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악기론

제2절, '악'이란 소리의 말미암은(역: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11. 18:29

제2절 '악'이란 소리의 말미암은

 樂者 音之所由生也 其本 在人心之感於物也. 是故 其哀心感者 其聲噍以殺, 其樂心感者 其聲嘽以緩, 其喜心感者 其聲發以散, 其怒心感者 其聲粗以厲, 其敬心感者 其聲直以廉, 其愛心感者 其聲和以柔. 六者非性也 感於物而后動. 是故 先王 愼所以感之者. 故 禮以道其志 樂以和其聲 政以一其行 刑以防其姦 禮樂刑政 其極一也 所以同民心而出治道也(악자 음지소유생야 기본 재인심지감어물야 시고 기애심감자 기성초이쇄 기악심감자 기성천이완 기희심감자 기성발이산 기노심감자 기성추이려 기경심감자 기성직이렴 기애심감자 기성화이유 육자비성야 감어물이후동 시고 선왕 신소이감지자 고 례이도기지 락이화기성 정이일기행 형이방기간 예락형정 기극일야 소이동민심이출치도야).  

  ‘악’(음악)이란 소리의 말미암은 바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뿌리는 물건에 느끼는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렇기에 그 슬픈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소리 울림이 낮고 여림으로써 메마르며, 그 즐거운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소리 울림이 느리고 느슨함으로써 한가로우며, 그 기쁜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소리 울림이 빠르고 흩어짐으로써 높이 올라가며, 그 노여운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소리 울림이 거칠고 사나움으로써 멀리하며, 그 삼가서 높이는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소리 울림이 맑음으로써 똑바르며, 그 아끼는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소리 울림이 부드러움으로써 고르고 따뜻하다. 이 6가지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이 아니고, 물건에 느낀 다음에 움직임이다. 이런 까닭에 선대의 임금은 마음에 느끼는 것을 삼가서 조심하였다. 그러므로 ‘예’(예절)에 따라 그 뜻을 이끌었고 ‘악’(음악)에 따라 그 소리 울림을 누그러뜨렸으며, ‘정’(정사)에 따라 그 걸음을 하나로 했고 그 ‘형’(벌함)에 따라 그 속이고 훔침을 막았다. ‘예’ ‘악’ ‘정’ ‘형’ 등은 그 ‘극’(극점)이 하나이다. 백성의 마음을 같게 하는 까닭은 길을 다스리기(치평의 길) 위해서이다. (녹시 역)

 ‘시조’의 경우- <‘시조 내용’이란 음률의 말미암은 바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뿌리는 물건에 느끼는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슬픈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내재율이 느리고 느슨함으로써 한가로우며, 그 기쁜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내재율이 빠르고 흩어짐으로써 높이 올라가며, 그 노여운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내재율이 거칠고 사나움으로써 멀리하며, 그 삼가서 높이는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내재율이 맑음으로써 똑바르며, 그 아끼는 마음이 느끼는 것은 그 내재율이 부드러움으로써 고르고 따뜻하다. 이 6가지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이 아니고, 시적 소재에 느낀 다음에 움직임이다. 이런 까닭에 선대의 사람들은 마음에 느끼는 것을 삼가서 조심하였다. 그러므로 ‘시조 형식’에 따라 그 뜻을 이끌었고 ‘시조 내용에 따라 그 내재율을 누그러뜨렸으며, ‘시심’에 따라 그 걸음을 하나로 했고 그 ‘격조’에 따라 그 속이고 훔침을 막았다. ‘시조 내용’ ‘시조 형식’ ‘시심’(詩心) ‘격조’(格調) 등은 그 ‘극’(극점)이 하나이다. 사람의 마음을 같게 하는 까닭은 길을 다스리기 위해서이다.> 

 [녹시 생각]
 처음에 시조는 ‘창’(唱: 노래)으로 시작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시조가 시작되던 그 당시에는 ‘적을 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노래로 구전(口傳)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내용을 글로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시조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작가가 애매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시조창(時調唱)에는 ‘경’(境)이란 것이 있다. ‘경’이란 무엇인가. ‘경’은 ‘경우’나 ‘형편’을 나타낸다. 즉, ‘동산일출’(東山日出: 동쪽 산에 해가 뜬다.)이라든지 ‘평사낙안’(平沙落雁: 모래펄에 날아와서 앉은 기러기)이라든지 ‘주마축지’(走馬蹴地: 달리는 말이 두 뒷발의 굽으로 땅을 차다.)라든지 ‘경조탁사’(驚鳥啄蛇: 놀란 새가 뱀을 쫀다.)라든지, 아무튼 우리 시조의 종장에는 이런 ‘경’(境)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우리 시조의 종장에도 ‘경’(境: 경우나 형편)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시조 한 수 한 수는 시 정신의 뿌리가 그 ‘경’이른 것에 가서 닿아야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희’(喜: 기쁨이나 즐거움)이거나 ‘비’(悲: 슬픔이나 비애)이거나 ‘낙’(樂: 즐기거나 즐겁게 하다.)이거나 ‘환’(歡: 기뻐하거나 기쁘게 하다.)이거나 ‘적’(寂: 고요하다거나 쓸쓸함)이거나 ‘고’(孤: 외로움)이거나 ‘멸’(滅: 다하거나 끊어짐)이거나 ‘근’(近: 가깝거나 친하거나 속되다.)이거나 ‘원’(遠: 멀거나 깊거나 길다.)이거나 ‘직’(直: 곧거나 바로잡다.)이거나 ‘우’(迂: 돌거나 굽거나 굽히다.)이거나 ‘묘’(妙: 묘하거나 뛰어나다.)이거나 ‘현’(玄: 깊거나 고요함) 등에 시 정신의 뿌리가 반드시 닿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