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에 대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 년 전에 이 땅에는 3명의 위대한 이들이 태어났다. 그들이 바로 싯다르타와 노자와 공자이다. 이미 나는 싯다르타와 공자에 대해서는 ‘숫시인 싯다르타’와 ‘씬쿠러, 콩쯔’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낸 바 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사람, ‘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면 ‘노자’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가 아주 적다. 우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중에서 ‘열전’(列傳) 제3권을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노자(老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耳)이며 자(字)는 담(聃)인데, 주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史)로 있었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머리를 갸우뚱할 게 분명하다. 성이 ‘이씨’라면 왜 ‘이자’(李子)라고 부르지 않고 ‘노자’(老子)라고 불렀을까. 물론 여기의 ‘자’(子)는 ‘선생님’이라는 존칭이다. 먼저 ‘사기정의’(史記正義)를 보면 ‘장군상’(張君相)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밝히고 있다.
“노자는 호(號)이지 이름이 아니다. ‘노’(老)는 ‘밝힌다’(考)라는 의미이고, ‘자’(子)는 ‘낳는다’(孶)라는 뜻이다. ‘모든 이치를 가르치고 밝힘으로써 성스러운 것을 낳아서 이룬다.’라는 뜻이다. 이에 ‘만물은 낳고 모든 사물을 잘 화합하게 하여 남김이 없게 한다.’라는 것이다.”
어쩐지 마음에 얼른 와 닿지 않는다. 억지를 쓰는 성싶은 느낌마저 든다. 그런가 하면 ‘갈현’(葛玄)의 도덕경(道德經) 서(序)에는 이런 내용이 씌어 있다.
“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흰 머리여서 ‘노자’라고 일컬었다.”
과연 그러하였을까. 동네의 아이를 놀리기 위해 그런 별명을 붙일 수는 있겠지만, 여러 사람에게 존경받는 그에게 그런 이유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는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또 한 사람, ‘고형’(高亨)은 이렇게 생각했다.
“노자의 원래 성은 ‘노’(老)였는데, 그 후에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음이 같은 ‘이’(李)로 되었다.”
그래도 나는 이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노자가 살았던 당시에 ‘노’(老)라는 성은 있었으나 ‘이’(李)라는 성은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전국책’(戰國策)에 처음으로 ‘이씨’ 성이 나타났다고 한다.
‘성’은 그렇다 치고, 이름은 왜 ‘이’(耳)이고 자(字)는 왜 ‘담’(聃)인가. 얼핏 보기에도 ‘귀’와 무슨 연관이 있는 듯싶기도 하다. 이에 대해 ‘사기정의’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담(聃)이란 ‘귀가 질펀하고 귓바퀴가 없다.’라는 뜻이다. ‘신선전’(神仙傳)에서 이르기를 ‘외자’(外字)를 ‘담’이라고 하였는데 생각건대 ‘자’(字)는 호(號)이다. 아마 노자의 귀가 질펀하고 귓바퀴가 없어서 ‘담’이라고 부른 것 같다.”
지금의 사전을 찾아보아도 ‘담’(聃)은 ‘귓바퀴가 없다.’ ‘사람 이름’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씨춘추’(呂氏春秋)의 ‘불이’(不二) 편을 보면 ‘노담’을 ‘노탐’(老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설문’(說文)을 보면 ‘탐은 귀가 크고 드리워졌다.’라고 씌어 있다. 이로 미루어서 노자의 귀는 크기는 하였겠으나 귓바퀴는 분명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앞에서 ‘사기정의’를 거론한 바 있는데, 그것에 인용된 ‘주도옥례’(朱韜玉禮)와 ‘신선전’(神仙傳)의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이’이며 자는 ‘백양’(白陽)이고 일명 ‘중이’(重耳)라고 하며 ‘외자’(外字)는 ‘담’이다.”
이로써 노자가 초나라 고현 곡인리 사람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는 성싶다. 여기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녹읍현(鹿邑縣) 동쪽을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노자는 주(周)나라에서 ‘수장실’(守藏室) 사(史)로 있었다고 했는데, ‘수장실의 사’라면 어떤 벼슬일까? ‘사’는 ‘사관’을 이르는 성싶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립도서관 사서직 직원이라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사’라는 게 ‘주하사’(柱下史)를 가리킨다고도 본다. 이는, 관직명으로, ‘사관’과 동일한 관직이라고 한다. 여하튼 노자는 문헌 자료와 도서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노자가 맡았던 관직이 주나라 왕실 국립도서관장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노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다. 노자는 높은 자리에 앉을 사람이 절대로 아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노자가 태어난 ‘초’(楚)나라와 ‘주’(周)나라를 동급으로 보면 안 된다. 주나라는 ‘왕’이 있는 나라이고, 초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임금(君)이 백성을 다스리는 나라이다. 노자가 살았던 ‘고현’은 원래 진나라 땅이었다. 그러나 춘추 말기인 기원전 479년에 초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그렇다면 노자는 진나라를 떠난 후에 언제부터 주나라 도읍지인 낙읍에서 벼슬자리에 앉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노래자(老萊子)도 역시 초나라 사람인데 15권의 저서를 지어 도가(道家)의 속뜻을 밝혔다.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체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사마천이 사기를 쓸 당시에 ‘노자가 혹시 노래자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느낌이 있다. 이런 느낌은 사기의 다음 기록으로 인해서 더욱 짙어지게 된다.
