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악기론

제34절, '청명'은 하늘을 본받았고(역: 녹시 김 재 황)

시조시인 2022. 3. 22. 12:44

제34절 ‘청명’은 하늘을 본받았고

 是故淸明象天 廣大象地 終始象四時 周還象風雨. 五色成文而不亂 八風從律而不姦 百度得數而有常 小大相成 終始相生 倡和淸濁 迭相爲經 故樂行而倫淸 耳目聰明 血氣和平 移風易俗 天下皆寧(시고청명상천 광대상지 종시상사시 주환상풍우 오색성문이불란 팔풍종율이불간 백도득수이유상 소대상성 종시상생 창화청탁 질상위경 고악행이륜청 이목총명 혈기화평 이풍역속 천하개녕). 

 이렇기에 ‘청명’(사람의 노래 소리)은 하늘을 본받았고 ‘광대’(종이나 북의 소리)는 땅을 본받았다. 또, ‘종시’(5음의 마지막과 처음)는 ‘4시’(춘하추동)를 본받았고 ‘주환’(춤추는 사람이 빙글빙글 도는 것)은 바람과 비를 본받았다. 5가지 빛깔(5가지 소리)이 ‘문’(문리. 문채)을 이루어서 얽히지 않고 8가지 바람(8가지 소리)이 가락을 좇아서 어지럽지 않으며, ‘백도’(많은 절조)가 ‘수’(도수)를 얻어서 ‘상’(정해진 것)이 있다. 작고 큰 것이 서로 이루고(성취하고) 마지막과 처음이 서로 나서 ‘창화’(먼저 발하는 음조를 ‘창’이라고 하며, ‘창’에 응하는 음조를 ‘화’라고 함)와 ‘청탁’(청성과 탁성)이 서로 번갈아들어서 ‘경’(‘常’ 또는 ‘主’)이 된다. 그렇기에 ‘악’(음악)이 행해져서 ‘륜청’(인류의 청명)이 되고 귀와 눈이 ‘총명’(오랫동안 기억하는 힘)이 되며 피의 기운이 ‘화평’(기쁘고 평안함)하게 되며, ‘이풍역속’(풍속을 바꿔서 세상을 좋게 함)하여 온 세상이 모두 평안해진다. (녹시 역)

 ‘시조’의 경우- <이렇기에 ‘청명’(읊는 내용)은 하늘을 본받았고 ‘광대’(보이는 형식)는 땅을 본받았다. 또, ‘종시’(마지막과 처음)는 ‘4시’(춘하추동)를 본받았고 ‘주환’(휘청거리는 멋)은 바람과 비를 본받았다. 5가지 빛깔(5가지 소리)이 ‘문’(꾸밈)을 이루어서 얽히지 않고 8가지 바람이 음률을 좇아서 어지럽지 않으며, ‘백도’(많은 절조)가 ‘수’(도수)를 얻어서 ‘상’(정해진 것)이 있다. 작고 큰 것이 서로 이루고(성취하고) 마지막과 처음이 서로 나서 ‘창화’(먼저 발하는 음조를 ‘창’이라고 하며, ‘창’에 응하는 음조를 ‘화’라고 함)와 ‘청탁’(청성과 탁성)이 서로 번갈아들어서 ‘경’(境: 경우나 형편)이 된다. 그렇기에 ‘시조 내용’이 행해져서 ‘륜청’(인류의 청명)이 되고 귀와 눈이 ‘총명’(오랫동안 기억하는 힘)이 되며 피의 기운이 ‘화평’(기쁘고 평안함)하게 되며, ‘이풍역속’(풍속을 바꿔서 세상을 좋게 함)하여 온 세상이 모두 평안해진다.>

[녹시 생각]
 이 절에서는 군자가 제정한 ‘정악’이 ‘천지’를 본뜬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 결과도 밝혀져 있다. 시조 또한 하늘과 땅을 벗어나 있지 않다. 그렇기에 ‘목숨’을 지니고, ‘목숨’을 지녔기에 펄떡펄떡 살아 움직인다. 이미 ‘죽어 있는 작품’을 아무리 읽어 보았자, 무슨 감동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엔트로피’(entropy)라는 말이 있다. 이는,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물은 역사를 하향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향’(down ward)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나타낸다. 그런데 ‘물의 역사’에 대항하는 ‘반역’이 있다. 아래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오르는 잉어 한 마리! 이는, ‘위대한 반역’이다. 이렇듯 ‘생명’은 ‘흐름의 역사에 대한 반역’을 감행한다. 참으로 통쾌하다. 여기에서 ‘힘’으 느낀다. 이게 바로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다음은, 고전 ‘중용’(中庸)에 들어 있는 한 구절이다.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시운 ‘연비려천 어약우연’). 이는, <시는 말한다. ‘솔개는 치솟아서 하늘에 다다르고 잉어는 연못에서 뛰어오른다.’>이다. ‘시운’이 붙어 있으니 ‘시경’에 들어 있는 노래(시경의 대아 ‘한록편’)가 분분명하다. 이 시구에서 역동성을 느끼고, 여기에서 ‘엘랑비탈’(elan vital)을 발견한다. ‘엘랑비탈’은, 이러한 ‘동적 과정의 내적 충동력’을 가리키는 성싶다. 즉, ‘우주의 창조적 진화’를 상징한다고도 한다. 이게 이른바 ‘생명의 본 모습’일 터이다. 사전적 풀이를 보면, ‘엘랑비탈’은 ‘생명 그 자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항상 새로운 자기를 형성해 가는 창조적인 진화’라고 되어 있다. 그렇기에 ‘엘랑비탈’은 진화를 창조해 내는 일종의 충동이며 노력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