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절 이르러 무릇 ‘예’와 ‘악’의 하늘에
及夫禮樂之極乎天而蟠乎地 行乎陰陽而通乎鬼神 窮高極遠而測深厚 樂著大始而禮居成物 著不息者天也 著不動者地也 一動一靜者天地地間也 故聖人曰禮樂云(급부례락지극호천이반호지 행호음양이통호귀신 궁고극원이측심후 락저대시이례거성물 저불식자천야 저불동자지야 일동일정자천지지간야 고성인왈례악운).
이르러 무릇 ‘예’와 ‘악’의 하늘에 다하고 땅에 모이며 ‘음’과 ‘양’에 행하여 ‘귀신’에 서로 감동하는데, 높음을 멈추고 멀리함을 다해서 깊음과 두터움을 끝까지 헤아린다. ‘악’은 ‘천지의 원시’(大始)를 나타내고 이어서 ‘예’는 외물 이룸을 본으로 삼아 따른다. 나타나서 쉬지 않는 것은 하늘이요 나타나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이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한 것은 하늘과 땅의 사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기를 ‘예악’이라고 이른다. (녹시 역)
‘시조’의 경우- <이르러 무릇 ‘시조 형식’과 ‘시조 내용’의 하늘에 다하고 땅에 모이며 ‘음’과 ‘양’에 행하여 ‘주재자’에 서로 감동하는데, 높음을 멈추고 멀리함을 다해서 깊음과 두터움을 끝까지 헤아린다. ‘시조 내용’은 ‘천지의 원시’(大始)를 나타내고 이어서 ‘시조 형식’은 외적 소재 이룸을 본으로 삼아 따른다. 나타나서 쉬지 않는 것은 하늘이요 나타나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이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한 것은 하늘과 땅의 사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이’가 말하기를 ‘시조의 형식과 시조의 내용’이라고 이른다.>
{녹시 생각}
이 절은 ‘예악’의 공효(功效)를 논술하고 있다. 시조도 ‘시조 형식’과 ‘시조 내용’을 되새기게 한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한 것은 하늘과 땅 사이다.’라는 구절이다. 하늘과 땅 사이?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노자의 ‘도경과 덕경’을 다시 본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다언삭궁 불여수중)[제5장].
이는,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로써 ‘말린 풀 강아지’를 삼고 ‘거룩한 이’는 어질지 않아서 ‘모든 사람’으로써 ‘말린 풀 강아지’를 삼는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비슷하다고 할까. 텅 비어 있는데 다함이 없고 움직이는 데 더함이 나타난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게 되니 마음을 지키느니만 못하다.‘>라는 뜻이다.
이 글에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라고 되어 있다. 곧 ‘바람’이 생각난다. ‘바람’이란 ‘불어오는 바람’을 나타낼 수 있고, ‘마음으로 바라는 바람’도 가리킬 수 있다. 어쨌든 이 두 ‘바람’ 모두가 하늘과 땅의 어울림으로 향한다. ‘음’과 ‘양’의 조화가 여기에 있고,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신비로움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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