「공자가 죽은 지 129년이 되는 해에 주나라 태사(太史)인 담(儋)이 진(秦)나라 헌공(獻公)을 뵙고 “처음엔 진나라가 주나라와 합했다가, 합한 지 500년 만에 갈라지고, 갈라진 지 70년 뒤에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말한 기록이 역사에 보인다. 어떤 사람은 이 ‘담’이 ‘노자’라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은 ‘노자’가 아니라고 말하니, 정말 그가 ‘노자’인지 아닌지를 세상에선 아무도 모른다. 노자는 숨어 살았던 군자이다.」
이 기록은, 무엇보다 ‘공자가 죽은 지 129년’이란 문구부터 잘못되어 있다. 6국 연표로 따져 보면,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105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니 그 밖의 일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여러 학자도, ‘노자’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은 장자(莊子), 순자(荀子), 여씨춘추(呂氏春秋,) 한비자(韓非子), 전국책’(戰國策,) 등 전국시대부터 한(漢)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서로 일치하는 점이 아주 적다.’라고들 말한다. 어쨌든 중국 춘추시대에 ‘노자’라는 사람이 살았던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기에 사마천은 사기에, 누가 묻지도 않고 확실하지도 않은 그 후손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다.
「노자의 아들 이름은 ‘종’(宗)인데, 위(魏)나라 장군이 되어 단간(段干)에 봉읍(封邑)을 받았다. ‘종’의 아들은 ‘주’(注)이고 ‘주’의 아들은 ‘궁’(宮)이며, ‘궁’의 현손은 ‘가’(假)인데, ‘가’는 한(漢)나라 효문제(孝文帝)에게 벼슬하였다. ‘가’의 아들 ‘해’(解)가 교서왕(膠西王) ‘앙’(卬)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므로, 그때부터 제나라에 살았다.」
그리고 노자가 이 유명한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을 썼다는 것도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 책은 처음에 그저 ‘노자’(老子)라고 불렀던 듯싶다. 그러므로 ‘노자’라고 하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가 지은 책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당시, 노자는 주나라 왕실의 쇠퇴함을 예견하여 ‘수장실 사관’의 직책을 사임하고 떠나던 중에 관소 수문장의 부탁으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이 사마천의 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노자는 도덕을 닦았다. 그의 학문은 ‘스스로 재능을 숨김으로써 이름이 드러나지 않기’를 힘썼다. 오랫동안 주나라에 살았는데, 주나라가 쇠퇴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주나라를 떠나기로 했다.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간절히 청했다.
“선생께서 이제 은둔하려고 하신다니 저를 위해 부디 가르침을 남겨 주십시오.”
그래서 노자는, 상편과 하편의 글을 지어서 도와 덕의 뜻을 말한 오천여 글자를 남기고 함곡관을 나섰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면 도대체 ‘함곡관’은 어디인가? 기록에 의하면, ‘산관’(散關)을 일명 ‘함곡관’이라고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곳은 다른 곳인 듯싶다. 다른 기록을 보면, ‘산관’은 기주(岐州) 진창현(陳倉縣)에서 남동쪽으로 52리 떨어진 곳에 있고, ‘함곡관’은 섬주(陝州) 도림현(桃林縣) 남서쪽으로 12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즉, ‘산관’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보계(寶鷄) 남서쪽에 있고, ‘함곡관’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영보(靈寶) 동북쪽에 있다.
그렇다면 관령 윤희는 어떤 사람인가? 기록마다 그 내용이 다르다. 성이 ‘관’(關)이고 이름이 ‘윤’(尹)이라고 하기도 하며, 호가 ‘관윤’(關尹)이고 이름이 ‘희’(喜)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관령’(關令)을 ‘관리’라고 하거나 ‘관령윤’(關令尹)을 ‘관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성은 ‘관’(關)이고 자는 ‘윤’(尹)이며 이름이 ‘희’(喜)라고도 한다. 그렇기에 ‘관령 윤희’는 주나라 대부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관령’을 ‘관을 지키는 책임자’, 즉 ‘관의 수문장’으로 생각한다.
