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주 수필집 '어느 따뜻한 오후의 농담'
[맛보기]
캐딜락 유모차
이 완 주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것보다 유쾌한 일은 없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다. 눈을 감고 사색을 이어가다 보면 까무룩 잠이 들기도 한다. 도착하려고 하는 시간에 데려다 주는 것도 좋고, ‘지공선사’이기에 종일 어디까지 가도 공짜라 더더욱 좋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언제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쩍벌남(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남자)과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쩍벌녀가 옆에 앉아 있으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졸며 가는데 충격을 가하면서 주저앉는 사람을 만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다. 무엇보다도 남이 듣거나 말거나 큰 소리로 서캐 알 같이 시시콜콜 끝이 없는 통화도 짜증스럽다. 어떤 이는 잡다한 일상을 그림 그리듯이 설명하고 상대방에게 “강아지는 밥 잘 먹느냐?”는 수준까지 묻는다. 통화는 열 정거장까지도 길게 이어진다. 어느 날은 오십 대로 보이는 건너편 아주머니의 긴 통화에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전화 좀 이따 하면 안 될까요?”라고 주문했다가 계속 째려보면서 뭐라고 중얼중얼하는 바람에 중도에 내려서 다음 차를 타고 간 경험도 있다.
어느 날은 젊디젊은 엄마가 거창한 유모차를 밀고 올라왔다. 그렇게 큰 유모차는 처음 보았다. 타고 있는 어린아이의 눈높이가 어른의 가슴까지 닿는다. 유모차를 통로에 가로로 세워놓았는데, 한 사람이 몸을 비틀어 겨우 왕래했다. 나는 처음 보는 무지막지한 유모차가 어쩌면 대형 영구차를 만드는 캐딜락 자동차회사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멋대로 ‘캐딜락 유모차’라고 명명했다.
캐딜락 유모차 엄마는 이제 막 공연을 끝내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고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와 같이 짙은 화장을 했다. 닮은꼴로 보아 여동생인 듯한 아가씨 역시 방금 무대에서 내려온 것 같았다. 그들은 내 옆의 빈자리에 앉는다. 자매는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고, 서너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는 세상을 초탈한 수도승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내가 눈으로 사인을 보내다 못해 손짓으로 아는 체해도 초점 없이 멀뚱멀뚱 앉아 있다. 표정은 사뭇 어른스럽다 못해 냉소적이기도 하다.
시종 칭얼대지도, 엄마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아이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아서 그 아이의 엄마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갔지만 끝내 엄마와 아이가 이야기를 나누거나 스킨십을 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내렸다.
그 후부터 유모차를 밀고 타는 엄마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는데, 내 나름대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다.
언제나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모차를 미는 엄마는 아름답게 화장을 했고, 그런 엄마는 아이와의 대화나 스킨십을 별로 나누지 않는 편이었다. 아이도 그런 엄마를 놓아둔 채로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어쩌면 화장이 지워질까 하여 피차가 염려해서인지도 모른다. 어떤 엄마는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어 주거나 자신이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이를 업거나 안은 엄마는 입성도 서민적이고 화장을 했어도 최소한으로 했거나, 아예 생략한 모습이다. 그런 엄마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열심히 설명하고, 때때로 스킨십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이런 아이들은 눈길을 주면 반응하고 손을 내밀면 밝게 웃으며 잡는다.
엄마가 “할아버지께 인사해 봐.”라고 말하면 아이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 인사한다. 그런 아이의 표정은 아이답게 순진무구하다.
'아이다운 아이'와 '어른 같은 아이' 중, 어떤 아이가 이다음에 커서 더 행복하며 엄마에게 더 큰 즐거움을 선사할까 그게 궁금하다.
어느 따뜻한 오후의
농담濃淡
저자: 이완주 / 판형: 145*225 / 페이지: 328쪽 / 가격: 12,000원 /
담당: 선우미정(031-955-7386) / 구매문의: 총무과(031-955-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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