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줍는 사람과 말을 하는 사람
이 시 환
시인이 너무 많다. 시인은 원래 많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시인이란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솔직하게 노래하는 사람인데 그런 행위의 결과를 가지고서 쉽게 돈으로 보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그러한 시가 그렇게 요긴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밥은 먹어야 살지만 시는 읽지 않고 쓰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인으로서 한 평생 살기를 감당해 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운명적으로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면 몰라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연유에서, 옛 부모들은 자식이 책을 가까이 하거나 글을 쓴다면 가난하게 산다고 오히려 걱정들을 해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신주의가 팽배한 오늘날엔 시인이 너무 많다. 역설적인 현상이다. 아니, 시인이라기보다는 시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은 ‘진짜’라기보다는 ‘가짜’라는 뜻이다. 그 가짜들은 대체로 세상에 널려 있는 ‘좋은’ 말들을 주어 담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경향이 짙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이란 정보바다가 늘 곁에서 출렁거리고 있고, 그 속을 손쉽게 헤엄쳐 들어가듯 검색해 볼 수 있는 수단과 방법들이 날로 다양해지면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엔 꼭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야만 가능했던 일들이 언제 어디서든 노트북만 열면 되는 세상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손안에 들린 작은 핸드폰만 있으면 누워서도 정보 검색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이런 환경적인 변화와 함께 맞물려 말을 줍거나 주운 말을 가공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인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들 세계에서는 누가 먼저 좋은 말을 주어 담느냐와, 그 주운 말을 가지고 자신의 말인 양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일이 곧 능력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말이란 무엇인가? 삶의 본질에 대한 경험이나 통찰력이 반영되어 사실을 깨우쳐 주는 말과, 삶의 기술이나 방법으로서 지혜에 해당하는 말들과, ‘내’가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담아낸 공통된 관심사에 대한 수사적 표현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동시대인들의 관심과 욕구와 감정과 생각이 반영된, 그런 공유된 정서적 반응으로서의 시 문장을 좋아하며, 또한 퍼 나르기를 즐긴다. 즐긴다는 것은 자신의 삶속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면서 말만 좋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기 삶에 대한 진실한, 혹은 절박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남의 이야기만 이리 저리 옮기며 자신의 이야기인 양 퍼 나르는 것이다.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은연중 모방하고 변용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하면서 스스로 진화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진짜 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만의 이야기이어야 하며, 개인의 주관적 정서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진실을 일깨우고 환기시켜 주는 이야기이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장미를 중심소재로 노래한 시들을 뽑아서 읽어보아도 장미라는 꽃 그 자체를 노래한 듯 보인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최소한의 장미 특성에 자신의 인성(人性)을 투사시킴으로써 결국 시인은 장미를 빌려서 자기 자신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장미의 객관적인 본질을 이해하고자 함이 아니며, 그것은 과학에서 할 일이지만, 시인이 그 장미에 부여한 주관적인 의미 곧 시인의 개인적인 품성과 성격과 기질과 지식과 감정 등이 반영된, 새로이 창조된 장미에 깃들게 되는 시인이라는 타인의 정신세계를 읽는 것이다. 바로 우리는 어떤 대상을 통해서 이루어진 시인의 주관적인 사유나 감정 곧 정서적 반응을 통해서 공감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그 시인의 문장으로써 구축되는,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통해서 더불어 생각하고 더불어 느끼는 공감과 공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소설을 짓는 사람을 두고 ‘소설가(小說家)’라 하고, 수필을 쓰는 사람을 두고 ‘수필가(隨筆家)’라는 말을 쓰지만 시를 쓰는 사람을 두고 ‘시가(詩家)’라고 하지 않는다. 소설이나 수필은 시설[工場=家]만 갖추어지면 양산(量産)이 가능한 ‘생산’에 가깝지만, 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뜻이다. 시는 시를 짓는 사람 그 자체를 드러내는 수단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온갖 대상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그 대상을 통해서 시인 자신을 노래할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에게의 솔직함이다. 그래서 시는 생산이 불가능한 것이다.
가짜 시인이나 대중들이 좋아하며 ‘줍는’ 말이란 바로 본인들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자신의 살아있는 말이 아니고 남의 이야기이라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 바로 남의 이야기를 줍고 꿰어서 자신의 이야기인 양 말하는 사람들은 시를 짓는 게 아니라 생산하는 쪽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산하는 시 같은 것들은 자신의 진실이 빠져버린 ‘앙꼬 없는 찐빵’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앙꼬 없는 찐빵을 먹으며 맛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빵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훌륭한 혹은 진실한 시인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에는 말을 줍는, 잔꾀가 많은 시인들이 너무 많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서 느끼고 생각하며 깨달은 사실을 진실하게 말하는, 자신을 노래하는 시인은 결코 많지가 않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비애이다.
-2016. 06. 28.
이시환 (시집 『여백의 진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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