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녹색 세상] 편
임진각에서
김 재 황
돌아서 가는 그대 그 이름 부르는 소리
산 넘고 골을 질러 바람을 몰고 떠나면
통일로 막다른 곳에 동동걸음 남는다.
고향을 바라보면 눈만 더욱 흐려 오고
쑤시는 삭신이야 빈 수수깡으로 서서
망배단 힘껏 껴안은 채, 가슴앓이 삭힌다.
아침을 여는 그대 큰절을 올리는 자리
녹 짙은 철길에 올라 마음 먼저 달리는데
무정한 자유의다리는 물거울만 집는다.
(2002년)
(시작 노트)
임진각은 서울 시청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54㎞의 거리이다. 그리고 휴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7㎞ 지점에 있다. 나는 고향을 찾을 때면 임진각을 들르곤 한다. 이곳에는,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리기 전에 저 북쪽 신의주까지 연결되었던, 철교가 끊어져 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고 쓴 팻말 앞에 멍하니 멈추어 선 그때 그 기관차가 분단의 아픔을 더해 준다.
망배단 앞에 서면, 실향민이 아니라도, 모두 머리를 숙이게 된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눈을 감고 기원한다. 이 망배단 뒤편에는 ‘자유의다리’가 놓여 있다. 1953년, 한국전쟁 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서 귀환하였다 하여 그 이름이 생겼다.
전쟁 전의 경의선 철교는 상행과 하행의 두 교량이 건설되어 있었으나, 전쟁 때에 폭격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그 후, 전쟁포로를 데려오기 위하여 서쪽 교각 위에 철교를 복구하였고, 그 남쪽 끝에 임시교량을 가설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포로들은 차를 타고 그 앞까지 온 다음, 걸어서 ‘자유의다리’를 건너왔다.
이 ‘자유의다리’를 건너면 판문점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그 동쪽으로 자유로와 연결하여 새로운 길이 열렸다. 알려진 대로, 1951년 10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유엔군과 공산군 간의 휴전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그때의 휴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이는 역사상 가장 긴 휴전이다. 최초의 회담이, 4채의 초가집이 있던 ‘널문’(板門)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판문점 회담’이라고 명명되었다.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