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쥬르, 나폴레옹

(22)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다

시조시인 2008. 9. 16. 20:10

(22)

잊지 않았겠지요. 나폴레옹은 프랑스 정부의 장학생입니다. 프랑스 나라에서 숙식은 물론이고 교복까지 공짜로 지급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옷의 치수가 보통의 아이에게 맞도록 되어 있는 기성복이었지요. ‘공짜’(空-)는 ‘거저 얻는 일’을 나타내고, ‘치수’(-數)는 길이를 잴 때의 ‘몇 자 몇 치의 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기성복’(旣成服)은 ‘맞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정한 기준 치수에 맞추어 미리 만들어 놓은 옷’을 뜻합니다. 그 정복은 거의가 보통의 크기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워낙 몸이 작고 여위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정복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어찌나 헐렁한지, 마치 허수아비를 보는 듯했습니다.

“야, 저 아이 좀 봐, 옷이 커서 손이 안 보인다.”

“와하하, 우습다! 옷이 혼자 걸어 다니고 있구나.”

학교 안의 학생들이 몰려와서 알나리깔나리 놀렸습니다. ‘알나리깔나리’는 ‘아이들이 상대편을 놀릴 때에 하는 말’입니다. 한 예를 들자면, “알나리깔나리 오줌 쌌다네.”하고 말입니다. ‘알나리’는 ‘나이가 어리거나 키가 작은 사람이 벼슬한 경우’에 놀리는 말이었답니다. 그러나 ‘깔나리’는 뜻이 없이 그저 ‘알나리’에 장단을 맞추는 말이지요.

아이들 중에는 너무 우스워서 포복절도하는 아이도 있었지요. ‘포복절도’(抱腹絶倒)는, ‘배를 그러안고 넘어진다.’라는 뜻으로, ‘몹시 웃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봉복절도’(捧腹絶倒)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듯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해서 나폴레옹이 풀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기우에 불과합니다. ‘웃음거리’는 ‘웃을 만한 거리’ 또는 남에게 ‘비웃음을 살 만한 채신’을 말합니다. 그렇게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웃음가마리’라고 합니다. 일부의 명사 뒤에 ‘-가마리’가 붙으면 ‘그 말이 뜻하는 대상임’을 나타냅니다. 예컨대 ‘놀림가마리’는 ‘놀림감’의 속된 표현이고, ‘구경가마리’는 ‘행동거지가 남과 달라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사람’을 얕잡아서 이르는 말이며, ‘걱정가마리’는 ‘항상 꾸중을 들어 마땅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기우’(杞憂)는, ‘지나친 걱정이나 쓸데없는 걱정’을 말합니다.

옛날 옛적 중국의 기(杞)나라에 ‘걱정도 팔자’인 어떤 사람이 살았는데, 그는 공연히 걱정을 많이 하여 심지어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웠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합니다.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다.’는, 의도적으로 ‘음식을 전연 먹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 실려 있지요.

아무리 많은 아이들이 놀려도, 나폴레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대수롭다’는 한자어인 ‘대사(大事)롭다.’에서 왔다고 합니다. ‘큰일답다.’는 말이지요. 지금에는 바뀌어서 ‘소중하게 여길 만하다.’의 뜻으로 되었습니다. 특히 ‘중요하지 않거나 시들하다.’라는 뜻으로, ‘대수롭지 않다.’라는 말이 흔히 쓰이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옷이 날개’라는 말이 무색해집니다. ‘무색’(無色)은 ‘아무 빛깔이 없다.’는 뜻인데, ‘부끄러워서 볼 낯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는 ‘무안’(無顔)이라고도 합니다. 이왕에 ‘옷’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금부터 ‘우리 옷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사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가죽옷’을 만들어 입었을 테지요. 자연의 동물 가죽을 그대로 사용해서 팔과 다리와 목만 나오게 하면 되었을 터이니까요. 가죽과 더불어서 사용된 옷의 재료로는 ‘청올치’나 ‘삼베’나 ‘모시’나 ‘비단’ 등이 있었답니다. ‘청올치’가 무엇이냐고요? ‘청올치’는 ‘칡에서 뽑아낸 속껍질’인데, 갈포의 원료가 됩니다. 이는, 질감이 거칠지만, 질기고 구하기도 쉽습니다. ‘삼베옷’은 주로 서민들이 입었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그 반면에, 구하기 힘들었을 ‘비단’을 비롯해서 손이 많이 가는 ‘모시’는, 귀족들이 입었을 거라고 상상됩니다.

삼국시대에는 여자와 남자가 서로 구분이 없이 옷을 입었다고 전합니다. 저고리는 엉덩이가 덮일 정도로 길었다는데, 여밈이 오른쪽 섶을 왼쪽 위에 덮는 방식인 ‘좌임’(佐袵)이었다는군요. 일반 서민들은 계절이 따로 없이 대부분 ‘삼베옷’으로 지냈는데, 그 옷은 올이 가늘고 고운 게 아니라 굵고 거칠었답니다. ‘모시’는 삼국시대부터 귀족의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모시풀의 껍질을 가지고 만드는 옷감으로, ‘저마’(紵麻)라고도 합니다. 모시는 소박하고 섬세하며 단아하고 청아한 아름다움을 지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조상들이 무척이나 아꼈겠지요.

우리의 의생활(衣生活)은, 고려 공민왕 때에 문익점(文益漸)이란 사람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옴으로써 아주 급격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원나라의 황후는 고려 출신의 ‘기황후’였습니다. 고려의 공민왕은 그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을 반란죄로 죽였습니다. 문익점은 그 사실을 해명하려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기황후는 그 해명을 쉽게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고, 그에 의한 큰 노여움 때문에 문익점은 중국의 화남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그는 뜻밖에 목화를 만나게 되었으며, 위험을 무릅쓴 채로 그 씨를 몰래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들여온 목화씨를 그의 장인인 정천익(鄭天益)이 받아서 재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2백 년이 지났을 때는, 우리나라에 목화솜으로 짠 ‘무명옷’이 널리 퍼지게 되었답니다.

사람이 좋은 옷을 입으면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몸가짐도 좋아져야 합니다. ‘목후이관’(沐猴而冠)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이는, ‘옷은 훌륭하나, 마음은 아름답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김 재 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