 한 마디 내뱉는다.
“거짓말 마. 나의 진짜
아버지가 누군지, 나는 알고 있어. 로버트, 너야. 네가 내 아버지야.”
그러나 ‘마이크’에겐 이미 아버지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그에게는
다만 어머니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나쁜 여자였든지 좋은 여자였든지,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숙명적일 뿐. 여기에서 잠깐씩
보여주는, 거센 물줄기를 힘차게 거슬러오르는 연어의 영상이 그 사실을 잘 대변해 준다. 이는 곧 어머니에게로 향한, 그 고향으로 향한,
내면세계의 표현이다.
연어는, 깊은 산골의 차고 맑은 물에서 태어나고, 넓은 바다로 나간 다음에 6년 정도를 살고는, 다시
모천(母川)으로 회귀(回歸)하여 알을 낳고 죽는다. 그런데 이렇듯 고향을 찾아서 다시 돌아오는 회귀율이 80%가 넘는다고 하니,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연어과 물고기로는 연어를 비롯하여 송어․자치․열목어․산천어 등 12종이 있다. 이들 연어과 어류는 대부분
바다에 살다가는 산란을 위해서 자기가 태어났던 강을 거슬러 오른다.
힘껏 내젓는 지느러미/ 절박한 소망이 물을 차고 오르는/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의 귀향/ 물살이 거세면 거셀수록/ 더욱 힘차게 거슬러오르는 질주/ 아, 모천을 향한 사랑이여/ 최선을 다한 네
생애가 끝난 후에/ 비로소 꿈틀거리는 새 생명의 숨결----.
---------- 졸시 ‘회귀하는 연어’
우리에게도
맑은 물은 고향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 맨처음 모태(母胎)의 양수(羊水)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성싶다. 이 영화에는
어머니와 고향과 또 하나, 바다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마이크’는, 자기 몸을 산, 어느 부잣집 마나님의 침실에서 소라껍질을 발견하고는
집어서 귀에다가 댄다. 그는 그 소라껍질 속에서 들려 오는 바다 소리를 듣고자 했을 것이다. 그 바다 소리는 분명히 그를 부르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요, 고향의 소리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제목 ‘아이다호’는 주인공의 고향이다. 고향을 가려면 길을 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길로 시작해서 길로 끝날 수밖에 없다. 두터운 외투에 자루를 든 ‘리버’가 도로에 서서 또 한 번 독백한다.
‘난 도로의
감식가야. 평생 길을 맛볼 거야. 이 길은 끝이 없어. 지구의 어디라도 갈 수 있어.’
그리고는 또다시 ‘기면발작증’을 일으키고는, 길
한복판에 쓰러진 채,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멀리 끝없이 펼쳐진 길이 외로움을 끌고, 넓게 펼쳐진 황야가 서러움을 날린다. 이 장면을 보는
사람 모두가, 마치 외로운 자신의 삶을 보는 것같아서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게 된다.
얼마 후에, 그 길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가다가
멎고는, 허름한 차림의 두 사람이 내려서 주인공이 지녔던 자루와 구두를 각각 가져간다. 또 얼마 후에는 차 한 대가 와서 멎더니, ‘마이크’를
차에 싣고는 어디론지 떠나 버린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 타의에 의해 살다가, 타의에 의해 죽을지도 모를 ‘생명의 아픔’을 이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