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빙화(魯冰花)
(원제, THE DULL-ICE FLOWER)
김 재 황
“여러분이 보시는 꽃은 노빙화이여요. 농부가 차밭에 심으면, 봄에 꽃이 피어요. 그러나 얼마 후에 시들면 농부가 차나무 밑에 두고 흙으로 덮지요. 그러면 노빙화는 비료가 되어서 차나무를 잘 자라게 만들지요. 노빙화는 죽어서 향기로운 차를 마실 수 있게 해 주어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바람에 흔들거리는 노빙화의 꽃 핀 모습이 화면에 흐르면서, 차근차근 침착하게 들려주는 한 소녀의 노빙화에 대한 설명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길한 예감을 갖도록 한다.
그런데 이어서 전개되는 푸른 차밭과 그 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있는 여인들의 목가적(牧歌的) 풍경에 맞취서 들려 오는 노랫소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하여 더할 수 없는 시골 고향의 서정 속에 잠기게 된다.
“난 알아요, 별이 노래를 부르는 걸. 시골의 밤은 고요한 노래를 지녔어요. 난 알아요, 바람이 노래를 부르는 걸. 어린 시절을 되새기게 해 주어요, 파란 바다는 내 마음을 비쳐 주어요. 세상은 변해도 바다는 변하지 않아요. 지난 추억은 강물처럼 흘러갔지만, 어린 추억은 아직 남아 있어요.”
그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롭다. 집앞에는 차밭이 있고, 그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강 건너 멀리에 높은 산이 솟아 있다. 그렇건만 그 아름다움 속에 바람이 불고, 어쩐지 슬픔이 짙게 깃들어 있는 듯한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중국 증산초등학교 4학년 학생인 ‘고아명.’ 그 소년에게는 초등학교 6학년생인 누나 ‘고아매’가 있다. 어머니는 힘든 일만 하시다가 간이 나빠져서 돌아가시고, 그의 아버지 ‘고석송’은 차밭을 가꾸지만, 빈한하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모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누나 ‘아매’. 그들 남매는 저 세상으로 떠나간 어머니가 마냥 그립다. 그 그리움이 노빙화의 꽃으로 다시 피어난다.
“별들은 말이 없고 인형은 엄마를 닮았는데, 하늘의 눈은 반짝이고 엄마의 마음은 노빙화. 차밭에 꽃이 피니, 엄마는 즐거워하시네.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은 노빙화네. 눈물은 노빙화가 되었네.”
‘노빙화’는 한없이 여리고, 바람에 흔들리다가 봄 한철 동안을 꽃이 피며, 그 자리에 쓰러져서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희생적인 녹비작물(綠肥作物)이다. 그러한 모습이, 가족을 위해서 힘든 일에만 매달리다가 병을 얻고는,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어머니의 심상으로 어린 남매 앞에 다시 살아서 피어났으리라. 아, 이 세상 어떤 어머니인들 어찌 그렇지 않으리.
내 영혼이 풀꽃에게로 가서/ 그 가슴에 얼굴 묻고 안기면/ 이슬을 머금은 그
숨결이/ 천둥 소리처럼 내게로 전해져 온다/ 외로움에 추운 사람들/ 그리움에
여윈 사람들/ 풀꽃 잎새에 손을 비비고/ 풀꽃 입술에 뺨을 대어라/ 사랑 그윽한 저 어머니의 눈빛/ 불빛 가득한 저 어머니의 표정/ 너무나 따뜻한 그 촉감에/
저절로 행복한 눈물 솟는다/ 풀꽃 여린 가슴에 얼굴 묻으면/ 번개 같은 기쁨이 내게로 온다.
--------- 졸시 ‘풀꽃 같은 어머니’
‘아명’은 공부를 잘 못하는 소년인 반면에, 그림에 대해서는 천재적인 소질을 지녔다. ‘아명’의 그러한 천재성은, ‘아명’이 뗏목을 저으며 건너 다니는 학교에 곽 선생이 새로 부임하면서 밝혀지기 시작한다. ‘아명’과 곽 선생의 첫 상면 또한 극적이다. 곽 선생은 학교에 도착하자, 곧바로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그리려고 들로 나간다. 그 곳에서 우연히 ‘아명’과 ‘아매’ 남매를 만나게 된다.
아매, “얘도 그림을 잘 그려요.”
곽 선생, “전문가겠구나.”
아명, “아니어요.”
곽 선생, “이 그림이 어떤지 말해 주겠니?”
아명, “괜찮아요. 이런 안개는 봄에만 생겨요.”
곽 선생, “마음에 들어?”
아명, “예.”
곽 선생, “가져라.”
아명, “정말이어요?”
곽 선생, “서명을 해 줄게. 20년 후, 박물관 쓰레기통에 있을 거다.”
(그림에 ‘바보’라고 서명을 한다.)
아명, “이름이 바보이어요?”
증산초등학교에 부임하여 미술반을 지도하게 되는 곽 선생. 첫 미술시간, 곽 선생은 ‘아명’의 미술에 대한 뛰어난 상상력을 발견하게 된다.
아명, “다 그렸어요. 나가 놀아도 돼요?”
곽 선생, “잠깐, 이게 무얼 그린 거지?”
