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시조문학 입문기

시조시인 2005. 9. 21. 08:00
나의 시조문학 입문기

김 재 황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짓기의 소질은 있었던 듯싶다. 그러나 문학에 빠져들기는 중학교 시절인데, 그 당시에는 소월의 시를 읽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시인들의 작품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많은 습작을 했다. 물론, 자유시 쪽이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이성선 형과 함께 자유시를 공부했다.

내가 ‘시조’와 만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군대에 복무할 당시에 나는, 시조시인으로 이미 등단한 배태인 형과 함께 있었다. 국방대학원에서였는데, 그는 나에게 ‘시조’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하지만 제대를 하고 직업전선에 나서게 되면서, 문학의 꿈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농촌지도사에서 중앙일보사 농림직 간부사원으로 전직을 하였으나, 여전히 격무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잠간 쉴 때에 동아출판사에서 아동문고의 편집 일을 보게 되었다. 그 곳에서 시조시인인 김월한 님과 유문동 님을 만났다. 또 시조시인 이은방 님과 자리를 함께 하는 기회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시조’의 길로 들어선 계기였다.

그 때가 1977년으로 기억된다. ‘시조’랍시고 몇 편을 끼적거려 보았는데 어디에 내놓기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 때 ‘샘터’라는 잡지에 ‘시조 독자란’이 개설되어 있었다. 나는 ‘까치놀’이란 시조작품을 아내의 이름으로 투고하였다. 그런데 그게 그 해 3월호에 실리게 되었다.




몸으로 종을 울려 맺고 풀던 그 참사랑

한 줌 잔영이 남아 은비늘로 박혀 들면

하늘귀, 바다에 열고 회심곡을 듣는 자리.

―― 졸시 ‘까치놀’ 전문




그 작품의 평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나라 설화(說話)와 한(恨)을 묶어서 서로 매듭짓고 있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쯤의 솜씨라면 기성시단에 발을 들여놔도 손색이 없겠다. 그러나 솜씨만 믿고 시를 날려 쓴 짐작이 들어 서운하다.(李根培)―

나는 비로소 용기를 얻었다. 더욱 노력하면 되겠다고 여겼다. 시조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해도 저물어 가고 ‘신춘문예’의 계절이 왔다. 나도 예외 없이 그 병이 들었다. 나는 만용을 부렸다. 제대로 익지도 않을 작품을 가지고 대한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오라기’란 작품이 최종심에 올랐다. 심사평은 대략으로 이러했다.

―選者에게 돌아온 가벼운 篇數의 작품을 놓고 무거운 마음으로 ‘散調’(이태원), ‘蓮’(李玉仁), ‘해오라기’(김재황), ‘因緣’(이봉학), ‘무궁화’(李江心) 5편을 골라잡았다. 5편 중에서 李江心은 아무래도 좀 처진다는 점에서, 김재황은 좀 말때움질을 면치 못했다는 점에서 제외되었다.(鄭椀永)―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있었으나, 그 동안 기울인 내 노력에 비하면 최종심에 오른 것만도 과분한 일이었다. 더욱 열심히 작품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이 실행으로 옮겨지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농장을 꾸밀 생각이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제주도 서귀포를 가게 되었고, 그 곳에 조그만 귤밭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가족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

새로 농장을 일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몇 년간을 나는 몹시 바쁘게 살았다.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나는 다시 ‘시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2년이 저물 무렵, 몇 편의 작품을 추려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숲의 그 아침’이 최종심에 올랐다. 그 심사평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은 金鍾燮의 ‘겨울 동양화’, 박연신의 ‘눈이 내리면’, 이강룡의 ‘脈’, 김재황의 ‘숲의 그 아침’, 정공량의 ‘心想’, 이종철의 ‘가을斷想’, 許旻과 김수림의 ‘山바라기’ 등이었는데 金鍾燮의 ‘겨울 동양화’를 당선작으로 가렸다. ―중략― 이강룡, 김수림, 김재황, 허민의 작품도 각각 특징들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작품들이 향상되어 있었음은 기쁜 현상이라고 보겠다. 또 순전한 서정만이 아니라, 시대성과 생활상을 바닥에 깐 고도한 정감화에 힘써 주었으면 한다. (李泰極)―

많이 상심하였던지, 그 후로 또 공백이 있었다. 사는 게 그만큼 힘들었기도 했다. 그런데 1984년이 저물어 가자, 또 신춘문예의 병이 도졌다. 그 동안에 모아 두었던 몇 작품들을 손질해서 이번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런데 그 중 ‘동학사에서’라는 작품이 최종심에 들었다.




어둠을 밝혀 가는 믿음이 곧 하늘이라

구름은 문을 열어 저승까지 환한 달빛

관세음 고운 눈길이 미소 한 점 남깁니다.

――졸시 ‘동학사에서’ 둘째 首




그 심사평은 또 이러하였다.

