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봉은사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서울 봉은사에서 김 재 황 흙먼지 가득 이는 이 속세 한복판에서 문들을 열어 주던 불심 같은 연못 앞뜰 귀 열린 떡갈나무가 고난사를 새깁니다. 때마다 종이 울고 북이 떨던 그 시절이 처마 끝에 목을 매어 흔들리는 풍경처럼 아픔만 한 입 머금고 향나무로 여윕니다. 따르지 못하는 걸음 남긴 그 체취 맡고 고운임이 붓을 잡던 선불당에 내려서면 잎 지는 상수리나무도 미륵불을 닮습니다.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10
서울 절두산 성지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서울 절두산 성지에서 김 재 황 누에가 고개 들고 일어서던 산봉우리 칼이 서릿발 머금어 피바람을 일으켰지 우직한 믿음 하나로 댕강 잘린 몇 목숨이-. 바람 안은 황포돛배 드나들던 양화나루 한강 물은 슬피 울며 아직 거기 흐르는가, 형장을 한 발 앞두고 주저앉은 그 바위. 말 없는 석각상은 입 열면 성가 부를 듯 하늘에 눈빛 머물러 바람으로 사는 혼불 꽃 같은 성녀 줄리아 이곳으로 다가선다.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9
한강을 바라보며/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한강을 바라보며 김 재 황 차디찬 물줄기가 흘러내려 숨을 트고 목울음을 한입 가득 새파랗게 열린 하늘 굽이친 소용돌이에 나룻배가 뜨고 있다. 끝없는 시름 자락 길고 길게 늘이고서 물비늘이 눈빛 반짝 이 가슴을 파고드나, 눈감은 민물조개도 자갈처럼 누워 있다. 슬픈 듯 갈대숲에 물바람만 여위는데 눈웃음이 맴을 돌자 새하얗게 질린 강물 저만큼 다리를 건너 옛 그림자 젖고 있다.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9
관악산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관악산에서 김 재 황 빠르고 힘찬 맥박이 산마루를 뛰어올라 굳어진 능선 아래 푸른 숲을 이뤄 놓고 낙타봉 얹힌 햇살을 주렴으로 엮고 있다. 메마른 땅을 밟아 꽃잎 버는 진달래야 뺨 붉은 그 소녀는 수줍음에 타는 마음 초승달 고운 임처럼 나를 반겨 맞는구나. 이마는 더워 오고 입술마저 트는 갈증 가파른 숨결 속에 이 하루도 어지러워 국기봉 시린 숨결로 깨워야 할 우리 삶.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9
경복궁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경복궁에서 김 재 황 양파를 까는 듯이 벗겨지는 먼동 속을 먹구름 가득 안고 바람 앞에 섧던 역사 이제는 날이 흐리면 쑤셔 오는 통증이여. 남쪽을 보고 앉은 근정전 그 무릎 아래 뭇발길에 차이어서 빛깔 푸른 피멍들이 감춰도 붉은 점 같은 속내 흉터 보인다. 조선왕조 오백 년을 수심 깊이 헤아리고 싸늘히 눈을 감는 후원 외진 연못 옆에 취로정 낡은 기둥만 하염없이 졸고 있네.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8
논산 신병훈련소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논산 신병훈련소에서 김 재 황 힘차게 구령 따라 연병장을 다져 간다, 발맞춤이 땅 구르니 입맞춤은 하늘 닿고 소매로 땀 냄새 흩는 훈련병의 구보 행렬. 몇 분의 휴식 동안 화랑 담배 입에 물면 눌러 쓴 철모의 끈에 땀방울은 대롱거려 고향 녘 환한 낮달이 눈웃음을 짓고 뜬다. 황산벌에 퍼져 가는 총검술의 기합 소리 무르팍이 깨진 만큼 높이 서는 국방이여 이 밤도 젊음의 별빛은 이마에서 빛나겠다.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8
용인 민속촌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용인 민속촌에서 김 재 황 남향으로 모여앉아 꿈을 꿰매는 초가들 한숨에 배부른 가난 부끄럽지 않았지만 앞마당 한 뼘 양지엔 숙인 꽃이 보입니다. 나른한 정자 옆을 줄달음쳐 흐르는 내 줄 이은 징검다리 물색 빌어 놓였으나 되도는 물레방아엔 긴 신음이 감깁니다. 멀찌감치 나앉아서 네 귀를 든 기와집들 서까래 울리는 호통 먼 메아리 불렀는데 이제는 토담 너머로 헛기침도 없습니다.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7
양평 용문사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양평 용문사에서 김 재 황 가벼운 차림으로 손을 털고 돌아서서 눈감은 고요 속에 바위처럼 굳어진 숲 잉잉잉 골을 울리는 산바람이 살아난다. 산새들 왔다 간 곳 달빛도 떠나간 자리 그늘진 땅바닥에 가랑잎만 쌓이는데 천년수 망보게 하고 숨어 사는 산사 한 채. 차가운 시름이야 봉우리에 잠재우고 숨죽인 마음으로 빈 가슴을 두드리면 졸졸졸 바위틈에서 물소리가 깨어난다.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7
울주 석남사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울주 석남사에서 김 재 황 길 잃은 마음들이 지친 날개 모두 접고 하늘로 다가서는 나무 밑으로 내리면 지금껏 참은 아픔도 외다리로 서게 된다. 머리칼 다 자르고 비단옷 모두 벗으니 어둠 밝힌 그 가슴에 지닌 촛불 떨리는데 저 멀리 달이 펼치는 춤사위를 보게 된다. 눈감고 앉은 숲에 작은 문을 열어놓고 뜨거운 몸뚱이가 돌부처를 닮아 갈 때 어둠만 깊은 못에서 붉은 연꽃 피게 된다.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6
임진강에서/ 김 재 황 [양구에서 서귀포까지] 편 임진강에서 김 재 황 물바람은 울먹이며 강가에서 서성대고 겉늙은 갈대꽃이 넋이 나가 흔들려도 포성에 멍든 역사는 침묵 속을 떠간다. 서러운 빗줄기를 한데 모아 섞던 강물 말 잃은 얼굴들은 바닥으로 잠기는데 세월은 등 푸른 꿈을 연어처럼 키운다. 짚으면 어지러운 굽이마다 목이 메고 내닫는 물길로는 풀지 못할 한이기에 나루터 빈 배 하나만 가슴속이 썩는다. (2011년) 오늘의 시조 2022.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