그 이름이야 어떠하든지, 노자는 여기에서 ‘오천여 글자’를 남겼다. 이 책이 중국 역사상 가장 우수한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노자’이다. 이 ‘노자’를 지금 우리는 ‘노자도덕경’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고 있다.
이 책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의 손에 의해 필사되었고 그때마다 조금씩 그 내용이 바뀌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위진시대(魏晋時代)부터 당(唐)나라에 걸쳐서 수많은 ‘노자’의 주석(注釋)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노자가 그만큼 숭상되었기 때문이다. 당나라 초기의 육덕명(陸德明)이 저술한 ‘경전석문서록’(經典釋文敍錄)에 기록된 주석만도 31가(三十一家)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후세까지 전하여서 후대 사람들에 의하여 별로 개정이나 보정이 없는 주석본으로, 왕필주본(王弼注本)과 하상공주본(河上公注本)이 가장 유명하다. 이 두 주석본은,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원전(原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상공’은, 한문제(漢文帝) 때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아무래도 실존한 인물은 아닐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왕필’은 실존한 인물이 확실하다. 그는 삼국지에 나오는 위(魏)나라 사람이다. 24세에 요절한(기원후 226~249년) 이 천재는, 역(易)과 노자(老子)의 주석을 남겼다. 왕필의 가문은 대대로 장서가(藏書家)로 알려졌다. 이 책은 상편과 하편으로 나뉘어 있으나 분장만은 원래 81장이 아니었을 성싶다.
이 책에 대한 한초(漢初)의 일반적인 호칭은 ‘노자서’(老子書)만으로 되어 있었다는데, 왕필본이나 하상공본을 모두 ‘노자도덕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로 미루어서 그 이전에 이미 ‘노자도덕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던 듯싶다. 일설에는, 전한(前漢)의 경제(景帝: 기원전 157년~기원전 141년)가 노자를 숭상하여 유학의 경전에서와 같이 ‘경’(經)이라는 글자를 붙였다고 한다. 실제로 ‘경’이라고 함은 주석인 ‘전’(傳)에 대하여 ‘본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학자라면 누구나, 노자가 쓴 원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내용의 책을 만나고 싶을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백서노자’(帛書老子)가 발견되었다. 즉, 1973년 12월, 중국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에 있는 한대(漢代)의 고분(古墳:기원전 168년에 묻힌 것)에서 다른 수많은 서적과 함께 ‘백서’가 출토되었다. 이는, 비단폭(絹布)에 씌어 있었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불렸다. 편의상 갑(甲)과 을(乙)로 되어 있는 두 권의 책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먼저 것은 소전〔小篆: 진(秦)의 이사(李斯)가 처음 만든 글자라고 함〕에 유사한 문자로 씌어 있었고, 뒤에 있는 것은 한대(漢代) 통용의 문자인 예서(隸書)로 기술되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두 가지 다 분장(分章)되지 않은 채로 씌어 있었으며, 현행본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상편과 하편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고 부분적으로 현행본 장(章)의 순서와 다소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이 발견은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 마당에 이번에는 죽간(竹簡)이 발견되었다. 즉, 1993년, 호북성(湖北省) 형문(荊門) 곽점(郭店) 분묘에서 ‘죽간’이 출토되었다. 그 양은 현재 우리가 보는 ‘노자’의 5분지 2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는 적어도 기원전 300년 이전으로 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학자들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2009년에는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이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나라 시대 전후의 ‘죽간’(竹簡, 竹書)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2009년 11월 6일, 베이징(北京)대학교는 ‘2009년 초에 해외에서 돌려받은 서한시대 죽간’의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선진(先秦)과 진한(秦漢) 역사 및 고대 사상사와 자연과학사 등 여러 분야의 연구서들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때 발견된 죽간은 모두 3300여 매로 현재까지 발견된 춘추전국시대와 진한시대의 고서류 죽간 가운데 수량이 가장 많은 데다 훼손된 흔적이 전혀 없이 먹의 색깔이 검고 빛이 날 정도로 또렷이 확인되는 등 보전상태가 아주 뛰어나다고 한다. 또한, 죽간에 씌어 있는 글자도 최소한 일여덟 종류의 서로 다른 특징을 갖춘 서풍(書風, 書法)이 확인되었다고 전한다.