―응모된 작품들은 字數律을 거의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가락을 휘어잡아 자유롭게 요리하기에는 미진했고, 가락에 질질 끌려 다니는 인상이었다. ―중략― 당선을 다툰 작품으로는 ‘뱃사공 분도의 엽서’, ‘작은 사랑의 노래’, ‘귀향’, ‘동학사에서’, ‘鶴을 노래한 三曲’, ‘강가에서’, ‘全琫準의 적’이 골인 一步 전에서 뒤졌다. (朴在森, 李根培)―

참으로 그만둘 수도 없고, 더 이상 계속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흩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염치를 불구하고 꾸준히 매달려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단수로 시조작품 하나를 써서, 다시 샘터의 ‘독자 시조난’에 투고했다. 그 작품이 1985년 샘터 6월호에 실렸다.




언제나 모자라던 잎새들의 잠이더니

어느새 금방울로 어르는 저 하늘 밖

가랑이 찢기는 유월, 비파 소리 들리겠다.

―― 졸시 ‘앞뜰의 비파나무’




너무 서두른 작품이었다. 그 평도 내 생각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초장이 잘 빠진 대목이지만, 중장과 종장은 좀 힘이 처져 있고 비약이 너무 심한 인상이다. 그래서 모처럼 시적 창의(創意)는 빛나 보였지만, 그 마무리가 잘 안 된 느낌이다. 중요한 것은 ‘이해의 맥’이 통하지 않는 점이 흠이었다. (朴在森)―

나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또 한 작품을 써서 샘터로 보냈다. 얼마 동안을 기다리자, 그해 샘터 9월호에 게재되었다.


매미들 울음빛이 목숨을 벼리는데

바람 소리 물결 소리 잎에 담아 크는 열매

서귀포 들녘을 온통 초록 멀미 차올렸다.

―― 졸시 ‘여름 귤밭’




이 작품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급했기 때문인 성싶었다. 작품평에도 그것이 잘 나타나 있었다.

― 그런 대로 중장에서는 성공했으나 초장과 종장은 억지 표현인 것같다. 시조의 가락은 언제나 자연스러운 율조가 배어 있어야 하는데 약간 설익은 것이다.(朴在森)―




나는 다른 곳으로 작품을 보내어서 평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중앙일보 ‘독자 시조난’에 작품을 한 편 우송했다. 그 작품이 선(選)에 들었다.




더위도 이쯤에선 더 오르질 못하고서

가파른 거친 숨결을 안개에 업혀 떠나고

표표히 흰 풀꽃들이 무리 지어 누웠다.

―― 졸시 ‘登高’




비로소 이 작품이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다시 자신감이 생겼다. 그 평은 아래와 같았다.

―‘登高’에선 가을맞이의 낌새와 소슬함을 안긴다. 말하자면 덤비지 않고 이미지를 3장에 순화해 가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쉽게 쓴 듯이 보이나 그게 아니다. 요는 안이함이 문제인 것이다. 한라산의 ‘윗새오름’쯤 오른 듯도 하다.(李相範)―

나는 비로소 자신을 얻었다. 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당시에 나는 서울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행히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집을 처분하고, 가족을 이끌고는 전격적으로 상경했다. 시조짓기를 본격적으로 해 볼 심산이었다. 서울로 와서 대충으로 짐의 정리를 끝내자, 작품 쓰기에 매달렸다. 그 한 편을 정서하여 중앙일보 ‘독자 시조란’ 담당자 앞으로 보냈다. 그 작품이 게재된 것은 1987년 7월이었다.




뜨거웁게 앓는 소요, 물굽일 갈앉힌 심연

태초에 닫힌 침묵, 풀빛으로 우린 고요

청산도 명상을 풀고 빈 가슴을 내보인다.

―― 졸시 ‘녹차를 따라 놓고’




다시 한 번 좋은 평을 받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차를 마신 듯 쇄락한 정서를 노래한 작품이다. 뜨거운 열기로 일렁이는 감정의 물굽이를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힌 경지에서 마주한 靑山과 하나로 융화한 모습, 그 깊은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金濟鉉)―

그 시점에서 나는 ‘신춘문예’만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월간지를 골라서 신인작품상에 응모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시조를 공부한 지 10년이 되는 1987년, 문협에서 발간하는 "월간문학"으로 투고하여 8월에 신인작품상을 받았다.

그 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결국 최종심에 오른 세 작품 ‘군산항 저물 무렵’, ‘채석장에서’, ‘서울의 밤’을 놓고 겨루었는데 ‘군산항 저물 무렵’은 좀더 이미지를 몽글리고 대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다음 기회로 돌렸다. 다시 ‘서울의 밤’과 ‘채석장에서’는 각기 개성이 달라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서울의 밤’은 평범하고 다루기 힘든 소재를 소화하여 개성을 가지고 서정의 새 경지를 열어 주었으며 전 작품이 고르다는 데 있었고, ‘채석장에서’는 그가 이끄는 이미지가 폭절은 생활정감과 상황이 개성에서 나온 듯한 넉넉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꼽았다. 말하자면 시조단에 내어놓아도 자기 몫을 훌륭히 개척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당선작으로 같이 밀기로 했다. (金濟鉉, 李相範)―




서 있기만 하던 숲이 흔들리고 있다

지붕을 타고 내려 모퉁이로 기는 바람

불을 켠 포장마차가 밤거리를 흐른다.



