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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길 님의 에세이집 '바하사막 밀밭에 서서'를 읽고
김 재 황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품격이 높은 책을 만나는 일보더 더 큰 즐거움이 있을까? 게다가
그 책이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이야기로 꽉 채워져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작품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한다. '책머리에'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그 당시 민항 국제선 보잉 747점보기
조종사라면 남들은 대단히 부러워하는 직장이었다. 나는 헌신짝 버리듯 그 직장을 파하고 영주권도 없이, 그렇다고 손에 쥔 돈도 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가족을 데리고 와서 주저앉았다." 그렇다. 김호길 님은 미국에서 시인이라는 신분 덕분에 미주중앙일보 기자로 일하게
되지만, 얼마 후 겨우 자리가 잡혀 가는 동안에 다시 사표를 내고 농부가 되었다. 나와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너무도 많기에, 눈을
크게 떴다. 나 또한, 시를 쓰기 위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인 '삼성 그룹'에 사표를 내고 농부가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에세이집
'바하사막 밀밭에 서서'는 자서전 적인 색체가 짙다. 이는, 서두의 '잡문에 바치는 소고'에서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국인의 흔적도 없는 열사의 멕시코 바하사막, 스반아어를 사용하는, 언어도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서 몸짓 손짓
바디랭귀지로 지난 20년을 '눈먼 무소처럼' 뒹굴어 온 상처의 기록을 이제 처음으로 보따리를 풀어 보인다." 굳이 이 말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에세이는 논픽션의 문학이다. 즉, 김호길 님의 이론대로 "산문이란 '영혼의 거울' 같은 거라 거짓말로 우물거려 넘어갈 수
없고, 자기를 맑게 비추고 드러내야 하는 '自照의 문학'이다. 김호길 님이 농업을 생업으로 정하고 정착한 곳은
'바하'(Baja)이다. 이 말은 스페인어로 '아래'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그 곳의 '엘 까리살'이라는 마을에서 첫 삽질을 했다. 왜 그는
그 곳에 농장을 마련했을까? 수필 '바하사막 끝자락에서'를 읽으면 그 답이 분명히 나타난다. 단 한 마디, '사람들 사이에 진짜 사람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사막 이야기와 선인장 이야기가 몇 번이나 나온다. 김호길
님이 그토록 선인장에 애정을 쏟는 이유가 있다. 선인장 이야기 중의 한 대목을 여기에 소개한다. "선인장 숲 속의 바위에
걸터앉아 무심코 주위를 바라보노라면 일말의 감회가 피어오른다. 안정된 직장을 마다하고 영주권도 없이 미국에 건너와서 살아 온 내 지난 20여
년의 역정이 바로 저 한 그루 선인장, 그와 같은 인욕의 세월이 아니었나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다. 나 또한, 안정된 직장을 바리고 아무런 수익도 보장되지 않는, 전업문인으로 살아 온 20년 가까운 세월이 사막을 걷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김호길 님은 미국의 어려운 이민생활 중에 가끔은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는데, 작품 '송월산방에
올라'에 그 이야기가 적혀 있다. 송월산방은 로스앤젤레스에서 1시간 반 남짓 떨어져 있는 피노산 해발 6천 피트 고산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주위에는 몇 백 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고 한다. 나는 '산방'은 지니지 못했지만, 시상을 얻기 위해 가끔 관악산을
오른다. 그 곳 큰 신갈나무 밑에 자리를 잡으면 청솔모가 놀러 오기도 한다. 작품 '내 속에 키우는 새 한 마리'는 몹시
흥미롭다. 누구나 그 가슴에는 새 한 마리를 키운다지만, 김호길 님이 키우는 새는 과연 어떤 새일까? 우선 시조 한 편을 보자.
내
영혼의 수풀 속에 새 한 마리 살고 있다 피로와 나태가 감겨 혼곤해진 순간이면 딱, 딱, 딱, 부리로 쪼아 번쩍 불침을
놓는다.
---김호길 님의 '딱따구리' 전문
그리고 그 설명을 들어 보자. "언제부터인가
잘 기억되지 않지만 내 속에 한 마리 새를 키우는 노력을 해 오고 있다. 크낙새가 아니면 딱따구리를 닮은 놈이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파악하는 놈, 그리고 나의 의식이 있는 시간이면 언제나 깨어 있는 놈이다. 무딘 내 영혼을 지켜보다가 길을 잘목 들거나 행동에 이상신호가 올
때면 탁. 탁, 탁, 쪼아주는 놈이다." 나는 작품 '옥천사 행'을 읽다가 김호길 님의 고향이 '사천'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그 곳에 '옥천사'라는 절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시골이라면 빠질 수 없는 게 개울이다. 그 곳에서 김호길 님은 '발을 들고 개울로 가서
붕어며 버들피리며 미꾸라지 등을 잡아 산초 넣고 걸쭉하게 끓인 찌개의 맛'을 떠올린다. 내 고향은 파주인데, 그 곳에도 큰 개울이 있다. 동네
이름은 野洞이다. 나도 냇가에서 천렵을 즐기던 그 때를 결코 잊지 못한다. 이 책의 내용 중에는 시조사랑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이는 민족시이니만큼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가슴에 시조작품 몇 편쯤은 담고 살아야 한다. 더욱이 어린이들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그 일을 김호길 님은 오랫동안 해 오고 있다. 참으로 뜨거운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작품 '바하사막
밀밭에서서'를 읽으면 그리 정겨울 수가 없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밀밭 속에서 살다시피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종다리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골을 가도 밀밭을 만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끝 부분에서 작품 '아름다웠던 묵은 날들이여, 아듀!'를 읽으며
나는 무릎을 쳤다. "세계화란 달리 말하면 미국화를 의미한다. 미국식 사고와 미국의 문화가 세상을 판치고 있다. 그 사이
자기들의 언어가 파괴되고 말과 글이 없어져 가도 영어만 잘하면 칭찬해 주는 세상이 되어기고 있다. 소수민족의 입장으로 본다면 지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과 글은 그 민족의 얼을 이어가는 영혼의 표상이다. 얼빠진 사람으로 만들어간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유태인처럼
천년을 디아스프라로 헤매어도 언어와 문자를 지켜야만 그 민족이 존재해 나갈 수 있다." 이 글은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우리 말도 채 배우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얼빠진 사람들이 이 땅에 많다. 김호길 님의
에세에집 '바하사막 밀밭에 서서'는 한 편 한 편이 큰 울림으로 감동을 준다. 그 작품 안에 몸소 체험한 순수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움에 도전하려는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