죽간 중에는 나라의 통일이 이루어진 뒤에 진나라 승상 이사(李斯)가 진시황제에게 ‘진나라와 일치하지 않는 문자의 폐기’를 청하면서 지은 ‘창힐편’(蒼詰篇)이 포함되어 있었고, 더군다나 그 내용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사’는 ‘창힐편’에서 “창힐은 글자를 만들어서 후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였다.”라고 적었다. ‘창힐편’은, 송대 이후에 유실되었는데, 왕국유(王國維) 등의 저작 등을 통해 일부 내용이 전해지고 있었을 뿐이고 완전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2009년에 발견된 죽간본 창일편은, 1200여 개의 완전한 문자가 보존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대부분이 처음 발견된 내용이라고 한다.
2009년에 발견된 죽간 가운데 가장 시선을 끄는 문헌은 당연히 ‘노자’(老子)였다. 이 노자야말로, ‘마왕퇴 백서’와 ‘곽점 죽간’에 이어서 3번째 ‘노자 고서’로, 지금까지 가장 안전하게 보존된 한나라 시대의 고서이다.
공자와 노자는 같은 시대 사람이다. 모두 알고 있듯이, 노자가 공자보다 연배이다. 그러면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있는가? 물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공자가 주나라로 와서 노자에게 예(禮)에 관하여 물으려고 하자, 노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옛 성인들도 지금은 모두 뼈다귀까지 썩고 그들의 ‘말’만 남았을 뿐이다. 군자가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게 되지만, 때를 얻지 못하면 떠돌아다니게 되는 법이다.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감추어 겉으로는 초라하게 보이고, 군자는 풍성한 덕을 지녔으면서도 그 겉모습이 어리석게 보인다.’라고 들었다. 그대는 교만과 욕심 그 자세와 바르지 못한 생각을 다 버려라.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그것뿐이다.”
공자가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새가 날고 고기가 헤엄치며 짐승이 달린다는 정도는 내가 알고 있다. 달리는 것은 그물을 쳐서 잡고 헤엄치는 것은 주살로 쏘아 잡으면 된다. 그러나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고 하니, 나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정말 용 같은 사람이다.」
공자는, 몇 살이 되었을 때 노자를 만났을까? 내가 여러 기록을 찾아본 바로는 47세 때였다고 여겨진다.
주나라에 가서, 공자는 ‘노담’에게 ‘예’(禮)를 묻고, ‘장홍’(萇弘)에게 ‘악’(樂)을 물었다. 그리고 ‘교사’(郊社)가 있는 곳을 지나서 ‘명당’(明堂)의 제도를 상고하였으며 종묘의 조정 법도까지 세밀히 살펴보았다. 앞에서 ‘장홍’은 주나라 ‘경왕’(敬王)의 대부이다. 그리고 ‘교사’는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을 이르며, ‘명당’은 ‘천자의 궁궐’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보기를 다하자, 공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비로소 주공의 착하심과 주나라가 천하에 왕 노릇을 한 까닭을 알겠구나!”
그러면 공자와 노자가 만나는 장면은 어떠하였을까? 사마천의 사기에서처럼 노자는 공자에게 하대하며 함부로 대했을 리는 만무하다. 노자는 강함을 싫어하고 약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는 더할 수 없이 공자를 공손하게 대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그려 본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그 당시의 예법에 따라서 공자는 노자에게 기러기 한 마리를 예물로 전했다. 며칠이 지난 후, 공자는 주나라를 떠나서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노자는 공자와 작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귀한 자는 사람을 보낼 때 재물을 주고, 어진 자는 사람을 보낼 때 말(言)을 준다고 들었소. 나는 부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재물을 줄 수는 없고, 어진 사람이라는 이름이나 빌어서 그대를 보내는 데에 몇 마디 말을 주려고 하오. 대체 오늘날 소위 선비란 자를 보면 총명하고 세밀한 체하면서 죽을 곳을 피할 줄도 모르니, 이는 남을 비평하고 책망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오. 지식도 넓고 말도 잘하면서 그 몸을 위태롭게 하니, 이것은 남의 약한 점을 잘 끄집어내기 때문이오. 이러한 자는 자기 몸이 있어도 남의 자식 노릇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며, 자기 몸이 있어도 남의 신하 노릇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오.”
“공경하여 가르치신 대로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공자는 대답하고 노나라로 돌아왔다. 그런 후에도 공자는 노자의 말이 귀에 쟁쟁하여 좀처럼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글: 김 재 황)
'노자, 그리고 나무 찾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장, 낫다는 것을 높이지 않으면(역: 녹시 김 재 황) (0) | 2022.02.07 |
---|---|
제2장,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줄로(역: 녹시 김 재 황) (0) | 2022.02.06 |
제1장, 길을 길이라고 하면(역: 녹시 김 재 황) (0) | 2022.02.06 |
책머리에/ 김 재 황 (0) | 2022.01.30 |
연재에 들어가며/ 김 재 황 (0) | 2022.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