한 순간을 잊어 보는 시름은 아직 남아서

뒤밟는 검은 영혼 그림자를 떨치려고

한 잔 술 취기를 입으면 앞서 가는 가로수.




갈라진 건물 틈새 절어 있는 주름진 때

달빛이 그늘을 일궈 밤벌레를 들춰내면

개구리 하얀 울음이 숯불 위를 걸어간다.



아득한 심연으로 수초 같은 혼이 잠긴

명멸하는 불빛들이 비늘처럼 박히는데

비비는 어둠의 소리 쓸려 오는 갈대 소리.




정해 둔 수심도 없고 열어 논 물길도 없다

드리운 꿈을 입질해 낚이는 허무를 따는

거리의 주정꾼 하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 졸시 ‘서울의 밤’ 전문




이로써 수많은 밤을 밝히고 작품을 쓰면서도 , 마음 한 편으로는 불확실한 진로에 방황하던 고통의 날은 끝났다. 이제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가야 할 길을 정했으니, 앞만 보고 가면 그뿐이다. 그게 나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다.

1988년 6월, 드디어 나는 작품 2편, 즉 ‘숲․아침’과 ‘숲 이야기’를 월간문학을 통해서 발표하였다. 이 중의 작품 ‘숲․아침’은 충앙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최종심에 들었던 작품인 ‘숲의 그 아침’을 다시 손질한 것이다. 그 두 작품에 대한 평이 ‘현대문학’에 실렸다.

―이 달에 관심을 끌게 한 것으로 김재황의 시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숲․아침’과 ‘숲 이야기’ 등 고른 수준의 2편을 ‘월간문학’에 선보였다.




산새를 울음빛에/ 단풍이 젖어 있다/ 멀리 기지개 켜면/

달려가는 산메아리/ 간밤에 산마루 너머/ 잦아들던 風樂이더니.


이슬로 방울지는/ 성좌를 가늠 보면/ 놓고 긴 고운 音聲/

빛살이 되어 내려앉고/ 그 은혜 잎새 사이로 /하늘 열고 내민 얼굴.

―― ‘숲․아침’ 1․2 수




그리고 같은 셋째 수에서는, 문 열린 골짝마다 물소리 스미는 母土라든지, 고뇌 또한 山果의 맛으로 비유한 것과 연륜 깊이 묻힌 적막을 일궈 하나의 불붙는 갈채로 승화시킨 점은 신인의 차원을 넘어선 산뜻한 감칠맛이 그대로 살아 있는 시조다운 맛을 느끼게 했다. 그저 평범한 소재로 제 맛을 내는 수완을 발휘한 것은 이 시인의 저력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자연에 대한 서정성을 군더더기 없이 교감시켜 응축해 낸 통찰력은 시조의 그릇에다 우리 본래의 토착적인 감각을 효과적으로 도입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김재황이 같은 지면에 발표한 ‘숲 이야기’ 역시 매끄러운 여력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의 공간 속에 비친 자아의 눈을 통하여 시름과 통증을 삭이려는 인간의 고뇌와 숲의 연계성을 표출함으로써 일단은 성공을 거둔 것이다.(李殷邦)―

그런가 하면 ‘시문학’(1988. 7월호)에도 간단한 평이 있었다.

―김재황의 ‘숲 이야기’와 ‘숲․아침’(월간문학)은 언어의 신선함과 형상화의 시도는 인정되나 시상이 허약해 보인다.(張諄河)―

어찌되었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한 시조시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모든 분들이 고맙고, 시조와 인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하다. 이제 시조단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시조집으로 6권을 상재하였다. 즉 1991년에 첫 시조집 ‘내 숨결 네 가슴에 스밀 때’를 외길사에서 펴냈고, 1994년에 두 번째 시조집인 ‘그대가 사는 숲’을 도서출판 경원에서 펴냈다. 그리고 2001년에 세 번째 시조집인 "콩제비꽃 그 숨결이"를 도서출판 "서민사"에서 펴냈다. 또 이어서 2002년에 연작시조집 "국립공원기행"과 시조선집 "내 사랑 녹색세상"을 도서출판 "컴픽스"를 통하여 상재했다. 특기할 일은, 내가 그토록 갈망해 온 동시조집 "넙치와 가자미"를 2004년에 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나를 이끌어 주신 많은 분들이 고맙다. 특히 이상범 님은 항상 뜨거운 지도를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스승님으로 그 정을 가슴에 안고 있다. 그리고 이은방 님은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챙겨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서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시조집 "콩제비꽃 그 숨결이"에 부록으로 수록하였으며,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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