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옷을 걸친 서어나무
김 재 황
사람은 누구나 자연에 안기기를 좋아한다. 봄이면 꽃을 찾아서 취하고, 가을이면 단풍을 만나서 젖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서 마구 산과 들을 황폐하게 만든다. 마지막 안식처인 자연을 잃는다면, 과연 어디에서 병든 우리 영혼을 위안받고 치료받을 수 있겠는가.
자연은 언제나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머니요, 자상하게 진리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나는 일요일이면 가끔 산을 오르는데, 그 때마다 ‘서어나무’를 만나는 기쁨에 발걸음이 마냥 가볍다. 내가 이렇게 그와 교류를 가진 지도 꽤 오래 되었건만, 그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은자(隱者)처럼.
옛날의 은자들은 저잣거리에도 많이 숨었다. 시은(市隱) 한순계(韓舜繼) 선생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선생의 자는 인숙(仁淑)으로 선조 때의 사람이다. 그는 어머니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모셨는데, 맛있는 음식을 드리지 못하여 걱정하다가 구리를 부어서 그릇을 만들어 팔았다. 한 번은 구리를 사다가 그릇을 만들고 있었는데 화로에서 번쩍이기에 자세히 보니 황금이었다. 그는 즉시 그릇 만드는 일을 중지하고 그 금을 모두 거두어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선생은 삼년 동안이나 소금과 채소를 먹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화로와 풀무 및 쇠틀 등을 죄다 버리고 다시는 장사를 하러 저자에 나가지 않았다.
선생은 나이 쉰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몸을 깨끗하게 씻고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는데, 붉은 기운이 사흘 동안이나 방 안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과 죽음인가. 이 모두가 욕심을 버리고 본분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거친 땅 마른자리 안고 사는 가슴으로
겨우내 추위 참아 두루마기 걸쳐 입고
말없이 산을 오르는 회색 옷의 은자여.
풀리는 숨결마다 꿈이 먼저 피어나도
잔잔한 설렘 안에 번져 오는 수군거림
그대의 마음 한 자락 어찌 그리 여린가.
흔드는 바람 따라 눕는 몸은 한가로워
흰 구름 바라보는 사색만이 눈을 뜨나
춤추듯 열린 자유를 운으로나 맞으리.
---졸시 ‘서어나무’
서어나무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일명 ‘서나무’(西木)라고도 하며, 한명(漢名)으로는 ‘견풍건’(見風乾)이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나무껍질이 회색(灰色)을 띠고 있기에 잿빛 옷을 입고 산으로 오르는 은자를 생각하게 한다.
봄에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을 보면, 수꽃은 한 개씩 아래쪽에 늘어지고 암꽃은 두 개씩 위쪽에 늘어져 있다. 그 때문에 정겹고도 소박한 그 꿈이 바람에 한가롭게 흔들린다. 게다가 새로 돋아나는 잎이 진한 분홍으로 수줍음을 가득 머금고 있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더없이 천진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서어나무는 그 줄기가 회색인데, 그 표면이 올록볼록하여 힘찬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그 목리(木理)가 치밀하고 단단하여 잘 갈라지지 않으므로, ‘건축재’ ‘기구재’ ‘농기구 자루’ ‘기계재’ ‘차량재’ ‘인목(印木)’ 등으로 쓰였다. 특히 요즘에는 표고버섯의 원목(原木)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이 나무는 서울을 포함한 중부지방에서 참나무들과 함께 흔히 만날 수 있는데, 그 종류로는 ‘서어나무’를 비롯하여 ‘개서어너무’‘까치박달’‘소사나무’ 등이 있다. 이들은 나무의 잎으로 구별한다. 즉, 잎의 꼬리 끝이 꼬리처럼 길고 표면에 털이 없다면 ‘서어나무’이다. 그러나 잎의 끝이 차츰 뾰족해지고 잎의 표면에 털이 있으면 ‘개서어나무’로 보면 된다. 까치박달은 그 이름부터가 이색적이다. 그 줄기가 회갈색이고 매끈하며 동그란 숨구멍을 보인다. ‘서어나무’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박달나무 종류가 아니라 ‘서어나무’ 종류에 든다. 잎은 긴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를 지닌다. 그리고 소사나무는 서어나무 종류 중에서 가장 작은 잎을 달고 있다. 분재로 많이 가꾸는 수종이다.
서어나무는 추위를 참는 힘이 크다. 그런 반면에 공해에는 약하다. 이 또한 가난함을 즐겨 견디면서도 세속에는 머물지 못하는 현인(賢人)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도 서어나무는 자유로운 모습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고 맥(脈)이 뚜렷한 잎을 흔들며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