아명, “아빠가 이야기해 주신 ‘달을 먹는 개인데요, 하늘이 깜깜해져서 우리가 북을 치니까, 개가 달을 뱉아 내어서 다시 밝아졌어요.”
‘아명’은 가난한 집 아이답지 않게 명랑할 뿐더러 말할 수 없는 개구쟁이이기도 하다. 학교 공부가 끝난 다음,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 매어 놓은 소의 얼굴에다가 흙칠을 하는 ‘아명’. 그 모습에서 불현듯 나는 화가 이중섭의 ‘소’ 그림을 연상한다. 화가는 모두 그런 공통점이 있는 것인지……. ‘아명’은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저 산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서 세계에 보여주고 싶다고.
어느 날부터인가, ‘아명’은 몸이 무겁고 피곤함을 느낀다. 그런 중에도 어머니 얼굴을 그리려는데, 그 모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아명’이 누나 ‘아매’와 나누는 이야기.
“누나는 엄마 모습이 생각나?”
“그럼.”
“난 꿈 속에서 만나지만, 깨어나면 잊혀져.”
“잊으면 안 돼. 엄마는 머리에 꽃을 꽂았고 아주 예쁘셔. 엄마는 아침이 되면 머리를 이렇게 뒤로 묶고, 빨래나 밥을 하셔. 그리고 네가 울면 이렇게 안고 흔드셔. 또 자다가 깨면 노래를 불러 주시지.”
물빛 아지랑이 속에/ 저 산도 흔들리네/ 먼 하늘도 출렁거리네/ 둥기둥
토닥임 속에 울음 끝은 잦아들고/ 둥기둥 속삭임 속에 온 세상은 둥싯거리네
/ 여기 물소리에 다시 깨어나서/ 하나 둘 눈을 비비는 꽃이여/ 오, 안긴
품 속에 봄빛이 가득하네/ 나비처럼 꿈 속을 날아가네.
------졸시 ‘안겨서 듣는 자장가’
결국, 며칠 후에 ‘아명’은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겨지고, 다시 소생하기는 하지만, 의사는 근심스런 표정을 짓는다.
“아명은 엄마처럼 간이 안 좋아요. 꼭 이렇게 되어야만 찾아오니, 참으로 힘이 들지요.”
드디어, 증산초등학교에서도 전국 미술대회에 참가할 대표를 선발하게 되었다. 미술반을 지도하는 곽 선생이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를 시작한다.
“각 학년별 대표를 말씀 드리지요. 1학년 두우룡, 2학년 진곤하, 3학년 오문흠, 4학년 고아명…….”
그러자, 서 주임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이 반대하여, 그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을 지닌 그 곳 향장(鄕長)의 아들을 그 대표로 선발한다. 그 일로 인해서 곽 선생은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곽 선생은 떠나면서 ‘아명’의 집에 들른다.
“난 떠난다. 왜 가는지는 묻지 마라. 이 크레파스는 네가 가져라. 그리고 네 그림은…… 기념으로 한 장만 서명을 해서 나에게 다오. 나처럼 ‘바보’라고 쓰지 말고 네 이름을 쓰거라.”
곽 선생이 떠난 후. 들판에 앉아서 붉은 산을 그리던 ‘아명’이 스르르 숨을 거둔다. 슬퍼하는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동네 사람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다음, 곽 선생이 ‘아명’에게 받아 간 그림을 국제미술공모전에 출품하여 1등의 영예를 얻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상장을 전달받는 자리. 전교생과 학부형들이 가득 모여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 대신으로 단 위에 올라선 ‘아매’는, 이제는 저 세상으로 가 버린 동생에 대하여 울먹이며 말한다.
“동생이 그린 그림은, 모두가 이상하게 여겼어요. 하지만 전 예뻤어요. 오늘 동생을 천재라고 칭송하셨지만, 상을 받기 전엔 곽 선생님만이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동생은 아주 큰 종이에 많은 색깔로 그려서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어했어요. 하지만 우린 못 봐요. 전세계 사람들은 이제 그의 그림을 못 봐요. 영원히.”
강가에 ‘아명’의 무덤이 만들어지고, 그 앞에서 ‘아명’의 그림들을 한 장 한 장 불사르는 ‘아매’. ‘달을 먹는 개’ 그림도, ‘살이 찐 돼지’ 그림도, 또 그토록 애를 태우며 기억해 내서 그린 ‘어머니 얼굴’ 그림도 모두 불 속에 던져져서 한 줌의 재가 된다. 그 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 ‘고석송’은 국제대회의 1등 상장마저 불 속으로 던져 넣는다.
아, 산천의 모습……. 그리고 들려 오는 ‘노빙화’의 노랫소리……. 줄거리는 다르지만, 소년 ‘아명’의 죽음에서, 어찌된 일인지, 나는 황순원(黃順元)의 작품인 ‘소나기’를 떠올린다.
“글세 말이지, 이번 아이는 꽤 여려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 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선 윤 초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세,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고…….”
‘아명’의 관 속에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넣어주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이 영화는 양립국(楊立國)이 감독하고, 황곤현․이숙정․우환이 주연을 맡은 대만 영화로, 1989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